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7월 18일 토요일 새벽에 비가 내렸다.

정부청사 숲에는 안개가 흐려 외계(外界)를 연상케 한다.

대전에서 7시 50분 출발, 대전·당진 고속도로를 달린다. 햇빛이 없으니 에어컨을 끌 수 있어 좋다.

예산 휴게소에 잠깐 들렀다가 아침 9시 덕산 시장에서 물과 먹거리를 샀다. 9시 40분 덕산도립공원 주차장엔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후끈 달은 포장길을 10여 분 지나자 길가에 호두·말채·살구나무, 일본목련이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다. 껍데기를 벗겨 한약재로 썼다는 데서 일본목련을 후박(厚朴)이라 부르기도 한다.

남연군묘 앞에 세운 석양(石羊)

남연군묘(南延君墓) 팻말을 따라 간다. 고개 들어 주변을 훑어보니 산세가 예사롭지 않은데 오른쪽이 옥양봉, 가운데 석문봉, 왼쪽으로 가야봉이다.

남연군묘까지 되돌아오는 데 10킬로미터 정도 5~6시간 예상하고 있다. 10시쯤 제각비, 가야사지, 남연군묘가 한 곳에서 자리다툼 하는 듯 안내판이 제각각이다.

망주석, 장명등, 비석……. 보기에도 엄정하게 자릴 지키고 섰다.

옆에서 걸음을 재촉한다. 묘를 살피느라 20분 정도 머물렀다.

“무덤 앞에 양을 만들었어?”

“석양(石羊)인데 사악함을 물리치고 명복을 빈다고 그래.”

“…….”

내려오면서 패철을 놓으니 건좌손향(乾坐巽向)이라. 물(得水)은 신(申)방에서 을진(乙辰)으로 흘러(破口)간다.

쟁탈전을 벌인 주변에 개망초 꽃이 하얗게 폈다. 아귀다툼 하다가도 인연이 다하면 속물로 돌아가는 하찮은 신세, 그냥 꽃이 아닌 “개” 자(字) 붙은 개망초다.

남연군 묘와 석양.
남연군 묘와 석양.
남연군 묘와 석양.
남연군 묘와 석양.

사방으로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고 쫓기듯 오른쪽 옥양봉으로 걸음을 옮긴다. 농로 따라 모감주·감·느릅·쪽동백·호도나무들이 칠월의 빛깔을 내며 열매를 익히고 섰다.

산 위에서 보는 형국이 자못 궁금해 다리에 힘을 주어 본다. 10분 더 올라 갈림길(옥양봉2·석문봉2킬로미터), 사람들은 왼쪽으로 가는데 관음전 방향으로 올라간다.

본격적인 숲길이다.

차 한 대 지날 정도로 여유 있는 길. 여느 산처럼 소나무를 비롯해서 쪽동백·작살·때죽·개암·국수·물푸레·병꽃·사람주·비목·당단풍·생강나무가 주종인데 밤나무는 잎이 좀 넓다. 내륙지역의 잎 가장자리에 가시처럼 거치가 심한 것과 비교된다.

팥배·누리장·굴참·굴피나무 아래로 까치수염 흰 꽃을 보며 10시 50분 관음전이다. 인적은 없고 아래로 내려다보니 남연군묘를 중심으로 외청룡·백호가 겹겹이 달려간다.

가야산 관음전.
가야산 관음전.

가야산은 예산 덕산면과 서산 운산면, 해미면에 북·남 방향으로 뻗은 명산이다. 가야봉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 석문봉(石門峰), 옥양봉(玉洋峰)이 있다.

신라 때부터 춘추제향을, 조선시대까지도 제사를 올렸던 곳으로 알려졌다.

능선을 따라 진달래, 억새풀 경치도 빼어난데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과 함께 1973년 덕산도립공원이 됐다.

백제 때 상왕산(象王山), 신라통일 후 가야사를 세운 뒤 가야산이라 하였다. 충남 서북부를 남북으로 내포와 태안반도의 경계를 이룬다. 이곳에서 동으로 흐르는 물길은 삽교천(揷橋川)을 통해 아산호로, 서쪽은 천수만(淺水灣)으로 흘러든다.

등산로 표시가 친절할 정도로 잘 돼 있다. 관음전 옆으로 길이 나 있어 다시 내려가야 하는 수고는 덜었다.

여기서 0.4킬로미터 올라가면 옥양봉(玉洋峰). 군락을 이룬 사람주나무들은 확실히 잎자루가 길어서 붉은 색을 띈다.

11시에 돌계단 오르며 땀을 흘려 옷뿐만 아니라 배낭까지 다 젖었다. 바위꼭대기에서 잠시 숨을 고르는데 왼쪽 산봉우리로 안개가 몰려다닌다.

서해를 스쳐온 공기가 상승기류를 타고 안개구름을 만드는데, 운해 속에 뒤덮인 해질녘 경치가 최고로 꼽힌다.

