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경상우도 방어군은 정기룡과 돌격대의 맹활약으로 겨우 왜적 포위망을 뚫고 나오긴 했지만 군사가 크게 줄어 있었다.

정기룡은 남은 군사를 정비하다가 조경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탈출 도중 총상을 입고 적에게 사로잡혔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정기룡은 자신의 군사 돌격대를 소집해서 다시 돌아섰다.

조경을 사로잡아간 왜적은 아직도 산속에 있었고, 산 아래로 이동 중이었다.

그들이 산 아래의 본대에 합류하기 전에 조경을 구해야 했다.

군사요충지 상주(尙州)를 지켜라

정기룡은 돌격대를 거느리고 말을 달려 산속으로 뛰어들었고, 왜적을 향해 돌진했다.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기 급급했던 조선군이 돌연 돌아서서 공격을 해오자 왜적은 당황했다.

허둥지둥 전투대형을 갖추었지만 정기룡의 돌격대가 너무 빨라서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대형은 무너졌고, 그 가운데로 뛰어든 조선군 돌격대의 창칼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나갔다.

정기룡은 부상을 입고 왜적에 사로잡혀 있는 조경을 발견했고, 달려가서 장검으로 주변의 적을 마구 베었다.

정기룡의 말이 너무 빠르고 그 칼이 또 너무 힘차서 조총수들이 총을 겨눠 쏠 틈이 없었다.

한 번 휘두른 칼에 두세 명의 왜적이 쓰러졌다. 그 엄청난 힘에 놀라고 기세에 놀란 왜적은 조경을 버려두고 달아났다.

정기룡은 조경의 몸을 묶은 포승줄을 칼로 잘랐고, 말 위에 앉은 채 한손으로 조경을 끌어올려 말 등에 올라 앉혔다.

휘파람을 불어 돌격대 부하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렸고, 쏜살같이 숲을 헤치며 아군 진영을 향해 말을 달렸다.

왜적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정기룡은 피하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정기룡의 칼에 왜적이 줄줄이 쓰러졌다.

왜장 흑전장정은 조선장수를 사로잡았으나 조선군 돌격장에게 도로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고 대노했고, 다시 한 번 조선군을 몰아쳐서 완전히 괴멸시키라고 명했다.

왜적이 대형을 갖추고 다시 총공격을 해왔다.

포위망을 뚫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미처 대열을 정비하지 못한 조선군은 계속 밀려 후퇴했다.

조경을 대신해 정기룡이 군사를 지휘하여 힘껏 막아보았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을 극복할 수 없었다.

정기룡은 군사를 거느리고 험한 산으로 올라갔고, 어둠이 내리길 기다렸다가 가까스로 왜적을 따돌리고 직지사로 갔다. 그제야 조경은 부상을 치료할 수 있었다.

“방어사의 군사는 얼마 남지 않았고, 방어사께서는 군사를 지휘할 수 없는 몸이 됐습니다. 제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삼도근왕군(三道勤王軍)으로 들어가 싸우겠습니다.”

정기룡이 조경에게 말했다. 조경은 부끄러워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기룡은 남은 군사와 함께 삼도근왕군에 소속돼 싸웠다.

삼도근왕군은 왜적과 싸워서 수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지만 수원 광교산에서 패해 무너져버렸다.

정기룡은 군사를 더 모아서 경상우도를 방어하기 위해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곤양으로 내려갔다.

상주시 소재 정기룡 장군 유적지. [사진 제공=상주시청]
상주시 소재 정기룡 장군 유적지. [사진 제공=상주시청]

한편, 이순신의 활약으로 곡창지대 호남에 병선을 정박시키지 못한 왜적은 진주성을 공략하기로 하고 9월 김해성에 2만 군사를 집결시켰다.

진주성을 빼앗은 후 그곳에 군사를 두고 육지를 통해 이순신의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이 있는 내례만호진(內禮萬戶鎭: 지금의 여수)을 공략하겠다는 작계였다.

바다에서는 도저히 이순신과 싸워 이길 수 없으므로 육지를 통해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장 장곡천수일(長谷川秀一: 하세가와 히데카즈), 장강충흥(長岡忠興: 나가오카 다다오키) 등은 군사를 거느리고 김해성을 떠나 진주로 향했다.

조선으로서는 왜적이 호남에 들어서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경상우도초유사 김성일은 모든 의진에 진주성 방어에 합력해줄 것을 요청하고 근처의 관군도 진주성으로 모이게 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유숭인도 진주성으로 향하는 왜적의 앞을 가로막고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이며 진주성에 충분한 군사가 모일 시간을 벌어주고 있었다.

