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뉴엘' 신화 뒤 굴곡 겪어...호텔롯데 기업 공개에서 '역할론' 급부상

호텔롯데 장선윤 전무이사 겸 운영기획부문장
호텔롯데 장선윤 전무이사 겸 운영기획부문장

【뉴스퀘스트=김선태 기자】 "나는 그녀의 위대한 영혼과 접촉했다네. 그 영혼이 나를 감싸주었을 때, 나 자신이 현실의 나 이상의 존재처럼 느껴졌다네.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될 수가 있었던 걸세. 정말이지 그때 나는 내 영혼이 지닌 힘을 남김없이 발휘할 수 있었던 걸세."

-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 베르테르의 고백

장선윤 호텔롯데 전무는 롯데가의 유일한 3세 여성 경영인이다.

외조부 고(故) 신격호 회장의 총애를 받았고 모친인 신영자 전 롯데쇼핑 총괄부사장의 신임 속에 경영 일선에 나섰지만 그 행보는 평탄하지 않았다.

한 재계 관계자는 그런 장선윤 전무에게 "제대로 된 기회를 얻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외조부와 모친의 경영 유전자를 물려받았음에도 독자적으로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내외 여건이 안정적이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 창업신화 이면의 '비정한 후계구도'

고 신격호 전 명예회장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맨손으로 세운 롯데를 한국 대표기업의 하나로 키워냈다. 

신 명예회장은 1922년 10월 4일 경남 울산군 상남면(현 울산시 상동면)에서 아버지 신진수와 어머니 김순필의 5남 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농사일을 거들다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1936년 울산농업보습학교에 진학했다.

졸업한 뒤 종축장 기수보로 취업했는데 관례에 따라 18세의 나이로 당시 부농 집안의 딸 노순화와 결혼했다. 하지만 처가의 재정 지원을 받지 못해 부업으로 양털 깎기나 돼지 사육을 했어도 늘 가난에 시달렸다. 

참다 못한 그는 1941년 열아홉 살 무렵 단돈 83엔을 들고 관부연락선에 올라 현해탄을 건넜다. 

이어 도쿄로 가서 고향 친구의 자취방에 얹혀살며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제 시간에 우유를 배달하는 그를 미더워하는 사람이 늘면서 얼마 뒤 배달 고용원을 두고 일할 정도가 되었다. 

와세다중학 야간부에 편입한 뒤 작가가 되고 싶어 시간을 쪼개가며 헌책방에서 문학 서적을 읽었다. 

그러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빠져들었는데, 후일 롯데라는 사명이 소설의 여주인공 샤를 로테에서 나왔다. 

롯데라는 이름은 인간 신격호에게 평생에 걸쳐 자신의 영혼이 지닌 모든 힘을 남김없이 발휘하게 해 준, 그의 말을 빌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당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라 징집을 면하고자 이공계인 와세다공업고등학교 야간부 화학과에 입학했는데 그로 인해 문학도의 꿈은 접어야 했다.

1944년 하나미쓰라는 전당포 겸 고물상 주인에게서 6만엔을 빌려 군수용 커팅 오일 공장을 차렸다. 

당시 회사원 월급이 100엔 내외이던 시절이니 상당한 액수였는데 공장을 가동하기 직전 미군 폭격에 건물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마침 해방이 되어 조선인들이 대거 귀국길에 올랐지만 그는 성공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며 그대로 머물렀다.

1946년 5월 낡은 창고를 얻어 '히카리특수화학연구소'를 설립하고 수중에 남은 커팅 오일로 비누와 머리기름인 포마드를 만들었다. 

이 제품들이 전후 특수 붐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린 덕에 빚을 청산했는데, 당시 그는 하나미쓰 씨에게 이자로 집 한 채를 사주었다 한다. 

이어 미군 폭격으로 건물이 내려앉는 사고를 당했지만 밑천이 든든한 그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업종을 바꾸어 비누 만들던 기계로 껌을 만들어 팔자 사세가 더 커졌다.

