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남자현은 무장투쟁을 했지만 비밀공작원으로도 활동했기에 그 신분이 비밀에 부쳐졌고, 때문에 독립단체의 공식직함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비슷한 비밀임무를 수행한 공작원으로는 남자현 이 후에 활동한 경북 영양 옥산리 출신의 엄순봉과 울진 출신 주병웅, 의성과 상주 출신 김근수·전월순(전월선) 부부, 경주 출신의 김봉식 등이 있다.

일제의 독립군 토벌과 독립운동단체에 대한 내부분열공작이 극심하자 남자현은 비밀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한다.

1925년(1927년이라는 설도 있다) 그녀는 쉰을 넘긴 나이에도 채찬, 박청산, 이청수 등과 함께 조선 총독 사 이토 마코토 암살계획을 세우고 암살단장을 맡았다.

채찬은 남편 김영주의 동문이었다.

김동삼과 안창호를 구출하다

사이토는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1919년 8월 13일 조선 총독에 취임했다.

3·1운동과 독립운동으로 한반도 상황이 심각해지자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전환했고, 헌병을 경찰로 전환한 후 군 병력을 증강하여 한반도 통치권을 강화한 인물이었다.

총독에 취임한 직후인 1919년 9월 2일 남대 문역(지금의 서울역)에서 강우규(姜宇奎)의 폭탄공격을 받았지만 죽지 않았다.

강우규는 조선인 순사 김태석에게 체포돼 1920년 4월 25일 사형이 언도됐다. 11월 29일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도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기고 떠났다.

죽음을 각오한 남자현은 아들 김성삼을 불러 뒷일을 부탁한 후 4월 중 순 김문거에게서 권총과 포탄 등을 건네받았고, 동지들과 함께 서울로 잠입했다.

김문거는 후일(1930년) 조선혁명당 당군(黨軍)인 조선혁명군 제4중대장에 임명되는 인물이다.

남자현 단장이 이끄는 4인조 암살단은 혜화동 28번지 고씨(高氏) 집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았다. 이즈음 국내외의 여러 단체들이 각각으로 사이토 총독 암살을 기도하고 있었으므로 일제의 경비가 삼엄했다.

1923년 일왕폭살미수사건 관련자인 홍진유와 서상경 등이 귀국해 결성한 흑기연 맹(黑旗聯盟)이 검거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일제는 5월 12일 치안유지법을 시행하고 언론탄압을 시작으로 일본의 통치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무조 건 잡아들여 고문했고, 주변의 독립운동가를 밀고하면 풀어주었다.

암살단은 일제군경의 살벌한 경계에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 없어서 체 류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요원 중의 박청산이 정탐을 나갔다가 경찰에 미행을 당해서 가까스로 따돌리고 인근 교회로 피신하는 일까지 있었다.

남자현은 정보가 새나갔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결정했고, 만주에서 만 나기로 하고 각자 흩어져 서울을 빠져나갔다.

남자현이 만주로 돌아갔을 때, 정의부 참모장 겸 행정위원 김동삼은 미국에서 건너온 안창호와 함께 이념을 뛰어넘는 좌우익 연합 유일당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또 안창호가 준비하는 길림성 일대의 이상촌사업도 음 양으로 돕고 있었다.

남자현도 김동삼을 도와 유일당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각 단체 지도자들을 만나 김동삼의 뜻을 전하고 설유하는 일을 맡았다. 조선인 출신 홍 순사를 만난 것은 이 즈음이었다.

안창호는 1926년 북경에서 ‘대한독립당’을 위한 촉성회를 열고 독립지도자들의 결단을 촉구했다.

안창호와 뜻을 같이하는 국내의 민족지도자 들은 1927년 2월 좌우익 합작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 표어를 내걸고 민족주의를 표방한 신간회를 출범시켰다.

신채호, 안재홍, 이상재 권동진 등 좌우 민족지도자 34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안창호는 국내의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을 만주지역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길림성을 방문했다.

독립지도자 김동삼과 오동진, 이철, 김이대, 고할신 등도 안창호와 뜻을 같이하고 유일당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정의부 소속이었던 남자현도 중앙대표 자격으로 그 자리에 참석했다. 그런데 첩보를 접한 일본경찰은 길림성 당국에 그 모임이 공산주의자들의 집회라고 속이고 모두 구속하라고 요구했다.

길림성 당국은 일본경찰의 압박에 모 임에 참가한 독립지도자 47명을 연행해서 구속시켰다. 남자현은 여성이 라는 이유로 구속을 면했다.

