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락의 '녹파잡기'를 번역한 단행본. [사진=김영사]
한재락의 '녹파잡기'를 번역한 단행본. [사진=김영사]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19세기 초 평양 기생 66인의 사소한 일상사를 다룬 책인 한재락의 『녹파잡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섬양은 나섬의 아우이다. 나는 여러 손님과 경파루 밑으로 그녀를 방문했다....(중략)....그녀가 손님을 배웅하고 난간에 기대 소동파의 <전적벽부>와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죽지사> 몇 수를 읊은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녹파잡기』 p.67)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전전벽부>와 <죽지사>이다.

<전전벽부>는 지금도 서도소리 송서(誦書)로 부르고 있다. 송서란 말 그대로 서책을 읽는 듯이 소리하는 것을 말한다.

송서는 청자와 화자 모두 한학(漢學)에 조예가 있어야 하므로 주로 사대부를 중심으로 한 식자층과 이들을 고객으로 하는 기방에서 향유되었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 따르면 안동 기생은 <대학>을, 영흥 기생은 <용비어천가>를, 함흥 기생은 <출사표>를 잘 외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송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송서의 출발은 글을 소리 내어서 읽는 것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 한적(漢籍: 한문으로 된 책)을 외는 고전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이 소리의 장르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글을 읽다가 여기에 세련된 음률이 붙으면 소리 예술이 된다. 이것이 바로 ‘송서’다.

현재 서도 송서와 경기 송서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송서로는 서도의 <추풍감별곡>, <적벽부> 등이고, 경기의 <삼설기>, <전적벽부>, <후적벽부>, <등왕각서>, <짝타령> 등이다.

현재 부르지는 않지만 음원만 남아 있는 것이 박헌봉의 <시상부>, 유성옥의 <출사표>이다. 문헌상으로는 <어부사>, <춘야연도리원서> 등이 남아 있다. 책을 읽는 듯한 소리지만, 상당한 공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가창하기 힘든 소리이다.

그렇다면 섬양이란 평양기생이 불렀다는 <죽지사>는 어떤 소리일까?

원래 <죽지가(竹枝歌)> 혹은 <죽지사(竹枝詞)>는 피리 반주에 맞춰 부르는 중국 파촉(巴蜀) 지방의 민요였다.

이 노랫말이 음란하다 하여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세련되게 시로 만들었다. 근원적으로 보면 <죽지사>는 민요의 노랫말이었던 것이다.

이후 여러 시인들이 여러 죽지사를 지었고, 점점 지역적 특색을 가미한 지방 풍속적인 시 형태가 되었다. 즉 <죽지사>안 지역성이 가미된 민요풍의 시 혹은 노래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재락은 기생 섬양이 부른 <죽지사>가 분명히 ‘우리나라 사람이 지’었다고 했다. 한재락의 또 다른 기록에서도 <죽지사>가 등장한다.

그렇다면 19세기 초반 평양기생이 불렀던 <죽지사>는 현행 12가사 중의 하나인 <죽지사>로 볼 수 있다.

민요가 아닌 가사를 평양 기생이 불렀다는 부분에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리 기생의 경우 가곡 가사와 시조를 먼저 배워야 했다.

서도소리 문화재였던 김정연 명창(중요무형문화재 제 29호, 1913-1987)도 어릴 때 이승창에게 가곡 가사를 먼저 사사했다고 증언했던 것을 보면 이 같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진주목사를 지낸 정진석이 지은 진주 교방의 여러 가무악곡을 수록한 『교방가요』에도 가곡, 가사, 시조, 잡가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전국 각 교방에서는 시조, 가곡가사, 잡가의 순으로 교육을 했던 것이다.

지금처럼 가곡과 가사, 경기소리, 서도소리를 구분하여 각각 전승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며 특히 문화재 제도가 정착된 뒤 각 장르별 고착 상태는 더 심해졌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현행 <죽지사>의 노랫말이다.

1절:건곤(乾坤)에 불로월장재(不老月長在)하니 적막강산(寂寞江山)이 금백년(今百年)이로구나

2절:책 보다가 창(窓) 퉁탕 열치니 강호(江湖) 둥덩실 백구(白鷗) 둥 떴다

3절:하날이 높아 궂은 비 오니 산(山)과 물과는 만계(萬溪)로 돈다

4절:낙동강상(洛東江上) 선주범(仙舟泛)하니 취적가성(吹笛歌聲)이 낙원풍(落遠風)이로구나

(후렴 제외)

이 노랫말의 <죽지사>는 조선 숙종, 영조 때의 문신인 도암(陶菴) 이재(李縡:1680-1746)의 「대이태백송죽지사(代李太白魂誦竹枝詞)」에서 일부분을 따 가사 형태로 만든 노래이다.

현재 4절로 불리고 있는데, 노랫말 중에서 3절 “하날이 높아 궂은 비 오니 산과 물과는 만계로 돈다”는 구절은 1910-1920년대 출판된 『정선조선가곡』 등 여러 잡가집에는 보이지 않는다. <죽지사> 전체 내용과도 상관이 없다.

다만 이용기((李用基:1870-1933)가 1930년대 초반 편찬한 『악부』에만 이 구절이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추론하면 1920년대 이후 1930년 초반 사이에 누군가가 이 구절을 집어넣어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 왜 그랬을까?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착각에 의해 그랬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이 착각이 관습으로 굳어져 현재까지 전해졌을 가능성이 많다. 하늘이 높아 궂은 비가 온다는 것도 사실은 논리적으로 어긋난 표현이다.

때문에 현행 <죽지사> 가사 중 이 부분은 삭제함이 바람직하다. 차리리 『정선조선가곡』에 나오는 대로 “기경선자낭음과(騎鯨仙子朗吟過)하니 망양추색(茫洋秋色)이 미장천(迷長天)이라”는 구절로 대체하는 것이 전체 노랫말의 의미적 연결로 보아 훨씬 타당하다.

하기야 <죽지사>의 마지막 구절 “낙동강상 선주범하니 취적가성이 낙원풍이로구나”도 도암의 <죽지사>와는 관계없다.

낙동강에 놀이배가 떠서 피리와 노래 소리가 바람에 실려 멀리까지 퍼져간다는 뜻의 이 구절은 선조 때의 선비 노인(魯認:1566-1622)의 『금계일기』에 있는 구절이다. 하지만 이 구절도 노인이 지은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과거 선비들이 시로 화답할 때 과거의 다양한 시에서 차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아마도 이 구절은 더 오래된 누군가의 시에서 차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간에 현행 12가사의 하나인 <죽지사>의 노랫말은 누더기 같다. 과감하게 엣 노랫말을 복원하고 정리해 불렀으면 한다. 그것이 오히려 전통의 올바른 계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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