그렇게 해서 1948년 6월 28일 도쿄 변방 신주쿠, 오늘날 일본 최대 번화가지만 당시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던 곳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를 세웠다.

1952년 신격호는 주인집 딸 다케모리 하쓰코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가정을 얻은 그는 본격적으로 껌 연구에 돌입하는 한편 한국의 가족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동생 신철호에게 경영수업을 시켜 1959년 국내에 주식회사 롯데를 세웠고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인 1967년 자본금 3000만원에 직원 500명 규모인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그 사이 초콜릿 사업에 진출한 데 이어 사이다, 아이스크림 등으로 제품 라인을 넓혔고 1973년 롯데리아를 세웠다. 

이어 산업 영역을 확장해 호텔롯데, 롯데산업과 롯데상사 및 롯데쇼핑을 설립했고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해 중화학공업에 진출한 다음 롯데자이언츠를 출범시키고 대흥기획과 롯데물산을 세웠다.

1983년 롯데는 24개 계열사에 2만여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되었고 2000년대 들어 국내 5대 재벌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

그는 홀수달이면 신격호 회장으로 한국에서 일했고 짝수달이면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일했다.

그럴싸한 비서진이나 수행원도 없이 양국을 오간 그의 소탈한 경영 스타일이 자녀들에게도 대물림되고 있다는 것이 주위의 증언이다.

초기에는 일본롯데가 규모 면에서 압도적이었지만 지금은 한국롯데가 일본롯데를 압도한다.

다만 그 배경에 롯데가 다른 재벌에 비해 유독 많은 부동산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로 지적된다. 

신 회장은 일본에서 장기간 부동산 매입에 열중해 1970년대에 이미 현 시세로 1조원이 넘는 부를 챙겼다. 그는 한국도 일본과 같은 성장 궤적을 그릴 것이라 보아 선제적으로 국내 부동산 투자에 임했다.

그 정도가 지나쳐 본업보다 호텔, 백화점, 유통과 관련된 부동산 매입으로 부를 키워 '재계 부동산 서열 1위'가 되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되었다.

신영자 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은 고 신격호 총괄회장에게 애틋한 맏딸이다.

신 회장이 결혼한 지 한해 만에 한국을 떠났고, 그 뒤에 태어난 딸은 모친인 노순화 여사 슬하에서 컸다. 

모친마저 1951년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해 신 이사장은 10살부터 반 고아 신세로 자랐다.

그렇지만 부친이 귀국하여 사업을 키우는 사이 신 이사장은 부산여고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나오면서 든든한 재목으로 자랐다.

1973부터 1979년까지 롯데호텔 부사장을 맡아 수완을 발휘했고, 1988년부터 2008년까지 롯데쇼핑 총괄부사장을 맡으며 롯데가 유통업계 선두주자로 올라서는데 일조했다.

그 사이 1997년 롯데백화점 부사장, 2008년 롯데면세점 사장,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롯데쇼핑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롯데그룹의 핵심 경영자로 이름을 알렸다.

2005년 명품관인 에비뉴엘 개점의 총책임을 맡은 뒤 30년 근속 수상을 할 정도로 경영에 의욕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신격호 회장이 만년에도 그룹 경영을 직접 관장한 데다 후계를 아들에게 물려줄 의사를 분명히 한 탓에 맏딸인 신 이사장은 핵심적인 역할을 맡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부친의 지근거리에 머물렀지만 결국 경영 전반에서 물러나게 된 배경이다.

동주, 동빈 두 아들의 위상이 커진 가운데 2012년 롯데쇼핑 사장을 내려놓았고 이후 롯데복지재단, 롯데장학재단, 롯데삼동복지재단 등의 이사장을 맡는데 그쳤다.

다만 나름 그룹 내 여러 기업의 지분이 있어 이로써 후일 '롯데가 형제의 난' 와중에 자신과 가족의 방패막이로 삼을 수 있었다. 

