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계룡산(鷄龍山)은 닭의 벼슬을 한 형상이다.

이성계가 도읍지를 정하려 이곳에 왔는데 무학대사가 산세를 보고 금계포란(金鷄抱卵)(주1),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고 하자, 두 글자를 따서 계룡산이라 하였다.

음기가 강해서 도사, 무당이 많은 곳이다. 금남정맥(주3)의 끝, 845미터 천황봉을 주봉으로 관음봉(觀音峰), 연천봉(連天峰), 삼불봉(三佛峰) 등의 봉우리와 동학사·갑사계곡 일대 경관이 빼어나 중국에도 알려졌으며, 신라 때에는 오악(五岳) 가운데 서악으로 불렸다.

대전·계룡·공주·논산 등을 포함하여 196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계룡산을 중심으로 산과 물이 태극형세(山太極 水太極)라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왔다.

남매탑 전설 뒤로 하고 갑사로

아침 9시, 유성 나들목을 빠져나와 공주 방향으로 20분쯤 달리면 동학사 주차장인데 사람들은 모두 오른쪽의 천정골로 간다.

8월이라 말채·굴참·쪽동백·당단풍·때죽·소나무들이 가지마다 무거운 잎들을 매달고 있다. 큰 배재는 2.6킬로미터 거리다.

9시 45분 큰바위를 지나며 물통에 계곡물을 채운다.

개서어나무, 사초, 물봉선이 길섶에서 옷깃을 스치고 상류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많이 앉아 있다. 좀 더 올라가 채울걸, 물이 덜 깨끗하다는 생각이 걸음을 더디게 한다.

당나라 유학길 잠결에 물을 마셨는데, 깨어 보니 해골에 괸 것임을 알고 깨달아 되돌아왔다는 원효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생각한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뿐…….

10시 15분, 큰배재 갈림길 쉼터에서 일흔다섯 살 어떤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 여기까지 올라오시고 대단하십니다.”

“어디 아픈 데 없어요?”

“당뇨가 좀 있어.”

“사탕 같은 거 갖고 다녀야 해요.”

“그래서 이렇게 먹고 있잖아.”

“…….”

큰 배재에서 만난 할머니.
큰 배재에서 만난 할머니.

여기서 우리들의 경유지 남매탑까지 0.6킬로미터다(장군봉3.6·동학사 주차장3.4). 산동백, 물푸레나무를 옆에 끼고 15분 더 걸어 오뉘탑인 남매탑(동학사1.7, 천정골 3.5킬로미터)에 닿았다.

금방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에도 사람들이 많이 올라왔다.

여기까지는 관광코스로 잠시 머물다 가는 구간이다. 상원암(上元庵)에서 멀리 보이는 산자락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원추리 꽃은 연자색으로 잘 피었다.

마당 한편 천막 둘러친 곳에서 벌컥 물 한 잔 마시고, 결국 물통을 새로 채웠으니 나의 일체는 유심에 머물고 만 것일까? 형편이 못한 절이라 그런지 대웅전 불상이 여의찮다.

신라 때 한 스님이 이곳에서 움막을 치고 수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호랑이가 나타나 입을 벌리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인골(人骨)을 뽑아 주었다. 여러 날 지나 호랑이는 처녀를 물어다 놓았는데, 스님은 경상도 상주 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처녀는 감화되어 부부가 되길 바라지만, 남매의 인연을 맺어 서로 불도에 힘썼다는 것이 남매 탑에 얽힌 전설이다.

5·7층 석탑으로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여긴다. 신라인들이 5층 백제탑 옆에 7층탑을 세워 기세를 누르자 경상도 처녀를 전설에 등장시켜 분풀이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계룡산 상원암(上元庵).
계룡산 상원암(上元庵).

10시 40분 갑사로 출발(삼불봉0.5·금잔디고개0.7·천정 탐방지원센터3.5·상신3.3·동학사1.7킬로미터), 10분 남짓 돌계단 따라 가파르게 올라가니 삼불봉 고개다(삼불봉0.2·관음봉1.8·금잔디고개0.4·갑사2.7·남매탑0.3킬로미터).

11시 금잔디 고개, 헬기장에는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다.

갑사로 가는 길은 여기서부터 내리막이다. 돌을 정갈스럽게 쌓은 길인데 산뽕나무 군락, 좀깨잎나무, 병꽃나무들 옆에 노린재나무는 벌써 열매를 다닥다닥 달았고 무자식이 상팔자인 팽나무 고목이 길옆에 서서 산길의 역사를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만 되돌아가자.”

나의 속마음도 모르고 자꾸 돌아서 가자고 한다.

“2.3킬로를 어떻게 다시 갔다 오냐…….”

“이곳 나무는 특이하네.”