일본은 길림성 당국에 검거한 독립지도자들을 모두 일본경찰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거물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한꺼번에 일본경찰에 넘어갈 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은 즉각 구명운동에 나섰다.

남자현 또한 ‘길림사건비상대책반’을 구성했고, 김동삼과 안창호를 면회하고 옥바라지하며 그들의 지령을 받아 독립운동 지 도자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각 독립단체와 함께 그 사건을 중국 언론에 제보하여 기사화시키며 석방운동을 펼쳤다.

중국신문들이 길림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 했고, 중국 학생과 사회지도 자들 및 단체들은 대한독립지도자들을 일본경찰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중국 당국을 압박했다.

그러자 당시 북경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대원수 장작림은 대한독립지도자들을 전원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래서 안창호와 김동삼 등 검거됐던 독립지도자들은 모두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여자 안중근

1931년 일본 관동군은 만주를 침공하고 점령했다. 이른바 만주사변이었다.

일본은 만주국 설립을 추진하고 병참기지화 하는 한편, 대대적 대한독립군 토벌작전을 개시했다.

한국독립당 고문으로 있던 독립지도자 김동삼은 남자현, 이원일과 함께 항일공작을 추진하기로 하고 하얼빈으로 잠입했다.

공작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동삼이 직접 움직인 것으로 볼 때 만주를 불법점령한 일본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에서 만주에 파견한 특별조사단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동삼은 하얼빈으로 잠입한 후 정인호의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파악한 일본경찰이 그 일대를 수색했고, 김동삼은 이원일과 함께 피체되고 말았다.

남자현은 아슬아슬하게 일경의 검거를 피했고, 자신도 수배를 받고 있는 몸임에도 경찰서로 가서 김동삼의 친척이라 하고 면회했다.

그리고는 김동삼의 지령을 임시정부에 전달했고, 동지들과 함께 함께 김동삼 구출 작전을 준비했다.

일제는 김동삼의 본국 이송을 서둘렀다. 남자현도 서둘렀다. 김동삼이 신의주로 이송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송열차를 공격해서 구출하기로 했고, 무장을 갖추고 열차에 올랐다.

그러나 독립군의 구출작전을 눈치 챈 일제가 일정을 바꾸고 이동경로를 바꾸는 바람에 허탕을 치고 말았다.

김동삼은 1878년 6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에서 김계락 (金繼洛)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긍식(金肯植)이며, 김종식(金宗植) 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자는 한경(漢卿)이고, 호는 일송(一松)이다. 본관은 의성으로, 퇴계학의 정통을 계승한 김성일의 후손이다.

1907년 안동의 근대식 협동학교 교감에 취임했고, 비밀결사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하고 집과 논과 밭 등 전 재산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

동작동 국립묘지의 남자현 추모비와 허묘. [사진=영양군청]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의 남자현 추모비와 허묘. [사진=영양군청]

김동삼과 뜻을 같이하는 많은 사람들이 망명에 동 참하겠다고 해서 대규모 망명단이 꾸려졌다.

안동 천전마을 의성김씨 문중과 이상룡의 고성 이씨 문중에서 각각 150명 정도가 참여했다.

영덕의 무안 박씨, 울진의 평해 황씨, 영양의 한양 조씨 문중도 동참했다. 개별적으로 동참한 사람도 상당했다.

김동삼이 이끄는 망명단은 1911년 1월 안동을 출발하여 추풍령까지 걸어간 다음 기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신의주까지 갔다.

신의주에서부터 걸 어서 압록강을 건넜고,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여 봉천성에 도착했다. 통화현 삼원보에서 이상룡, 이시영, 이동녕 등과 함께 경학사를 조직하여 농지를 개척하고 독립군기지로 삼을 농장을 만들었다.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의 남자현 추모비와 허묘. [사진=영양군청]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묘지의 남자현 추모비와 허묘. [사진=영양군청]

그리고는 신흥강 습소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했다.

여준, 이탁, 이상룡 등과 함께 남만주 동포 자치기관인 부민단을 조직했고, 서일, 여준, 김좌진 등과 함께 민족 대표 39인으로서「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으며, 한족회 서무부장, 서로 군정서 참모장, 통군부 교육부장, 통의부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23년 1 월 3일 북경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참석해 의장에 선출됐고, 1926년에는 두 차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원에 임명되었으나 유일당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사양했다.

혁신의회 의장, 민족유일당재 만책진회 중앙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일본경찰에 피체된 김동삼은 국내로 압송된 후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경성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됐고, 1937년 4월 13일, 예순 살을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했다.