롯데복지재단에 재직할 당시 신영자 전 이사장
롯데복지재단에 재직할 당시 신영자 전 이사장

◇ 재벌가의 일탈, 형제의 난 와중에서 

한국 재벌가에 만연한 모럴 헤저드는 신영자 이사장에게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2016년 검찰은 신 이사장에 대해 수십억원대의 횡령 및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에 따르면 신 이사장은 아들 장모씨 명의로 운영하는 회사를 사실상 직접 운영하면서 회삿돈을 지속적으로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세 딸들을 임원으로 등기시켜 급여 명목으로 40억원이 넘는 돈을 챙겨준 것으로 알려져 파장이 컸다. 

당시까지 신 이사장은 롯데쇼핑 사내이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그해 7월 구속수감 되었고, 2년 뒤 이사직을 내놓았다.

2010년 들어 신격호 총괄회장의 노환으로 롯데에 경영 공백 우려가 커졌다.

후계구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가운데 2015년 들어 경영권을 둘러싼 두 아들 사이의 분쟁이 세간에도 알려졌으니 이른바 '롯데가 형제의 난'이다.

둘 모두 일본 태생으로 형인 동주는 당시 아오야마(靑山) 학원을 나와 일본 미쓰비시 상사에서 10년을 일하다 87년 한국롯데에 입사했고 일본롯데 부사장을 지냈다.

동생인 동빈은 형과 같은 아오야마 학원을 나온 뒤 일본 노무라 증권에서 8년을 일하고 1988년 일본롯데상사 이사로 재직했다. 

이어 한국으로 건너와 1990년 호남석유화학 상무로 일하다 1997년 한국롯데 부회장으로 승진했고 2011년 회장에 취임했다.

동생이 롯데 경영에 긴밀하게 결합한 셈이지만 형은 롯데그룹의 지주사격인 일본 광윤사를 장악하고 있어 둘의 관계에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두 사람이 한 치 양보 없는 세 대결을 펼친 결과, 2019년 일본 롯데홀딩스 회장에 오른 신동빈 회장이 이후 한일 양국을 통틀어 롯데그룹의 경영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2020년 1월 19일 향년 99세로 별세했다.

그런데 비록 실권은 잃었지만 신동주 전 부회장이 완전히 밀려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유는 한일 양국에 걸쳐 복잡하게 얽혀 있는 롯데그룹의 지분 구조 때문이다.

먼저 양국 롯데그룹 계열사 지분을 하나로 엮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것이 호텔롯데(롯데호텔)다. 

호텔롯데는 일본 롯데홀딩스가 19.07% 최대주주이며 그밖에 주요 지분을 일본롯데 투자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다.

일본 롯데홀딩스는 신동빈 회장이 4.0%의 지분을 지닌 채 대표이사 회장으로 재직중이며 최대주주는 일본 광윤사로 28.1%, 다음으로 종업원 지주회사가 27.8%의 지분을 보유중이다.

문제는 신동주 전 부회장이 광윤사(고준샤, 光潤社) 대표이사이자 그 주식 50%+1표를 보유중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형이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직에 복귀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롯데홀딩스 종업원 지주회사를 설득할 경우 상황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다.

최근 신동주 전 부회장이 자신의 보유지분을 정리해 확보한 자금이 무려 93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이 나왔다.

이 자금을 무기로 일본 롯데홀딩스 이사 재진입이나 동생의 지위 상실을 겨냥한 일본 내 소송전에 총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크고, 이는 동생 입장에서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동빈 회장에게도 이에 대항할 무기가 있는데 롯데호텔의 상장이 그것이다.

기업집단으로서 롯데는 2020년 1분기 말 현재 롯데지주를 정점으로 총 86개의 계열회사를 보유중이다.

그중 상장사는 10개사, 비상장사는 76개사인데 그룹의 핵심고리인 롯데호텔이 비상장사다.

