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새 임금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 이준경은 기묘사화의 화를 입은 조광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또 을사사화 때 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을 신원할 것과, 또 을사사화와 정미사화의 화를 입고 억울하게 귀양살이를 한 노수신과 유희춘 등을 풀어줘야 한다고 상소했다.

선조임금이 이를 윤허했고, 노수신은 유배에서 풀려났다. 20년간 노수신의 하늘을 뒤덮고 있던 짙은 먹구름이 걷히는 순간이었다.

양명학과 철리시(哲理詩)

선조임금은 그 학문이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며 노수신을 서용하라고 전교했다.

노수신은 홍문관교리에 임명됐고, 얼마 후엔 기대승의 천거로 직제학에 제수됐다.

그러나 노수신은 어머니 곁을 20년간이나 떠나 있었으므로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서 효도를 하고 싶다며 사직을 청했다.

“자식의 도리를 다하겠다는 그 마음 지극하고 극진하나, 지금 그대를 잡지 않는다면 내가 어진 선비를 얻으려는 뜻을 잃게 되니 사직하지 말고 직에 임하며 자주 가서 부모님을 뵙도록 하라.”

선조임금은 윤허하지 않았고, 대신에 휴가 다녀올 말을 내주라고 하교했다.

또 노수신이 벼슬을 하면서도 어머니를 봉양할 방법은 없는지 찾아보라고도 했다. 그러나 노수신은 사직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영의정 이준경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20여 년간이나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노수신의 사연이 적힌 상소문을 읽고 눈물을 금치 못하겠더이다. 그러나 이처럼 학문에 뛰어난 신하를 얻기란 쉽지 않으니 사직을 윤허하지 마소서”하고 노수신을 붙잡아야 한다고 아뢰었다.

좌의정 권철과 영중추부사 이명 등도 같은 생각이었다.

선조임금은 노수신의 마음을 위로하는 뜻에서 그 스승의 스승인 조광조를 영의정으로 추증하라는 특명을 내렸고, 노수신을 부제학에 제수했다.

임금이 이렇게까지 생각해주자 노수신은 차마 더 사양하지 못하고 직에 임했다.

훈구파와 싸워오던 사림파는 선조가 즉위한 후 훈구파를 몰아내고 집권에 성공하지만 사림끼리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져 또 싸웠다.

당쟁의 직접 피해자로 억울한 유배생활을 20년간이나 해야 했던 노수신은 그 지긋지긋한 당쟁을 보고 싶지 않아서 1571년(선조 4년) 대사간에 제수됐음에도 사직하고 고향 상주로 내려갔다.

의리를 말하면서도 천지간을 도피하려는가(義欲逃天地)

아버지의 義와 어머니의 慈 형의 友 동생의 恭 아들의 孝는 고금에 뻗쳐 있다(綱猶亘古今)

해바라기의 고개 숙이는 그 특성 빼앗을 수 없고(葵傾莫奪性)

충견의 주인 향한 그리움 속일 수 없으리(犬戀孰誣忱)

임금의 앞자리에 이르니 은총이 치우치고(前席恩偏至)

백성을 다스리는 은택이 정히 깊구나(新民澤正深)

당시 나라 생각뿐이기에(當時知有國)

감히 두 마음 품지 못할 우리 마음이라(不敢貳吾心)

노수신의 선조임금에 대한 감사의 마음과 충성심, 그리고 의리 없이 도망쳐온 것에 대한 송구함이 가득 담겨 있는 「우성(偶成: 우연히 이루어짐)」이라는 시이다.

노수신은 고향집에서 어진 임금을 생각하고 어머니에게 못 다한 효도를 하며 지냈다.

선조임금은 특별히 노수신의 어머니에게 식물(食物)을 내렸고, 노수신을 호조판서에 제수하고 불렀다.

노수신이 사양하고 올라오지 않자 대사헌에 제수하고 재차 부르며 천문도(天文圖)를 하사했다.

노수신은 임금의 뜻이 간곡해서 하는 수 없이 나아가 사은하고 대사헌에 부임했다.

1572년 이조참판이 됐고,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차례로 역임하고 1585년(선조 18년) 영의정에 올랐다.