국내에는 유해를 인수해갈 사람이 없어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인수해갔고, 성북동 자택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렀다.

‘나라 없는 몸이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 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는 옥중 유언에 따라 유골은 한강에 뿌려졌다.

남자현은 망명 후 줄곧 함께 활동해온 동지 김동삼을 잃었다. 이제부 터는 스스로 공작단을 이끌어가야 했다.

그녀는 김동삼의 마지막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국제연맹 특별조사단과의 접촉을 시도 했다.

조사단은 영 국 리튼(V.A.G.R. Lytton)경을 단장으로 하여, 이탈리아 알드로반디 백작과 프랑스 H. 클로텔 중장, 미국의 F.R. 맥코이 소장, 독일의 H. 슈네 박사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남자현은 조사단장을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 만 일본경찰의 경계가 삼엄해서 접근 기회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일제는 조사단 신변보호를 명분으로 그들이 묵고 있는 마디얼호텔 주변을 철저히 차단하며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은 무조건 체포했고, 송화강 건너편에 감금했다. 때문에 조사단에 진상을 알리려던 조선인 김 곡을 비롯하여 중국인 5명, 러시아인 2명 등이 체포돼 총살당했다.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 2절을 절단하여 그 피로 흰 천에 ‘朝鮮獨立願(조 선의 독립을 원함)’이라는 혈서를 썼고, 절단한 무명지와 함께 옥양목에 쌌다.

그것을 조사단장 리튼경에게 전달하기 위해 호텔에 접근할 수 있는 인력거꾼을 매수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인력거 검색으로 발각되는 바람에 혈서와 무명지 싼 옥양목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본은 결국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웠다.

주만주국 전권대사를 암살하라

남자현은 1933년 1월 20일 문익빈, 이규동, 이춘기, 손보현 등과 함께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일인 3월 1일에 기념행사장에서 주 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를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남자현은 무기운반 책임을 맡았다. 2월 27일 오후 4시에 길림의 붉은 천을 걸어놓은 집에 무기가 든 상자를 전달하는 임무였다.

2월 22일 남자현은 권수승 동지에게 대양3원을 빌렸고, 암살단 동지들과 함께 무송사진관에 가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23일에는 거사장소를 최종 확인했다.

2월 27일 남자현은 남편이 전사할 당시 입고 있었던 피적삼을 속에 입었다.

그 위에 거지복장을 걸치고 몸속에 권총 한 자루와 탄환, 폭탄 두 개를 숨겨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들의 계획은 조선인 첩 자 이종현의 밀고로 일본경찰에게 알려졌고, 남자현은 하얼빈을 지나던 중 일본경찰에 피체됐다.

그녀의 나이 예순한 살이었다. 그보다 앞서 동 지 손보현이 먼저 피체됐지만 남자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

일제는 6개월 동안 날마다 모진 고문을 하며 고급정보를 캐려 했다. 남자현은, ‘독립은 정신에 있다’며 일체의 진술을 거부했고, 8월 6일부터 14일 동안 음식을 거부하며 단식투쟁을 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혹독한 고문으로 몸이 크게 상한 상태에서 보름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 생명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일제는 황급히 보석을 허가하고 적십자병원에 입원시켰다.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남자현은 아들과 손자를 보자 눈물을 흘렸고,

“이미 죽기를 각오한 바이니…, 이제 됐다.”

한마디를 하고서 일경에 조선인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했다.

남자현은 조선인 여관으로 옮겨진 날 저녁 손자 김시련을 불렀고,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잘 테니 깨우지 말라 하고 눈을 감고 잠들었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1933년 8월 22일이었다.

하얼빈지역 동포들과 중국인 지인들이 남강외인(南崗外人) 묘지에 안장 하고 입비식을 가졌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에 생가가 있으며, 영양읍에 남자현지사기적비(南慈賢志士紀績碑)가 있고, 독립기념관에 시어록비가 있다.

남자현의 아들 김성삼은 광복 후 만주에서 태어난 아들 셋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독립군 장교로 활동했으므로 6·25 전쟁에 지휘관으로 참전했고, 3년간 북한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53년 포 로교환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도 군에 몸담고 있다가 대령으로 예편했고, 여든두 살에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47살에 만주 항일무장투쟁 뛰어든 여걸」(한겨레신문, 1991. 2. 1.),『나는 조선의 총구다』(이상국 저, 세창미디어. 2012.5.20.),『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 제공_ 영양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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