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죽변 항구, 향나무, 매눈, 돌재로 이어진 십이령은 넘는데 사나흘, 물물교환 후 돌아오는 데 열흘 이상 걸렸으니 무뢰한(無賴漢)1)에게 물품을 빼앗기기도 했는데, 계(契)를 만드는 등 조직적이고 집단화된 상단(商團)이 1950년대 무렵까지 있었다.

보부상은 삼국시대 이후 물물교환으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세력이 커지자 정치적으로 협력하였거나 이용되기도 했다.

직선으로 뻗은 금강소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직선으로 뻗은 금강소나무. [사진=김재준 시인]
누리장나무의 만발한 꽃. [사진=김재준 시인]
누리장나무의 만발한 꽃. [사진=김재준 시인]

조선 건국,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과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군량미 조달, 1810년 홍경래의 난 때 보부상을 동원하였는가 하면,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강화도 군량미 조달에 투입되기도 했다.

1860년대 보부청을 설치하여 전국의 보부상들을 관리하였는데 좌상(座上), 부좌상(副座上), 반수(班首), 접장(接長), 영좌(令座), 공원(貢員), 집사(執事) 등으로 위계질서가 있어 봉놋방2)에서는 목침까지 서열이 있었다.

현재 두천리 “내성행상 접장 정한조 불망비(乃城行商接長 鄭韓祚不忘碑)3)와 내성행상 반수 권재만 불망비(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에서 보는 것과 같이 유력자를 으뜸으로 하여 행상을 하였는데,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민가에서 머물며 지게에 달고 다니던 솥으로 밥을 지어 먹기도 하였다.

미역, 간고등어, 소금 등을 얹은 다리 없는 바지게에 짤막한 작대기로 서서 쉬기 때문에 선길꾼, 바지게꾼이라 불렀다.

이렇게 내성에서 돌아오는 고생길, “오나가나 바지게 한평생 바지게 인생”으로 고갯길 넘나들며 시름을 달랬다. 뉘 집 낭군이 백리길 이 산을 오르내리며 두고 온 규방을 그리워했을까?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 가노 (중략)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1970년대 후반까지 물물교환으로 생업을 하던 죽변 후정리 방축골의 이복록씨가 마지막 도부(到付)4)로 생존해 있다.

울진 숲길, 5개 중 4개 구간 개방, 5~11월만 운영

4시쯤 바릿재(소광리12.1·두천리1.4킬로미터)에 도착한다.

바리는 소, 말에 실은 짐을 셀 때 한 바리, 두 바리라고 하는데 바리재가 바릿재로 변한 것 같다. 잠시 후 임도길이 시작되는데 야콘 밭을 지나 길옆으로 두릅·오리·누리장나무들이 제 철 만난 듯 가지를 활짝 쳐들고 있다.

한껏 넓혀 놓은 길 따라 뙤약볕 맞으며 걷는다. 큰뱀무·하늘말나리·산수국·쑥·칡·싸리·산딸기·개망초·붉나무·고추나무가 깊은 산중임을 알려준다.

꽃은 어느덧 지고 말았지만 초여름 고추나무 흰 꽃은 시골처녀의 순박함을 엿볼 수 있다. 고춧잎을 닮아 마주나는 삼출복엽(三出複葉)5)으로 재질이 단단해서 나무젓가락으로 그만이다.

길옆으로 계곡물이 소리 지르며 흐르고 붉나무는 푸른 잎을 기세 좋게 뻗쳤다.

열매집을 오배자(五倍子)라 하는데 붉나무 벌레집(蟲廮). 진딧물이 잎에 자극성 물질을 뿜어 생긴 혹주머니로 속이 비고 신맛이 난다.

한방에서 치질·혈변·위궤양·기침·코피·자궁출혈·가려움증·간보호 등에 썼다.항산화작용이 보고되고 탄닌이 있어 잉크 원료로도 쓴다. 가을 무렵 햇볕에 말려 한약 달이듯 끓인다.

입안이 헐었을 때 달인 물을 머금고, 외용으로 쓸 때는 달인 물로 씻거나 가루 내어 뿌린다. 벌레가 든 오배자를 덖은(가열할 때 탄닌 분해로 살균물질 생성)뒤 벌레, 찌꺼기를 버리고 가루내서 환을 지어 먹기도 했다.