대답 대신 나무들 핑계만 댔다.

돌무더기 쌓아놓은 곳을 지나면서 사람주·비목·굴참·피·난티나무, 조릿대, 광대싸리가 계곡 따라 흐르는 물가에 줄을 섰다.

확실히 이곳의 사람주나무는 남쪽보다 나무껍질은 흑갈색에 잎도 넓고 길다. 11시 30분쯤 신흥사를 지나는데 목탁소리 계곡물과 어울러 용문폭포를 만든다.

층층나무, 물푸레, 조릿대를 흔들면서 소나기 몇 차례 쏴아 내리더니 이내 멎었다. 20분 더 내려가면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의 갑사다.

갑사(岬寺)는 계룡갑사(鷄龍甲寺), 계룡사라 하고 마곡사의 말사다.

백제 때(420년),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 하나 여러 설이 많다. 계룡산 일대는 전란(戰亂)에도 안심할 수 있는 열 곳 가운데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다.

신라 말 도선, 고려 말 무학, 조선중기 남사고·이지함……. 이밖에 수많은 비기(秘記)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영월 상동, 봉화 춘양(태백산), 보은 내속리·상주 화북(속리산), 공주 유구·마곡(계룡산), 영주 풍기(소백산), 예천 금당, 합천 가야(가야산), 무주 무풍(덕유산), 부안 변산(변산), 남원 운봉(지리산)이다.

매번 올 때마다 젖는 감회지만, 대략 18여 년 전 처음 왔을 땐 풍찬노숙(風餐露宿)같던 절집이었는데, 지금은 치장해 놓아선지 그때의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맛은 사라지고 없다.

저고리 대신 양장(洋裝)에 인공 조미료 맛이랄까?

교과서에 실린 “갑사로 가는 길(이상보)”이 추억처럼 아련해서 여러 번 갑사를 찾았다. 내가 문인(文人)을 결심한 동기부여를 해 주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한때 갑사의 고즈넉한 절집에 앉아 글을 읽으며 노란 은행잎에 묻힌 지난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경내에 소나기 한 줄기 지나간 듯 맑고 절집 지붕너머 계룡산이 더욱 깨끗하다. 한편엔 연꽃을 심어놓았는데 물 묻은 분홍빛이다.

“누가 보면 흉본다.”

“…….”

“힘들어 두 번 다시 못 따라 오겠다.”

나무 쉼터에 벌러덩 누웠다.

갑사와 구름 덮인 계룡산.
갑사와 구름 덮인 계룡산.
갑사와 구름 덮인 계룡산.
갑사와 구름 덮인 계룡산.

표충원에는 휴정(休靜)·유정(惟政)·기허(騎虛)의 영정이 있다.

기허는 영규대사(靈圭大師)의 호인데 사명대사 유정과 서산대산 휴정의 제자다. 공주출신 밀양 박씨로 갑사에서 출가해 무예를 즐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을 삭이지 못해 며칠 통곡하고 승병장이 되었다. 청주성에서 왜적을 무찔렀는데 관군은 달아나 승려 수백 명이 청주성을 다시 뺏었다.

1592년 조헌(趙憲)이 공격할 때, 관군 연합작전을 위해 늦추자 하였으나, 듣지 않자 함께 금산전투에서 싸우다 죽었다.

임진왜란 최초 의병으로 이후 승병의 도화선이 되었고 금산 칠백의총(義塚)에 묻혔다.

12시 조금 넘어 갑사를 두고 연천봉으로 간다(연천봉2.4·관음봉3.3·금잔디고개2.3·용문폭포0.6킬로미터).

계곡에서 점심 먹을 요량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여기서 왼쪽 길이 금잔디고개, 연천봉은 오른쪽 길이다.

조금 더 걸었더니 연천봉 가는 대성암 입구에 영규대사와 팔백의승 추모비 죽창(竹槍)을 조각해서 세워놓았다.

오죽했으면 무기를 든 관군은 모두 도망치고 괭이, 쇠스랑이나 대나무를 깎아 무기로 사용했을까?

나라꼴이 온전한 게 오히려 비정상적이라 할 수 밖에……. 넋을 놓고 있는데 순식간에 달려드는 개에 놀라 식겁해서 나왔다. 무식한 개 같으니, 명색이 절집에 있는 개 정도면 나그네 급수는 알아야지.

“야 이놈아 내가 누군 줄 아나? 이래 봬도 산신령이 우리 할아버지다.”

“…….”

옆에서 웃는다.

“컹 컹 컹”

짖는 개소리만 메아리 되어 산을 울리고 절집 개에게 자존심 구기고 또 걷는다. 나는 산신령님 만수무강을 위해 산에 올 때마다 축원을 한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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