서산, 태안, 천수만, 서해가 보이고, 내륙으로 예당평야가 시원하지만 아쉽게 다 볼 수 없다. 가야산에는 “백제의 미소” 서산마애삼존불을 비롯한 개심사, 일락사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감탄한 산세

20분 더 올라 옥양봉 621미터 지점(석문봉1.5·가야봉2.8·헬기장3.8킬로미터). 내려다보는 산 아래 터는 오묘한 그것을 닮았다.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위태로웠던 흥선군 이하응은 복수의 일념으로 주정뱅이 행세를 한다.

발복(發福)을 위해 명당에 이장하려 풍수를 배우며 방방곡곡 돌아다녔다. 유명한 지관을 만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알게 된다.

바로 이곳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사(伽倻寺), 산세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나 5층탑이 있었다.

당시 이 절은 수덕사보다 컸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절은 불태워지고 아들을 더 낳았는데 훗날 고종이다.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은덕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1871년 인근에 보덕사(報德寺)를 짓게 했다.

구름 위로 솟은 석문봉.
구름 위로 솟은 석문봉.

1868년 이른 봄 독일인 오페르트가 미국, 프랑스인 등 백여 명을 동원, 행담도(현 서해안고속도 휴게소)에 모선을 정박시키고 밤을 틈타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한다.

이른바 천하명당을 파헤쳐 기세등등한 대원군을 꺾고, 유골을 조선 개방과 맞바꾸고자 기습하지만 무덤은 석회석으로 다져 놓아 실패한다.

몹시 화난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산 아래 해미읍성 등지에서 도굴에 간여했다는 이유로 천주교도를 학살하는 무진박해(戊辰迫害)를 자행한다.

결과적이지만 강호에서는 현무(玄武)에 해당하는 석문봉은 남연군의 무덤인 혈장(穴場)을 피해 고개를 쳐들었고, 주위로 놓인 외청룡·백호는 날아가듯 안쪽(내청룡·백호)을 누르고 있다는 것.

이런 곳은 사찰이 들어와 압승(壓勝)을 하는데, 가야사의 결계(結界)가 풀리면서 기운이 떠난 것으로 보고 있다.

아무리 군왕의 터라 할지라도 청룡이 백호에 눌려 둘째가 왕이 되었고 민비의 등장이 예견됐다는 것이다.

웅장한 산세가 시립(侍立)하듯 첩첩이 늘어서 있다. 꼭대기로 바라보면 석문봉을 주산으로 왼쪽으로 가야봉, 오른쪽 옥양봉이 각각 귀인봉을 이뤘다.

석문봉에서 내린 줄기가 일어섰다 엎드리길 반복하는 산세는 드물다. 주룡인 산맥을 따라 오르면 힘이 느껴지니 명당이 꾸며진 이야기일까? 옥양봉에서 뻗은 청룡과 가야봉의 백호는 연이어 무덤을 감싸며 수구(水口)를 만들었다.

멀리 바람이 안개를 몰고 다니다 가끔 민낯을 보여준다. 구간마다 안내표시를 잘 해 놓았다. 11시 30분경 능선길(주차장2.7·석문봉0.9·옥양봉0.5킬로미터)에서 때죽·비목·신갈·굴참·소나무들을 만난다.

정오 무렵에 갈림길(주차장3.2·석문봉0.1·옥양봉1.4킬로미터) 지나고 10여 분 더 가서 석문봉(653미터), 안개가 서해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석문봉에는 태극기 날리고 돌탑이 운치를 더해준다. 건너편 바위에 앉아 빵, 복숭아, 막걸리 한 잔 점심.

누룩냄새가 좋다. 유효기간 딱 1주일 당진 면천 막걸리다. 면천(沔川), 물 맑을 면(沔)으로 물이 가득 흘러간다는 뜻이니 그 맛이야 오죽하려고…….

우리가 앉은 바위는 서쪽으로 바람이 가려져 쉴 만하다. 안개도 잠시 바위와 옥양봉을 활짝 보여준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시 능선을 걸으면서 육관도사 묘에 들르리라 생각하며 내려간다.

손석우 선생은 1928년 울진 태생으로 오대산 기도 중 혜안을 얻어 산천지리에 밝았다.

김일성 사망을 예언했고 정치인과 정부기관 터를 잡아주며 풍수지리서 “터”를 출간하여 유명했으나 법적공방에 휘말리기도 했다.

12시 30분 바위 능선 길 걷는데 생육환경이 열악하면 생식에 몰입한다더니, 팥배나무는 푸른색 열매를 많이도 달았다.

찰피나무, 쪽동백 나무도 억세게 잎이 두껍다. 안개만 없어도 내포사방을 훤히 볼 수 있으련만…….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육지 깊숙이 포구가 만들어져 고려시대부터 내포라 불렸다.

차령산맥 서북부의 지리적 개념인 내포(內浦)지역은 “충청도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예산, 당진, 서산, 홍성 등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고을이다.”

난리 때도 적군이 들어오지 않았고 넓고 기름진 예당평야가 펼쳐져 있다.

동북쪽은 아산, 서북으로 예산과 당진, 남으로 산맥이 연결된 오서산의 보령, 청양이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아산 삽교호 방조제가 1979년 완공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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