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67년(세조 10년), 울진 바닷가 갯바위에 한 소년과 소년의 어머니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년은 처음 보는 바다가 마냥 신기해서 물비늘 반짝이는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어머니는 그런 소년을 또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제법 시간이 흘러 무료해질 무렵이었다.

소년 조위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가 소년의 무릎 위에 얹힌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바다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질 않습니까. 볼 수 있을 때 마음껏 봐두고 싶습니다.”

소년은 바다 핑계를 대고 있었지만 실은 어머니 아버지 곁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울진현령 조계문의 아들 조위(曺偉)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남달랐다. 대여섯 살 때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글을 배웠고, 글재주가 뛰어나 일곱 살에 이미 시를 지었다.

조계문은 그런 아들을 잘 키워보려고 사촌형 조석문에게 조위를 부탁했다.

세조 즉위에 공을 세운 좌익삼등공신 창녕군, 이시애의 난 때 병마부총사로 출정해 공을 세운 적개일등공신, 성종 임금 즉위에도 공을 세운 좌리일등공신,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한 훈신. 그것이 조석문의 이력이기 때문이었다.

조석문은 영특한 조위를 무척 아꼈기에 조계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래서 조위는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헤어져 한양으로 올라갔고, 조석문 집에서 글공부를 하게 됐다.

그러나 조위는 어려서 헤어진 부모를 늘 그리워했고, 마음에 병이 나서 날로 야위어갔다. 조석문은 그런 아이가 가여워서 잠시 부모님이 계시는 울진에 다녀오게 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네 아버지와 상의하였다. 이곳에도 훌륭한 학자는 많고 아버지도 계시니 얼마간 여기서 지내며 글공부를 하도록 해라.”

어머니가 말했다. 조위는 눈시울이 붉어지는가 싶더니 몸을 비틀어 어머니를 끌어안고 감사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4년 후인 1471년, 내려올 때 열네 살 소년이었던 조위는 열여덟 살 청년이 되어 경상도 함양으로 향했다.

대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매형 김종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는 길재의 학문을 계승한 성리학자였다.

이색에서 시작돼 정몽주, 길재로 이어진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 학문은 다시 김종직이 물려받았다.

김종직은 조위가 태어나기도 전인 1451년(문종 1년) 조위의 누나와 혼인했다.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들어가 수학한 후 1459년 식년문과 정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 교검, 박사, 예문관봉교, 감찰, 영남병마평사, 교리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늙은 어머니를 가까이에서 모시기 위해 외직을 자청하고 함양군수에 부임해 있었다.

함양군수 김종직은 낮엔 관아에서 직무를 보고 밤엔 문도들에게 성리학을 강해했는데, 유호인과 한백원 등이 그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조위도 대학자 김종직 문하에서 모자라는 학문을 보충했다. 김종직은 조위를 가르쳐보고, “나와 태허(태허는 조위의 자)가 강론할 때 강하가 터진 것 같았으니, 태허는 나의 스승이다”라고 칭찬했다.

조위는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했다.

이제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며 대과를 준비해야 했다. 떠나기 전에 지리산 유람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김종직에게 두류산(지리산) 유람을 제안했다. 『유두류록』 「유산기」에 ‘조태허가 관동에서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예기』를 읽고, 가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두류산을 함께 유람할 것을 청하였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내 함양에 부임하여 보니 고개만 들어도 푸르게 우뚝 솟은 두류산이 눈에 들어오는데, 내 여태 부서(簿書: 관아문서)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한 번도 유람하지 못했구나.”

김종직은 제자이자 처남인 조위의 사마시 합격을 축하할 겸 제자들과 함께 지리산 유람을 계획했다.

그래서 조위는 임정숙, 유호인, 한백원 등과 함께 스승 김종직을 모시고 지리산 유람을 떠났다. 길 안내는 덕봉사 해공(解空)스님이 맡았다. 천왕봉에서 보름달을 감상하고, 엄천과 화암을 지나 지장사에 들렀다.

환희대, 선열암, 향로봉, 미타봉, 영신사, 용유담, 등귀재 등 곳곳을 빠짐없이 둘러보고 왔다. 이때의 유람기는 김종직이 쓴 『유두류록』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성종임금의 총애를 받다

조위는 성종 대와 연산군 대에 활동한 문신이며 문장가였다.

성종은 조선 제8대 왕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죽자 세조비 정희대비 윤씨와 한명회, 신숙주 등의 훈구대신 지지로 형인 월산대군과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 등을 제치고 열세 살에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이후 7년 동안 할머니인 정희대비의 섭정을 받았다.

섭정기간 동안은 훈구세력이 집권했다. 그러나 성종이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원상제를 폐지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또 그 힘이 너무 세진 훈구척신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을 중용하고 신진사류를 대거 기용했다. 신진사류의 관계 진출이 현저해지면서 상대적으로 기득권층인 훈구세력은 위축됐다.