호남의병장 최경희, 홍의장군 곽재우, 고성의병장 최강 등이 의병을 거느리고 달려왔고, 사천현감 정득열, 가배량(加背梁: 지금의 거제시) 권관(각 진의 무관) 주대청 등도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왔다.

곤양수령 이광악도 관군을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받았다.

곤양을 비울 수밖에 없게 된 이광악은 때마침 내려온 정기룡에게 곤양수성장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수성장으로서 자신을 대신해 임시로 곤양을 다스려달라는 뜻이었다. 정기룡이 흔쾌히 수락했고, 이광악은 관군을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달려갔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유숭인, 초유사 김성일, 의병장 곽재우, 최경희, 최강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성 앞에 모여들었지만 진주목사 김시민은 성문을 열지 않았다.

많은 군사가 성안에 들어오면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워져 오히려 단결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면서 성은 자신의 군사 3800여 명만으로 지킬 것이니 원군은 성 밖에서 싸워줄 것을 요청했다.

우병사 유숭인과 초유사 김성일은 유시민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성 밖에 진을 친 채 적을 기다렸다.

이때 곤양수령 이광악이 초유사 김성일에게 정기룡 얘기를 했다. 정기룡에게 곤양을 맡기고 왔다는 것이었다.

“정기룡이라고 했는가?”

김성일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경상우도방어사 조경이 왜적에 사로잡힌 것을 정기룡과 돌격대가 적진에 뛰어들어 구해냈다는 얘기를 들은 까닭이었다. 김성일은 정기룡 같은 장수가 꼭 필요했다.

그래서 급족을 보내 정기룡을 불러오게 했다.

초유사 명을 받은 정기룡이 자신의 군사와 함께 진주성으로 달려왔다.

김성일은 정기룡을 유병별장(遊兵別將)에 임명하고 유격대를 맡겼다.

마침내 10월 6일 왜적이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진주목사 김시민과 그 군사는 성 안에서 싸우고 나머지 원군은 성 밖에서 싸웠다.

정기룡은 김성일 휘하 유병별장으로서 유격대를 거느리고 적의 대열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대열을 흩어놓거나 적을 유인했다. 때론 정기룡이 유격대를 거느

리고 말을 달려 적 조총수의 총구를 유인하는 사이에 김성일이 본대 병력으로 적을 휘몰아쳐 기습하는 전법을 쓰기도 했다.

6일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왜적은 엄청난 수의 군사만 잃고 성은 함락하지 못한 채 도망쳤다. 하지만 조선군의 피해도 만만찮아서 사천현감 정득열, 가배량 권관 주대청 등이 전사했다. 정기룡은 달아나는 왜적을 추격하려 했지만 김성일이 만류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유숭인도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김성일은 유숭인 대신 남은 군사를 정비하고 다시 있을지도 모를 적의 역습에 대비했다.

한편, 선조임금은 왜적의 침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영의정 이산해를 파면하고 류성룡을 영의정 겸 병조판서 겸 도체찰사에 임명하여 전쟁을 총지휘하게 했다.

임금으로부터 전쟁지휘권을 위임받은 도체찰사 류성룡은 전사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유숭인의 후임으로 김성일을 천거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경상우병사 김성일은 정기룡에게 백성 중에 왜란을 틈타 의병으로 위장하고 난을 일으켜 약탈을 일삼는 자들을 토벌하라고 명했다.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인 척 무리지어 다니며 반가를 약탈하거나 왜적에 협조하는 자들이 숱하게 많았다.

그들 때문에 나라가 더욱 혼란스러웠고, 왜적을 막는데 막대한 방해가 되고 있었다.

정기룡은 유격대를 거느리고 다니며 백성 중에 난을 일으킨 자들을 토평했고, 그중 건장한 자들을 뽑아 병사로 삼았다.

나머지는 군영에 두면서 둔전을 개발하게 해 군량을 생산했고, 남는 곡식은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줬다.

그런데 얼마 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성일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버렸다.

그때 상주목사 김해가 정기룡을 찾아왔다. 정기룡이 상주에 살며 무과에 급제했으므로 서로 친분이 있었다.

상주목사 김해는 전쟁 초기 상주성을 방어하라는 조정의 명에 따라 관군을 거느리고 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왜적이 강하다는 소문을 듣고 겁을 먹은 나머지 지원을 오고 있는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마중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성을 빠져나가 도망쳐버렸다.

그랬기에 조정에서는 김해를 잡으면 반드시 죽이려 할 것이었다.

