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作, '주유청강',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2cm×35.6c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作, '주유청강',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2cm×35.6c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주유청강>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풍속화로, 강에 배를 띄우고 선유(船遊) 놀음을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풍속화첩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에 들어 있는 30점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강이나 바다에서 배를 타고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며 가무를 즐기던 선유(船遊)는 조선 시대에 많이 행해졌던 고급 놀이였다.

선유는 조선 전기까지는 사대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자본력이 커진 중인 계층이나 서민층에게도 확대되었다.

특히 평양은 선유 놀음이 많이 행해진 지역으로 《평안감사향연도(平安監司饗宴圖)》 중의 <대동강선유도(大同江船遊圖)>를 통해 당시 평양에서 행해진 선유놀음의 규모나 내용을 볼 수 있다.

평양 못지않게 서울에서도 선유놀음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봄과 가을에 특히 뱃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했던 무명자 윤기(尹愭, 1741~1826)는 ‘소년들의 뱃놀이’(서울의 소년들이 날마다 뱃놀이를 하는데, 술과 음식이 성대하고 기녀와 풍악이 사치스러워 번번이 만금을 소비한다)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뱃놀이의 폐해를 비판하였다.

서울에 화재가 잇달아 발생하고, 평안도 감영과 함경도 감영에도 큰 불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온 나라에 사치 풍조가 만연하였음을 한탄하였다.

봄과 가을에 행락하기 좋아 / 의기도 호탕하게 서로 초대하네.

강에는 배들이 다투어 오가고 / 풀밭에는 화려한 의관 어지럽네.

술은 밤의 연회라 더욱 거나하고 / 노래는 춤사위 따라 드높아라.

근래 듣건대 서영 북영에 불이나 / 성상께서 유독 염려하신다 하네.

-윤기, 『무명자집』시고 제4책,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맑은 강에 배를 띄우고’라는 의미의 <주유청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그림에는 기생으로 보이는 여자 세 명, 갓을 쓰고 포를 입고 있는 양반 세 명, 노를 젓고 있는 사공 한 명, 피리를 불고 있는 시종 한 명 등 모두 여덟 명의 사람이 등장한다.

사공과 악사를 빼면 양반들이 기생들과 짝을 맞추어 뱃놀이를 온 장면이다. 두 쌍은 남녀가 서로 가까이 있지만, 한 쌍만 남녀가 떨어져 있는데, 남자는 생황을 불고 있는 기생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다.

그의 옷차림을 살펴보면, 그가 왜 여자를 멀리 하고 있는지 추측이 가능하다.

그는 일상복에 두르는 자주색이나 청색, 혹은 검은 색의 띠가 아닌 상(喪)중에 착용하는 백색의 가느다란 띠(세조대)를 두르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뱃놀이에 참석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인물은 상중이란 것을 의식하여 일부러 여성과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하고 눈으로만 즐기고 있는 것이다.

상중이 아닌 나머지 두 양반은 기녀들을 향해 노골적인 구애를 하고 있다.

그들은 기생의 어깨에 손을 얹고서 다정하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거나, 강물에 손을 적시고 있는 기녀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뱃전에 기대어 기녀를 쳐다보고 있다.

<주유청강>에는 등장하는 기생들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상대 남성을 유혹하는 모습이 다르게 묘사되어 있어,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남녀의 심리도 유추해 볼 수 있어 흥미롭다.

기녀들은 모두 푸른색 계열의 치마를 입고 있다. 찰랑거리는 강물과 햇빛을 피하기 위해 배 위에 쳐 놓은 차일의 끝단도 모두 푸른색으로 채색하여, 화면을 보면 청량감이 느껴진다.

또한 기암괴벽이 병풍처럼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데, 마치 은밀한 공간에서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이들을 가려주는 차단벽처럼 보이기도 하며 더불어 화면에 안정감도 준다.

화면 오른 쪽 상단의 암벽에는 제시(題詩)가 적혀 있는데,

“대금 소리 늦바람에 들을 수는 없고, 흰 갈매기만 물결 좇아 꽃을 향해 날아든다.(一笛晩風聽不得 白鷗飛下浪花前)”라는 내용이다. 이 시에는 여성들을 향한 남자들의 노골적인 탐심을 늦바람과 흰 갈매기로 에둘러 표현하였다.

신윤복 作, '청금상련',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2cm×35.6c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 作, '청금상련', 19세기 초반, 종이에 채색, 28.2cm×35.6cm, 국보135호, '혜원전신첩', 간송미술관 소장.

이렇게 남녀가 짝을 이뤄 유희를 즐기는 장면은 <청금상련> 혹은 <연당야유>라고 알려진 신윤복의 다른 작품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청금상련>에서는 누군가의 집 후원으로 추정되는 공간에 남녀가 모여 ‘연꽃을 감상하며 음악을 듣는다(廳琴賞蓮)’는 그림의 제목과 무관하게 사랑 놀음에 빠져 있다.

이 그림에도 <주유청강>에서처럼 여성을 취하는 세 남자의 모습이 각각 다른 행동과 표정으로 묘사되었다.

맨 왼쪽의 남자는 사방관을 옆에 벗어놓은 채, 기녀를 앞에 앉히고 뒤에서 껴안고 있다.

가운데 서서 연꽃을 보고 있는 척하며, 다른 남녀의 노골적인 사랑 놀음을 바라보는 양반은 정 3품 이상이 착용하던 호박으로 만든 고급 갓끈을 착용하고, 도포 위로 당상관 이상이 두르던 자주색 띠를 매고 있는데, 복장만으로도 기녀를 불러 후원에서 사랑 놀음을 할 수 있는 그의 권력과 지위를 알 수 있다.

맨 앞 쪽의 남자는 둥근 등 받침에 기대앉아서 긴 담뱃대를 입에 문 채, 기녀가 가야금을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가야금을 연주하는 기녀 옆에 담뱃대를 들고 있는 기녀는 납작한 책갑 모양의 가리마를 머리에 쓰고 있어서 그녀의 신분이 의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의녀는 질병을 구호, 진료하기 위해 궁중과 관청에 소속된 여의원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가 되면 내의원과 혜민서에 소속된 의녀들이 가무를 익혀 연회에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을 따로 약방기생(藥房妓生)이라고도 지칭하였다.

신윤복은 고령 신씨로 호는 혜원이다.

아버지 신한평(申漢枰, 1726~?)은 도화서 화원으로, 특히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신윤복 또한 화원이 된 것으로 보이나, 그의 생애나 행적을 당시의 문헌 기록에서 찾기는 어렵다.

또한 제작 연대가 밝혀진 작품이 드물어, 정확한 활동 시기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주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무명자집(윤기,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강명관, 푸른역사, 2001)

조선의 뒷골목 풍경(강명관, 푸른역사, 2004)

조선의 미를 사랑한 신윤복(조정육, 아이세움, 2014)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 편(국립민속박물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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