신진사류의 성장은 또 다른 측면에서 훈구세력을 약화시켰다. 학풍이 진작되면서 김종직 주도의 사학이 크게 일었다. 사학의 부흥은 관학의 위축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성종임금은 대대적 문화부흥정책을 펼쳤다. 각종 서적을 편찬하고 문물과 제도를 개혁했다.

문화운동을 사학파가 주도하면서 훈구세력 중심의 관학파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뿐만 아니라 신진사류는 과전과 공신전, 별사전 등의 세습을 없애서 백성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게 하는 등 제도개혁도 주도했다.

훈구세력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반발했고, 신진사류에 대한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정치상황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조위의 모친인 정부인 문화류씨의 묘지명 지석.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 [사진 제공=김천시청]
조위의 모친인 정부인 문화류씨의 묘지명 지석.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92호. [사진 제공=김천시청]

문화부흥은 문풍의 진작으로 이어져 문사들도 많이 배출됐다. 서거정과 김종직, 김시습, 정희량 등의 문사들이 문단을 빛낸 것도 이 시기였다.

조위 또한 이 시대를 빛낸 문장가 중 한 사람이었다. 조위는 시에도 뛰어나 ‘시로(詩老)’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 명성이 높았다.

『속국조보감』을 편찬한 홍귀달은 조위의 문장에 대해 “구름이 흐르며 무지개를 토하는 만장의 문장”이라고 평했다.

성종은 학문을 사랑하고 문장을 사랑한 임금이었다. 때문에 학자이자 문장가인 김종직을 총애했고, 그 제자로서 문장이 웅위하고 화려한 조위도 총애했다. 조위는 훈신 조석문의 당질이었고, 대유 김종직의 문도였다.

거기에다 임금의 총애까지 더해져 그 배경은 화려했다. 그러나 관직생활의 시작은 순탄하지 않았다. 화려한 배경이 오히려 동료 관원들의 시기를 사서 독이 됐기 때문이다.

조위는 1454년(단종 2년) 김산군 파미면(지금의 김천시 봉산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태허(太虛)이며, 호는 매계(梅溪)이다.

창녕 조씨는 신라 진평왕의 사위인 조계룡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중시조는 태조 왕건의 사위 조겸이다.

김천 입향조는 조심으로, 6세 좌찬성 조경수로부터 분파된 찬성공파의 후손이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조경수는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회군을 한 조민수의 동생이다.

조위는 1473년(성종 4년) 성균관에 들어갔고, 관시(성균관 유생들만 볼 수 있는 문과 초시)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리고 이듬해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5년 3월 기사에는 “내관을 보내 신숙주, 한명회, 조석문의 집에 선온(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는 술)을 내려주었다. 신숙주의 아들 신형, 한명회의 조카 한언, 조석문의 당질 조위가 급제했기 때문에 하사한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러 급제자 중에서도 훈신의 아들과 조카, 그리고 당질을 특별히 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정희대비의 섭정시기였기 때문에 훈신의 힘이 막강했다. 정희대비는 조석문의 당질 조위를 승문원정자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예문관검열에 제수했다. 특혜였다. 예문관의 선배인 봉교 안진생 등은 이를 시기했다.

그래서 곧 있게 될 신고식 때 임금이 하사한 선온을 구관들에게 맛보이라고 부추겼다. 그래야 사랑받는 후배관원이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조위가 그해 겨울 현감 신윤범의 딸과 혼인했을 때도 구관들을 집으로 초대해 연회를 베풀라고도 부추겼다. 그러나 이때는 가뭄으로 인한 흉년으로 금육령과 금주령이 내려져 있었다.

과거시험에 열중하느라 권력의 속성을 몰랐던 순진한 신속인(新屬人: 새로 관직에 나온 사람) 조위는 음모가 있는 줄도 모르고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안진생 등은 그 사실을 사헌부에 고했고, 조위에게는 집에서 근신하라는 벌이 내려졌다. 그러나 정희대비는 조위가 훈신 조석문의 당질임을 감안해 출사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안진생 등은 경연(經筵)에서 성종임금을 알현하고,

“유생들이 처음 과거에 급제하면 구관원들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예문관에 모여 「한림별곡」을 노래하는 신고식 풍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위는 육고기를 금하라는 어명이 있었음에도 고기를 준비해 구관들에게 대접했고, 집으로 기생과 악공을 불러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런 큰 죄를 범하고도 뻔뻔스럽게 입시(入侍)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한림별곡」은 고려 고종 때 한림의 유생들이 지은 경기체가로, 모두 8장으로 구성돼 있다.

작자는 불분명하며, 여러 선비가 지었다는 기록과 8장으로 구성된 점으로 미루어 한 사람이 한 장씩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진사대부들의 득의에 찬 노래로, ‘당당당 당추자’같은 음조로 흥을 돋워 신나고 흥겹게 부를 수 있다.