김해는 명예도 회복하고 목숨도 보전하게 해줄 사람은 정기룡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기룡에게 한 번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정기룡은 김해가 겁은 많아도 아주 비겁한 자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병석에 누워 있는 김성일을 찾아갔고, 김해의 일을 의논했다.

“그렇잖아도 내 병이 깊어 자네를 거둘 처지가 아니었기에 걱정을 했었네. 그동안 못난 나를 따르느라 고생 많았네.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그래서 내 약간의 보답으로 자네를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천거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겠는가?”

김성일이 김해를 도와주라는 뜻으로 말했다.

정기룡은 경상우병사 김성일로부터 임시 상주판관에 임명됐고, 유격대를 거느리고 상주로 향했다.

상주는 제2의 고향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왜적이 용화동(龍華洞)에 피난한 백성들을 노략질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용화동으로 달려갔다.

적보다 먼저 가서 백성들과 함께 적을 유인해 들판에서 모두 죽였다.

그리고는 흩어진 관군을 불러 모았고, 갑장산(甲長山), 백화산(白華山) 등을 돌며 의병을 불러 모았다.

그렇게 모인 군사가 자신의 군사를 포함해서 500여 명이었다. 정기룡은 영수암에서 의병장 김각과 머리를 맞대고 작전회의를 열었고, 상주성 탈환 계책을 수립했다.

그 계책에 따라 왜적이 들어앉은 상주성 밖의 조총 사거리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나뭇더미를 쌓아서 밤마다 큰 불을 피워놓고 함성을 지르며 금방이라도 쳐들어갈 것처럼 시위를 하다가 물러갔다.

왜장 모리휘원(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이 이끄는 왜적 약 3500여 명은 조선군이 성 밖에 와서 공격할 것처럼 하자 바짝 긴장하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조선군은 매일 같이 와서 위협만 하다가 공격은 않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왜적은 조선군이 성 앞에 불을 피우고 함성을 질러도 이번에도 그냥 돌아가려니 생각하고 대처하지 않았다. 정기룡이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높은 곳에 탐병을 올려 보내 왜적의 움직임을 자세히 관찰하던 정기룡은 성 안의 왜적이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고 경계도 나태한 것을 보고는 바로 지금이다 판단했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정기룡이 이끄는 조선군은 한밤중에 일제히 화전을 쏘아 성에 불을 지르고 공격해 들어갔다. 깜짝 놀란 왜적이 허겁지겁 뛰쳐나와 무장을 갖추었지만 이미 조선군이 성벽을 타고 올라 성곽을 점령한 뒤였다.

정기룡의 유격대도 성문에 불을 질러 부수고 성 안으로 들어가서 왜적을 마구 베었다. 이 전투에서도 정기룡은 가장 앞장서서 싸웠다.

양손에 칼을 들고 휘둘러서 순식간에 적 300여 명을 베어 쓰러뜨리자 기가 질린 왜적은 벌벌 떨며 뒷걸음질쳤다.

워낙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벼락같은 공격이었기에 왜적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후문을 통해 성 밖으로 도망쳤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정기룡은 상주성을 탈환했다. 김해의 목숨이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성을 빼앗기고 달아난 왜장 모리휘원은 함창으로 가서 당교(唐橋)에 둔쳤다.

정기룡은 의병들과 함께 다시 적을 공격했고, 왜장 모리휘원은 쫓겨서 대승산(大乘山)으로 달아났다. 정기룡은 고삐를 늦추지 않고 달아나는 왜적을 몰아쳐서 3천여 명을 살획했다.

도체찰사 류성룡은 정기룡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나 영남의 여러 장수들과 의병장들로부터 그 이름과 칭찬을 많이 들은 터였다.

그런데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성일이 천거하고, 정기룡이 김해와 함께 상주성을 탈환했다는 치계까지 올라오자 정기룡을 중훈대부 군자감부정으로 승진시키고 정식 상주판관에 임명해야 한다고 청해서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그 얼마 후 류성룡은 광해군 분조인 무군사(撫軍司)가 설치된 함경도 회령(會寧)에 왜적 가등청정의 군사가 들어와 방어가 시급해지자 믿을 장수는 정기룡뿐이라며 그를 회령부사에 임명했다.

당시 김수량과 회령부 아전 국경인 등이 나라를 배반하고 무리를 모아 왜적의 편에서 싸우다가 피난 중인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을 사로잡아서 가등청정에게 넘겨준 사건까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정기룡은 광해군 분조를 방어하고 두 왕자를 구하라는 특명을 받고 급히 회령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현지인인 유생 신세준과 오윤적 등의 도움으로 김수량과 국경인 등을 사로잡아 참살했고, 그 머리와 손발을 잘라 상자에 담고 관찰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임해군과 순화군은 이미 어디론가 끌려간 뒤였으므로 구출하지 못했다.

