작자 미상 '이하응 금관조복본 초상', 19세기, 비단에 먹과 채색, 132.1cm×67.6cm, 보물 1499-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자 미상 '이하응 금관조복본 초상', 19세기, 비단에 먹과 채색, 132.1cm×67.6cm, 보물 1499-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금관조복(金冠朝服)차림을 한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초상화 속의 흥선 대원군은 머리에는 금관(金冠)을 쓰고, 조복을 입고, 검은색 목화를 착용한 채, 호피로 덮은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하응이 입고 있는 조복은 왕실의 종친이나 관원이 명절이나 경축일 또는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 입던 관복으로, 가장 화려한 예복이다.

조복을 입을 때는 푸른색의 청초중단을 받쳐 입고, 붉은색 적초의를 맨 위에 입는다.

또한 조복을 입을 때는 양관(梁冠)을 썼는데, 양관은 표면에 금칠이 되어 있어 금관(金冠)이라고도 불렀다.

이로 인해 조복을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고 불렀다.

금관이란 이름에 걸맞게 관은 매우 화려한데, 앞면과 뒷면을 모두 금으로 칠했으며 관에 꼽는 비녀도 금박 칠을 했다.

대원군이 쓴 관은 세로로 선 다섯 개가 있는 오량관(五梁冠)으로, 이는 최고 품계인 1품을 나타낸다.

그리고 금관조복을 입을 때는 상아로 된 홀을 손에 들었는데, 흥선 대원군은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은 채 홀을 쥐고 있다.

흥선 대원군이 앉아 있는 의자의 바닥에는 화문석이 깔려 있고, 2단으로 된 족좌대에도 ‘희(囍)’자를 넣은 화문석이 깔려 있다.

흥선 대원군 이전 시대에 그려진 금관조복본 초상화는 <채제공 초상(전신상)>과 <조문명 초상(반신상)> 등 소수의 작품만이 남아있다. <이하응 금관조복본 초상>은 서울역사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각 1점씩 모두 두 점이 남아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은 화폭 우측에 “내 나이 오십 기사년 초여름에 스스로 쓰다. 화사는 이한철과 유숙이고 장황은 한홍적이다”

라는 발문이 있어 화원 화가인 이한철(李漢喆, 1808~?)과 유숙(劉淑, 1827~1873)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본은 표제가 없지만 전체적인 크기·형식·재료·기법 등이 서울역사박물관 소장본과 거의 동일하여, 이 작품의 작가도 이한철과 유숙으로 추정된다.

19세기의 화원 화가인 이한철은 화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태조의 어진 모사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헌종 어진·철종 어진·고종 어진의 제작에도 참여했고, 초상화의 대가로 당대에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32년간 규장각 자비대령화원으로 활약했고, 추사파의 일원으로 추사 김정희 초상을 비롯하여 많은 권문세가의 초상을 그렸다.

최고의 인기와 실력을 갖춘 이한철이 당대의 실세인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초상을 그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특히 이하응의 초상을 여러 점 그렸는데, 흥선대원군의 나이 50세에 제작된 금관조복본 · 흑단령포본 · 와룡관학창의본 등을 후배 화원인 유숙과 함께 그렸고, 흥선 대원군이 61세이던 해에 제작된 흑건청포본 · 복건심의본 등은 이창옥의 도움을 받아 그렸다.

이한철은 얼굴을 그릴 때 기본적으로 갈색을 바탕으로 칠하고, 윤곽선과 이목구비는 얼굴색보다 진한 갈색 선으로 그린 뒤, 눈썹은 살결의 방향을 살려 채색하였다.

이렇게 짙은 갈색으로 얼굴 전체를 칠하고 굵은 선으로 윤곽선을 그리는 방식은 1860년 이후 제작된 초상화 작품에서 많이 보이는 특징으로, 대원군의 강한 인상을 표현하는 데에도 적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눈꺼풀은 검은색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동공은 검은색, 홍채는 연갈색으로 채색하여 눈빛에 생기를 주었다.

그리고 코와 얼굴 주름은 굵은 선으로 균일하게 그리고, 수염은 미세한 부분까지 세필을 이용하여 한 올 한 올 묘사하였다.

입술의 윤곽선을 그릴 때는 검은색으로 진하게 그렸고, 입술선 안쪽은 붉은 색으로 칠했는데, 특히 입술 아래쪽으로 선을 한줄 더 그려 입술의 볼륨감을 강조했다.

이하응의 본관은 전주, 호는 석파(石坡)다. 이하응은 영조의 5대손으로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뜨자, 그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명복(후에 고종)을 왕으로 올린 뒤, 섭정을 하면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흥선 대원군은 조선 말기에 정치·경제·사회·종교·외교·예술 등 전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특히 예술에 관심이 많아 동시대 문학가나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후원했고, 본인 역시 서화에 조예가 깊었다.

당대 예원의 총수였던 추사 김정희도 이하응의 글씨와 난 그림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는 현재 8점이 남아 있는데, 6점이 비단에 채색을 한 정본 초상으로, 이 정본 초상은 50세 상이 4점, 61세 상이 2점이며, 나머지 2점은 초본 형식의 초상화이다.

【참고문헌】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후기의 초상화(이태호, 마로니에북스, 2016)

한국 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편(국립민속박물관, 20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ac.kr)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