소금이 귀한 산촌에서는 붉나무 열매를 찧어 우려서 두부용 간수로 썼다. 지한(止汗)·지해(止咳)·지리(止痢)·지혈(止血)·지탈(止脫) 등 다섯 가지에 효과가 있으므로 오배자라고 했다.

울진 숲길은 5개 중 4개 구간을 개방하는데 탐방인원을 제한하여 5월부터 11월까지 운영한다. 두천~소광리(13.5킬로미터) 구간은 쉽게 걸을 수 있어 4시간 정도면 완주할 수 있다. 우리나라 숲길 가운데 가장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한국 관광 100선에 뽑혔다.

4시 20분 개다래나무 하얀 이파리, 개망초 꽃이 애절하고 길옆에는 고광·산뽕나무, 누리장나무는 남쪽 지방보다 잎이 좁고 길다. 계곡물은 바위에 떨어져 바람소리와 어울려 흘러가고 작살나무열매도 앙증스럽다.

같이 걷던 일행은 피곤한 듯하다.

“돌아갈 땐 계곡에 쉬었다 가자.”

층층나무를 지나 누리장나무 꽃향기. 이맘때쯤 산새 따라오며 울고 으스름 등에 지고 분주히 집으로 돌아가던 시절, 그때의 향기 코끝에 맴돈다. 뒤에 오던 몇 사람은 힘 드는지 숙소에 먼저 간다고 연락이 왔다.

샛재 오르는 길. [사진=김재준 시인]
샛재 오르는 길. [사진=김재준 시인]
찬물내기 쉼터. [사진=김재준 시인]
찬물내기 쉼터. [사진=김재준 시인]

찬물내기쉼터 100미터 정도 못 미쳐 황장봉산(黃腸封山) 동계(東界) 표지다. 2011년 9월에 알려졌는데 발견자에게 상을 주면서 잡음이 생기기도 했다.

왕실의 관을 만들던 황장목(黃腸木) 벌채를 금하는 동쪽 표지로 높이 1미터쯤 되는 길옆의 바위에 “황장봉산 동계조성 지서이십리(黃腸封山 東界鳥城 至西二十里)”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황장봉산은 동쪽 경계인 조성(鳥城, 안일왕산성)으로부터 서쪽으로 이십 리다.

이 일대에서 1992년 소광리 황장봉표(黃腸封標)에 이어 두 번째 발견된 곳으로 울진소나무의 우수성을 증명하고 있다.

5시 20분 찬물내기 정자(소광2리7·두천1리6.5킬로미터) 쉼터에 닿았다. 마을 주민들이 점심으로 산나물 비빔밥을 팔기도 한다.

시멘트 포장길을 두고 오른쪽 개울 건너 올라가는 산길. 가끔 산양이 나타나는데 잠깐 사이 헷갈릴 뻔 했다.

산속엔 어느덧 햇빛이 숨고, 5시 30분 드디어 늘씬한 다리처럼 쭉쭉 뻗은 금강소나무들이 나타났다. 밀림을 헤치고 근엄한 유적을 찾은 것이 꼭 이런 기분이었으리라.

10분 더 오르니 샘물 맛이 좋다.

물병마다 모두 채우고 엄지손가락 치켜들어 찬사를 보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도시의 물맛이 아무리 좋다 해도 산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비하면 물이 아닌,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장구채, 노랑물봉선과 여기서도 개다래 백화현상이 나타나는데 종족번식의 기발한 유혹이라고 말한다. 6시경 새들도 쉬어간다는 해발 640미터 샛재(두천7.6·소광5.9킬로미터).

고개를 넘어서자 기운 넘치는 공기가 상쾌하다. 한참 있으니 몸이 가벼워지는데 풍욕이요 삼림욕이다.

샛재 일원에는 2~300년 이상 되는 소나무들이 수천 그루, 앞으로 문화재복원으로 쓰일 나무들이다. 나무마다 노랗게 일련번호를 매겨 놓았고, 간혹 600백여 년 된 대왕소나무를 만난다.

대왕소나무 [사진=울진군청]
대왕소나무 [사진=울진군청]

“이 지역에서 형용사적 표현으로 대왕소나무라 부르는데, 나의 견해는 이렇습니다. 수령 600년 이상 되어야만 대왕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에 못 미치는 것은 노송(老松), 전설과 품격을 더하면 고송(古松)으로 치고, 만고풍상을 다 겪은 고송의 시기를 지나면 신송(神松), 600살 이상 된 거룩한 존호가 대왕소나무입니다. 여기서 남동쪽 1시간 더 가면 서·북면 경계의 안일왕산(安逸王山 819미터)에 700살 되는 대왕소나무가 계십니다.”