만일 롯데호텔이 상장되어 최대주주인 일본 롯데홀딩스 지분을 희석시켜 그 결과 형의 지분을 줄인다면 동생 신동빈 회장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는 것이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간 롯데호텔은 이를 위한 기반 조성 작업을 착실히 추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단숨에 주목을 끈 이가 장선윤 롯데호텔 전무이사다.

신동빈 회장 중심으로 모인 롯데가(家) 여성들일본 도쿄 롯데면세점 긴자점 개점 행사에 롯데 가문 여인들이 대거 모였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부인 시게미쓰 마나미(重光眞奈美) 여사, 어머니 시게미쓰 하쓰코(重光初子) 여사, 누나 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이사장, 며느리 시게미쓰 아야(重光絢) 씨, 신 이사장 딸 장선윤 당시 호텔롯데 해외사업개발담당 상무. 2016.3.31. / 사진 = 연합뉴스.
지난 2016년 3월 31일 일본 도쿄 롯데면세점 긴자점 개점 행사에 롯데가 여인들이 대거 모였다. (오른쪽부터)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부인 시게미쓰 마나미(重光眞奈美) 여사, 어머니 시게미쓰 하쓰코(重光初子) 여사, 누나 신영자 롯데복지재단 이사장, 며느리 시게미쓰 아야(重光絢) 씨, 장선윤 당시 호텔롯데 해외사업개발담당 상무. [사진=연합뉴스]

◇ "제2의 에비뉴엘' 신화는 가능할까

장선윤 전무는 그동안 롯데 계열사 경영에서 여러 차례 부침을 겪었다.

출발은 산뜻하고 순조로웠다. 미 하버드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재원인 그는 1997년 6월 롯데면세점에 계장으로 입사해 업무를 익혔고 1998년 2월부터 2000년 6월까지 롯데쇼핑 상품본부(해외상품팀) 바이어로 활동했다. 

외할아버지를 닮아 키가 크고 호리호리해 호감형인 데다 영어에 능통하고 업무 추진력도 뛰어나 선대회장의 신임을 받았다. 성격도 소탈해 그때나 지금이나 직원들 사이에 평이 좋다는 후문이다. 

롯데면세점과 롯데쇼핑을 실질적으로 이끈 모친 신영자 총괄부사장의 후광에 힘입기는 했지만 거꾸로 그룹 내에서 모친이 유일하게 상의하고 의지하는 인물이라는 평도 있다.

어찌됐건 그는 롯데쇼핑 시절 바이어로서 능력을 보였고 2002년부터는 롯데백화점 해외명품 1팀장을 맡아 명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해외명품통합팀장 자격으로 2005년 롯데백화점 명품관 ‘애비뉴엘’을 성공적으로 개관했다.

2006년 2월 정기인사에서 이사로 승진할 당시 "롯데에서 명품은 장선윤으로 통한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한다.

에비뉴엘의 성공은 장선윤의 경영 이력에서 가장 화려한 대목이다.

그간 할인점에 밀렸던 유통명가 롯데의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이 야심작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개관 당시 5천200평 규모 매장에 96개의 브랜드가 입점했는데 이미 알려진 브랜드 외에도 당시까지 국내 소비자들에게 생소했던 브랜드들이 대거 선을 보여 화제를 모았다.

VIP 고객 휴게공간인 에비뉴엘 라운지와 멤버스 클럽을 운영했고, 최상위 고객을 위한 쇼핑도우미를 두는 등 파격을 연출했는데 그 효과가 고스란히 매출 상승으로 이어졌다.

2007년 2월 정기인사에서 그는 롯데호텔 해외사업 개발담당 상무로 승진한 뒤 7월 호텔사업부 마케팅부문장(상무)으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면세점에서 시작해 쇼핑을 거쳐 호텔로 옮기는데 10년이 걸렸다.

그러는 사이 그 주변에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명품 사업을 책임지던 그가 2007년 승진을 전후해 강력한 경쟁자인 신세계와의 결전을 앞두고 돌연 외유에 나선 것이다.