관직을 수행하며 동인과 서인의 화합에 많은 공을 들였고, 양명학의 대가로서 경연에 입시하여 임금과 깊이 있게 학문을 논했다.

사람은 마땅히 존심(存心)에만 힘쓸 것이며, 문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경서의 훈고는 이미 그 의미가 풀렸으므로 문자는 잊어버리셔도 됩니다. 문자만 가슴속에 새기고 있으면 결국 해가 됩니다. 상고에 어찌 글자가 있었겠습니까. 단지 서로 말하여 마음에 간직했을 뿐입니다.

1574년(선조 7년) 5월 노수신은 조강에서 이렇게 아뢰었다. 학문보다는 마음공부를 강조한 것인데, 학문을 너무 깊이 파고드는 것은 오히려 마음공부에 해가 된다는 뜻이었다.

양명학과 상산학처럼 학문은 심학 위주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독서를 중요시하지 않는 이런 특성 때문에 퇴계학파는 양명학을 선학(禪學)으로 규정하고 비판했다.

훈고학이 문자에 치중하여 연구된 측면이 있다면 성리학은 훈고학에서 다루지 못한 형이상학적 실천윤리를 담고 있다.

문자를 소홀히 한다면 격물치지, 즉 사물에 대한 궁구로 지식을 넓히는 대신 존심, 즉 마음공부에만 힘쓰게 되어 결국은 선학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知)와 행(行)은 두 가지 일이 아닌데 주자가 분별하여 말을 했고, 세상의 유자들이 두 가지 일로 명백히 여기니, 이는 온당치 않습니다.

역시 노수신이 경연에서 아뢴 내용이다.

주자의 선지후행 논리에 대한 반박이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본래부터 하나라는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양명학에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분리되면 안 된다면서 지행을 합일시켜야 실천이 강화되어 치양지(致良知)할 수 있다고 본다.

노수신은 지행뿐 아니라 리와 기, 도(道)와 기(器)도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철리시(哲理詩)를 통해서, 도심은 형기를 타고 인심으로 드러날 뿐이며, 인심은 인욕과는 다른 것으로, 본성인 도심이 발한 것이라고 규정했다.

원래 도와 기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元來道與器非隣)

인심을 외진(外塵: 색·성·향·미·촉·법)으로 볼 수 있겠는가(可認人心是外塵).

모름지기 도심은 대본이 되고(須就道心爲大本)

용(用)이자 정(情)인 인심이 움직일 때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는 것을 보네(用時還見道乘人)

앞서도 말했지만 노수신은 도심(道心)을 체(體)이자 성(性)인 미발로, 인심은 용(用)이자 정(情)인 이발로 봤다.

그래서 인심이 움직일 때 천리(天理)인 도심이 인심을 타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미발의 중(中)이 발한 칠정(七情)이 인심이라는 주희의 정의에 위배된다.

노수신은 욕망이 사람의 본성이라고 하면서 또 다른 철리시를 지었다.

욕심은 사람의 본성이기에(欲者人之性)

사람마다 없을 수 없다(人皆不可無)

어떻게 닦아야 능히 도에 들어갈까(何修能入道)

나는 늙고 어리석어져서야 경지로 돌아와(吾老竟歸愚)

병든 눈으로 삼 년 동안 눈물 흘렸다(病眼三年淚)

이별의 눈물이 팔월의 호수로다(離懷八月湖)

몇 사람과 이런 의논을 나누었으나(幾人曾此論)

오늘 다시 긴 탄식이로다(今日更長吁)

음과 양이 하나인 것을 보면서도(只見陰陽一)

어찌 리와 기의 갈림길을 안다고 하는가(那知理氣歧)

선유들은 욕망을 분별하는 것을 우려했고(先儒憂欲辨)

후학들은 분별을 고집하도다(後學執爲辭).

꿈을 말할 땐 종횡으로 합하지만(說夢縱橫合)

장보러 갈 때는 전전하여 흩어지는 것(看場轉輾離).

(장군에 반한)멍군을 삼일로 나누었더니(應將三日別)

문득 백 년의 의심이 풀리었다(焂釋百年疑)

노수신은 이 시에서,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욕망을 닦아야 도에 들어간다’는 것은 본성을 닦는다는 뜻이므로 실제로는 불가능하며,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근거로 음양이 하나라는 점을 들고 있다.