안진생 등의 말을 들은 임금은 그러나 대수로울 것 없다는 반응이었다.

군주의 과실을 기록하는 사관이 그런 짓을 한 것은 옳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집에 있을 필요까지는 없으니 나와서 근무하게 하라는 하교였다.

이렇게 무마되는 듯싶었던 금주령 위반 문제는 그러나 며칠 후 더 큰 사건으로 새롭게 불거졌다.

안진생 등의 밀고가 있었을 때 사헌부가 연회에 참석했던 기생과 악공들을 잡아들여 고신했는데, 고신 도중 그만 기생 앵아가 죽고 말았다.

사헌부는 그 사실을 숨겼지만 이 일은 끝내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임금은 사헌부 관원을 불러 자초지정을 캐물었다.

사헌부 관원은 단 한 번의 고신이 있었을 뿐인데 죽어버렸다고 고했다. 그러나 임금은 믿지 않고 주서 이창신에게,

“국문으로 인해 죽은 사람을 모두 조사해 보고하고, 사헌부에 가서 태장(笞杖)이 법식에 맞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검사해서 불법이 있으면 밝히라!”

라고 전교했다. 주서 이창신이 사헌부를 감찰했는데, 그 과정에서 안진생 등이 신고식을 핑계로 신속인들에게 연회를 강요했으며, 자신들도 연회에 참석해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임금이 안진생 등을 벌하려 했다. 그러자 사헌부는 조위도 함께 벌해야 한다고 청했다. 그래서 안진생 등에게 곤장 70대에 고신 2등을 추탈하는 등의 벌이 내려졌고, 조위는 고향 김산(지금의 김천)에 부처됐다.

고향에 내려간 조위는 김종직의 서원처럼 이용되던 직지사에 들어가 수행했고, 김종직의 문우인 김맹성의 가르침을 받으며 학문을 보강했다.

이듬해 2월 부처가 해제됐다. 스승 김종직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시를 지어 사면을 축하했다.

화전(한림)의 고사가 그대의 허물이 되었다고(花甎故事爲君累)

고개 밖의 계산에서 밝은 표정으로 우스갯소리 하더니(嶺外溪山笑語淸)

듣건대 옥황의 사면 교지가 이르렀다니(聞說玉皇消息到)

봄바람에 실려 들려오는 말발굽소리 경쾌하겠네(春風應得馬蹄輕)

하지만 조위는 관직에 복귀하지 않았다.

4월에 당숙 조석문이 좌의정에 임명되면서 조위를 사가독서 명단에 포함되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임금은 사가독서에 선발된 문신들을 송도(개성)에 가서 쉴 수 있게 배려했다.

조위, 채수, 권건, 유호인, 허침, 양희지 등은 송도에 가서 어울리며 주고받은 시편을 모아 「송도록」을 엮었다고 한다.

조석문은 가을에 병으로 사직했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조위가 사가독서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는 정희대비의 섭정이 끝나고 성종임금의 친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위는 홍문관정자에 임명돼 「독서당기」를 지어 임금께 바치는 것으로 첫 업무를 시작했다.

임금이 집현전을 대신해 용산의 공해(公廨)를 독서당으로 개조하면서 조위에게 그 내력을 기록하라고 하명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집을 짓는 자는 먼저 가시나무와 녹나무, 소태나무와 가래나무의 재목을 몇 십년 또는 몇 백 년 길러 반드시 공중에 닿고 동학에 솟은 연후에 그것을 동량으로 쓰게 되는 것이요, 만 리를 가는 자는 미리 화류와 녹이(주나라 목왕이 타던 준마)의 종자를 구하여 반드시 꼴과 콩을 넉넉히 먹이고 안장을 정비한 연후에 가히 연나라와 초나라 먼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어진 인재를 기르는 것도 이와 같음이라. 이것이 독서당을 지은 사유이다.

(…)

조위가 지어 올린 「독서당기」를 읽어본 임금은, “백관 중 문장은 매계가 단연 으뜸이다”라고 찬했다.

1481년(성종 12년)엔 어명으로 「두시서(杜詩序)」를 지었다. 「두시서」는 『두시언해』를 발간하게 된 내력과 의의 등을 적은 서문이다. 『두시언해』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연구하고 한글로 번역한 책으로, 국어국문학 연구와 한시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성종임금의 조위의 시문에 대한 총애는 남달랐다. 조위가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해 나갔을 때도 조위의 문장을 그리워하여 매년 지은 시를 뽑아 올리라고 하명할 정도였다. 조위는 어명을 받들어 자신의 시를 선별해 『세초시』를 엮어 올리고 쌀과 콩, 서책을 하사받았다.

(다음 회에 계속)

·사진 제공_ 김천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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