당시 회사 관계자는 "상품 소싱과 시장조사를 위해 해외의 명품시장을 직접 둘러보러 떠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지만 그것으로는 해명되기 어려운 '사고'였다.

이어 7월에 호텔로 전보 발령이 났고 10월 당시 음악가 집안 자제이던 아우디코리아의 양성욱 상무와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5월 사실상 업무에서 손을 뗐다.

한동안 잊혔던 그가 2010년말 남편과 함께 베이커리 업체인 블리스를 설립하더니 다음해 1월 직접 고급 베이커리 카페 포숑 운영에 나섰다.

비슷한 시기에 모친 신영자 사장이 설립한 화장품 도소매업체 에스앤에스인터내셔날에 다른 자매들과 함께 주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후계구도와 맞물려 신 사장이 롯데그룹에서 독립할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포숑 카페는 설립 여건이 좋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에 신라호텔 이부진 사장, 신세계 정유경 총괄사장 등 재벌가 자녀들이 약속이나 한 듯 고급 베이커리 사업에 뛰어들면서 여론이 악화된 것이다.

포숑만 하더라도 프랑스 현지 매장을 방불케 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이는 백화점 명품관과 달리 재벌의 서민 상권 침해라는 비난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결국 2011년말 호텔신라 이부진 대표가 사업 철수를 선언했고 다음해 1월 장선윤 대표도 손을 들고 말았다.

그가 다시 업계에 등장한 때는 2014년 10월, 롯데호텔 마케팅부문장을 맡으면서부터다.

하지만 과거와 같은 활약상을 보이지 못한 채 2015년 3월 롯데복지장학재단으로 파견되어 신영자 이사장 밑에서 아동복지사업에 관계했다.

그러더니 곧장 4월 롯데호텔 해외사업 개발담당 상무로 발령받아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역시 시기가 문제였는데 바로 이 무렵 유명한 신동주-신동빈 형제의 난이 표면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룹 승계권을 놓고 물밑에서 전개되던 형제의 각축이 수면 위로 부상하자 권력에서는 멀어졌지만 적지 않은 지분을 지닌 신영자 이사장으로서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말았다.

장선윤 상무에게는 호텔의 해외진출 프로젝트가 떨어졌지만 두 삼촌의 한 치 양보 없는 대결 속에 그 또한 지극히 조심스런 행보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갈등의 정점을 찍은 때가 2016년 3월 신동빈 회장이 주재한 일본 도쿄 롯데면세점 긴자점 개점식이다.

이날 두 모자는 신격호 명예회장의 부인 시게미쓰 하쓰코 여사를 비롯한 여러 가족 일원들과 함께 참석해 신동빈 회장의 우군임을 분명히 했다.

이후 한일 양쪽 롯데주총에서 신동빈 회장의 승리가 확정되어 그룹 후계 문제가 일단락되었고, 그 덕인지 2017년 2월 장선윤 상무는 롯데호텔 전무이자 운영기획부문장으로서 본격 경영 행보에 나서게 되었다.

롯데 관계자는 이에 대해 "장 전무는 롯데호텔의 해외 진출을 가속화해 '글로벌 리딩 호텔'로 만들고자 하는 신 회장과 뜻을 같이 하고 있다"며 "해외 유명호텔 그룹들이 사용하는 호텔경영위탁계약 방식으로 비용 부담을 줄이면서 영업점을 성공적으로 확보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향후 장선윤 전무에게 당면한 과제는 지배구조 개편의 화룡점정이 될 롯데호텔의 기업공개(IPO)를 완성하는 일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성공적인 기업공개를 위해서는 롯데호텔의 해외진출 성과를 부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가 이 일을 이끌어온 주역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날 애비뉴엘 명품관으로 업계를 감탄하게 했던 장선윤 전무가 다시 한 번 성공 신화를 펼쳐 '역시 롯데 신격호의 외손녀'라는 말을 듣게 될지, 확인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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