마음이 본체인 동시에 작용인 체용일원(體用一源)이기 때문에 욕망과 본성을 따로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차운시로 반박했다.

욕심이 사람의 본성이기에(欲者人之性)

사람마다 없을 수 없다는(人皆不可無)

이 말이 어느 곳에서 나왔는가(斯言何所出)

쓸데없는 말에 서로 현혹될까 두렵노라(剩語恐相愚)

사물이 있으므로 당연히 법칙을 아는 것(有物當知則)

고기가 반드시 호수에 있는 것과 같네(如魚必在湖)

행함은 같아도 실정은 다르니(同行情却異)

종얼(정학과 이학) 중의 정학이 탄식을 참네(宗孽正堪吁)

성악설은 순자의 설인데(性惡荀卿說)

욕망에 대한 논의가 어느 때는 없었을까만(欲論何代無)

(…)

음과 양이 어찌 하나일 수 있고(陰陽豈是一)

리와 기가 갈라지지 않을 수 있나(理氣不容歧)

하나로 보는 것 자체가 애초 잘못된 바탕인지라(見一元乖實)

갈라짐을 물리쳐야 말의 핑계가 되겠지(言歧却失辭)

몇 사람의 미혹을 깨달음으로 여겼는가(幾人迷似悟)

합은 어서 분리로 돌아오라(今日合還離)

성인의 덕을 흠모함이 아직도 뜻밖인가(鑽仰猶瞻忽)

옛 현인들마저 미혹하려 하네(前賢亦有疑)

(…)

기대승은 애초 음과 양이 하나이고 리와 기를 하나로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정의이므로 욕심이 사람의 본성이라는 엉터리 주장이 나온 것이라고 반박했다.

욕심이 본성이라는 주장은 순자의 성악설에 기초한 것이며, 그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억지에서 음양과 리기가 하나라는 주장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서 빨리 양명학을 버리고 정주학으로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다.

기대승뿐 아니라 여러 퇴계학파 학자들이 노수신의 논리를 반박하고 비판했다.

이에 노수신의 제자 이준은 노수신이 위의 시에서 말한 성(性)은 본성이 아니라 기질지성이었다면서 시로 변론했고, 이에 대한 또 다른 반박이 시로 이어지며 소재학파와 퇴계학파 사이에 철리시 논변이 확산됐다.

예전 노수신과 이황, 그리고 기대승 사이에 이루어지던 편지논쟁과 토론이 철리시로 대체된 것이다.

노수신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옥연사.
노수신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옥연사. [사진=상주시청]

이로써 사림의 철리시가 학술논변의 새로운 수단이 되었고, 그 중심에 노수신이 놓여 있었다. 덕분에 많은 철리시가 이 시기에 지어졌다.

노수신의 소재학파와 퇴계학파 사이의 학술논쟁 철리시는 많지만 지면상 짧게 소개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다.

때론 감정이 격해져 조롱의 말이 오가기도 했지만 이들의 논변은 어디까지나 군자의 의리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노력 하에 이루어졌다.

노수신은 1584년 정철이 조작한 정여립 모반사건 때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파직됐고, 1590년 4월 7일 일흔여섯 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후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상주시 화서면 서산리 286번지에 종택이 있고, 상주시 화서면 옥연마을의 옥연사 뒷산에 신도비와 묘소가 있다. 저서로는 『소재집』, 『시강록』 등이 있고, 『화원악보』에 시조가 실려 있다.

상주 도남서원과 봉산서원, 진도 봉암사, 괴산 화암서원, 충주 팔봉서원 등에 제향됐다.

참고문헌

『고봉속집』(기대성 저, 장순범·이성우 역), 「소재 노수신의 정치활동과 정치관」(조성을, 아주대학

교 교수), 「노수신의 심성론과 양명학」(신향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노수신의

초기 사상과 경세론」(신향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국조인물고』(세종대왕기념사

업회), 『조선왕조실록』(국사편찬위원회), 『소재집(穌齋集)』( 노수신 저, 임정기 역, 한국고전번역원),

『송명성리학』(陣來 저, 안재호 옮김. 예문서원, 2011. 08. 30.)

·사진 제공_ 상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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