정기룡이 회령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광해군 분조를 잘 지켜내자 류성룡은 선조임금께,

“상주는 군사요충지 중 요충지로,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고 오로지 방어 적임자는 정기룡뿐입니다”

라고 아뢰며 정기룡을 상주목사로 삼아 보낼 것을 청했다. 임금이 윤허했으므로 정기룡은 정식 상주목사에 임명됐다.

이해 말, 명나라가 이여송(李如松)을 방해어왜총병관(防海禦倭總兵官)으로 삼아 4만 3천여 명의 원병을 파견했다. 도체찰사 류성룡은 명나라 원군과 연합하여 왜적에 함락된 평양성을 공격했고, 1593년(선조 26년) 1월 9일 성을 탈환했다.

왜군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진데다, 곳곳의 의병활동으로 보급이 차단되자 후퇴를 거듭했다.

정기룡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니며 왜적을 소탕하고 토적(土賊)을 토벌하여 상주와 예천, 김산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고, 수많은 백성들을 적으로부터 구해냈다.

한편, 왜적은 2차 진주성 공략에 나섰다. 조선은 주변의 모든 관군과 의병, 그리고 민인들까지 6만여 명이 진주성에 들어가 적을 맞아 싸웠다.

정기룡의 아내인 강세정의 딸도 정기룡의 여동생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가서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적과 싸웠다.

그러나 결국 적을 막지 못하고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그러자 정기룡의 아내 강씨는 적삼에 혈서를 써서 남편에게 죽음을 고하고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죽었고, 정기룡의 여동생도 그 뒤를 따랐다.

논개(論介)가 진주성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은 성이 왜적에게 함락된 다음이었다. 정기룡은 아내와 여동생의 죽음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했고, 그 원수를 갚기 위해 더욱 분발했다.

1594년 비변사는 임금께, 왜적에 협조하는 토적 때문에 적 보급로 차단에 어려움이 많으므로 정기룡을 당상관으로 올려 토포사(討捕使)로 삼고 토적을 소탕해야 한다고 청했다.

명나라 제독 마귀 또한, “임금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중 누가 명장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순신, 정기룡, 한명련, 권율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라고 하며 정기룡이라면 믿고 임무를 맡길 만하다고 했다. 임금이 윤허했으므로 류성룡은 1595년(선조 28년) 주변 여러 고을 병사 수천 명을 모아서 정기룡에게 보내며, 상주를 거점으로 요충지를 방어하라고 명했다.

왜적은 패색이 짙어지자 명나라에 강화회담 중재를 요청했고, 명나라는 책봉정사 이종성과 부사 양방형을 조선으로 보내 회담을 중재하게 했다. 회담이 진행되자 왜적은 울산과 부산 등으로 철수했다.

하지만 조선군에 의해 길이 막혀 철수하지 못하고 내륙 곳곳에 남아 있던 왜적도 상당했다. 정기룡은 그들 왜적을 소탕하고 토적을 토벌하며 각 고을을 안정시켜나갔다.

얼마 후 이원익이 우의정 겸 4도체찰사에 임명돼 영남으로 내려왔다.

이원익은 영남에서 활동 중인 의병장 곽재우와 도원수 권율 등의 추천을 받아 상주목사 겸 토왜대장(討倭大將) 정기룡을 감사군(敢死軍: 죽음을 두려워 않는 군대)대장에 임명하고 28개 군(郡)의 관군을 정기룡 휘하에 소속시켰다.

정기룡은 그 28개 군에서 왜적을 무찔러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 공을 인정받아 얼마 후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됐다.

1596년 8월 18일, 조선 통신정사 황신과 부사 박홍장, 그리고 명나라 책봉사 앙방형과 부사 심유경은 왜국으로 건너갔고, 오사카 성에서 왜의 관백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과 강화협상을 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됐고, 풍신수길은 1597년(선조 30년) 1월 장수들에게 조선 재침을 명했다. 이 위급한 상황에 조선 조정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죄인으로 잡아 한양으로 압송하고 국문(鞫問)한 후 파직했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정기룡장군 재조명과 선양방안 연구」(이세영, 한규철, 건양대학교), 「정기룡」(국방부 군사편찬연
구소 편집부), 「정기룡장군의 활약상과 주요 전적지」(김덕현, 경상대학교 지리교육과 교수), 「임진
왜란 연표로 본 정기룡장군」(이상훈, 국립진주박물관 학예연구사), 「문헌 속에 나타난 정기룡장
군」(장원철,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사진 제공_ 상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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