부족국가 시대 창해삼국(滄海三國)6)인 실직국의 안일왕과 관련된 전설이 많은데 안일왕산과 왕피천은 왕이 피난 와서 붙여졌고, 통고산은 적군에 쫓기다 재가 높아 통곡산(通谷山), 통고산(通高山)으로 굳어졌다.

조령 성황사(鳥嶺 城隍祠) 옆에 앉아 잠시 쉰다.

“성황당과 성황사의 차이점이 뭘까요?”

“…….”

“치성을 올리거나 제사를 지내는 건 똑같지만 성황사는 위패를 모십니다. 위패의 유무(有無)로 당호를 구분하는데요. 그럼 위패는? 죽은 사람 이름을 적은 나무패입니다.”

“아 그렇구나.”

퇴락한 성황사 문을 열면서 먼지를 뒤집어썼다.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에 걸린 편액이 낡았다. 100년 더 된 이곳은 대관령 서낭을 본받아 처녀화상이 있었다 한다.

병과 액을 물리치고 안녕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다. 산신, 산왕, 선왕, 서낭으로 변천된 것 같다.

가운데 조령성황신위(神位) 옆으로 빽빽한 이름자는 시주(施主)한 사람들일까?

6시인데 산속이라 어두워 그만 되돌아가야겠다. 소광리로 곧장 내려가면 너삼밭재(소광2.5·두천11킬로미터), 저진터재(소광0.7·두천12.8킬로미터)로 갈 수 있지만, 소나무 한 번씩 멋지게 안아주고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빛내골 가는 길

고갯길마다 동해의 갯냄새와 선질꾼 땀내가 물씬하다.

등에는 온통 땀으로 젖었지만 열두 고개를 잇는 길에는 성황당과 불망비, 주막터가 눈길을 끌고, 조상님의 연륜을 지닌 소나무의 호위태세에 그냥 지나치지 못해 성황사(城隍祠)에 술잔을 올린다.

주변에는 온갖 새들이 지저귀며 산중의 손님을 맞이하고 새재가 십이령의 정수리인 듯 여기부터 소광리 가는 길은 내리막. 산당귀, 사초, 산동백사이로 졸졸 흐르는 숲속의 냇물과 아늑한 자리는 얼마 전까지 인적이 있었다는 걸 느끼면서 걷는다. 5~600살 어르신들이 띄엄띄엄 서 계셨다.

울진 금강소나무. [사진=울진군청]
울진 금강소나무. [사진=울진군청]

산은 나무가 숲을 이루고 바위와 짐승들이 더불어 사는 신령이 깃던 곳이다. 민간신앙이나 도교 등에서는 단순한 산이 아니라 신령이 계시므로 재를 올리며 치성을 드리곤 했다.

큰 바위와 오래된 나무에 금줄을 쳐서 무사안녕을 빌었으며, 명산대천의 동천(洞天)은 모두 이러한 영향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성황사 아래 바위를 깎아 세운 비석이 있는데 여기도 불망비(不忘碑)다. 무엇을 잊지 말란 말인가? 지방관의 공덕? 도광(道光)7) 22년, 헌종 무렵 1840년대쯤 탐관오리 학정이 절정임에랴……. 돌무더기 사이로 화전을 일군 옛터의 흔적들 그대로다.

혹세(惑世)에 무민(誣民) 당했던 민초들은 돌밭을 일구며 돌배·박달·다래·졸참·동백나무 사이로 땀 닦으며 한 잔 기울였을 나그네 터.

(다음 회에 계속)

글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주석>

1) 성품이 막되어 불량한 짓을 하는 무리.

2) 여러 사람이 자도록 된 주막집 방.

3) 1890년대에 세운 것으로 반수·접장(우두머리)은 내성 소천장 관리인으로 추정, 당시 현지 하당(下塘), 중당(中塘)에 철광산과 용광로가 있어 석비보다 제작이 쉬웠고 일제의 철재 동원령 때 땅에 묻었다가 해방 후 다시 세웠다.

4) 도붓장수. 물건을 가지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파는 사람.

5) 3개의 작은 잎으로 된 겹잎.

6) 창해삼국(滄海三國) : 강릉 예국(濊國), 삼척 실직국(悉直國), 울진 파단국(波但國, 波朝國).

7) 청나라 선종 도광제의 연호, 1821~1850년까지 30년간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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