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6월말 장마, 아침 날씨는 안개처럼 부옇다.

비가 올지 모르지만 모처럼 가는 먼 길, 비를 맞고서라도 멋진 여행이 되길 박수 치면서 출발한다.

햇살이 눈부신 치악 휴게소에서 목만 축이고 춘천으로 달린다.

소양호의 수위는 많이 낮아져 푸른 물결이 아쉽다.

10시 반 배를 타고 청평사 나루터까지 10여 분, 30분 간격으로 운항해도 주말이라 행락객이 많다.

배 타고 가는 오봉산

청평사 시원한 계곡을 끼고 공주상(公主像), 구성폭포, 바위굴을 지나 11시경 절 입구, 약수터 물맛이 좋다.

병마다 물을 채우고 뒤편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물푸레·산목련·굴참·철쭉·진달래·사위질빵·당단풍·누리장·광대싸리·생강나무들이 반겨주듯 늘어서 있다.

왼쪽이 적멸보궁의 완만한 코스, 오른쪽이 암벽로프 길이다. 일행들은 험한 암벽 길을 따라 오르는데 소나무와 어우러진 바위에 앉아 소양호(昭陽湖)에 일배(一杯)를 띄운다.

구성폭포.
구성폭포.

햇빛이 잔물결에 일렁이니 눈이 부시다. 소양호는 춘천·양구·인제에 걸쳐 있는 인공호수, 내륙의 바다로 1973년 완공된 동양최대의 다목적 댐이라는데…….

하여튼 최대·최고·최초라는 표현을 동원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인지, 열등감에 대한 집착이나 강박관념일까?

동양최대의 유효기간이 아직 남아있는지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높이 123미터, 길이 530미터. 소양강은 인제에서 춘천을 거쳐 북한강으로 이어지는 물길로 156킬로미터쯤 된다.

우리는 소양호를 뒤로하고 북쪽으로 올라간다. 까마득한 벼랑이며 삐죽삐죽 솟아 있는 바위들이 미끄럽다.

이곳의 암벽구간은 눈 내리는 겨울철 피하는 것이 좋다.

바위에 꽂힌 쇠말뚝과 밧줄을 잡고 간신히 한발 한발 딛는다. 헛디디면 추락하는 아찔한 바위길이 더욱 조바심 나게 하고 배낭은 오늘 따라 무겁다.

숨이 차다.

겨우 한 사람 지날 수 있는 구멍바위를 통과할 수 없어 옆으로 지팡이에 의지하고 올랐지만 위험한 일이었다.

지팡이는 체중이 실렸을 때 갑자기 쑥 내려가면 사고로 이어지므로 등산 장비는 정품을 써야 한다.

산에 오를 때 3배, 내려 갈 때는 7배의 하중이 무릎에 실리므로 지팡이(Stick)는 관절 충격을 30퍼센트가량 줄여준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짐이 무겁다.

첫 산행에 참가한 일행의 도시락까지 맸고 사진 찍으면서 두고 온 지팡이를 찾으러 다시 내려갔다 왔으니 힘들고 배도 고프다. 누군가 내민 초콜릿 덕분에 지팡이 끝에 힘주어 올랐다.

구멍바위를 지나 30분쯤 가면 평탄한 길이 나타나고 곧이어 정상에 닿는다. 뒤돌아보면 저 멀리 호수에 유람선이 미끄러져 간다.

오봉산 779미터, 몇 해 전 이곳에서 사진 찍다 표지석 돌 안에서 구렁이가 나와 놀란 적 있었다.

“구렁이 조심하십시오.”

모두 놀란 듯 잠잠하다.

이산에 구렁이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일행은 힘들게 올라온 것에 비해 산의 높이가 맘에 안 들었던지 나무젓가락을 덧대 1779미터라 한다.

여기서 산비탈 타고 참나무 숲 능선을 따라 가면 오른쪽이 화천방향, 왼쪽 암릉 지대에 진혼비가 있다. 배후령까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춘천에서 국도 따라 30여 분 화천경계 못 미처 배후령 고개, 여름 휴가철 하루 만에 용화산을 갔다 왔으니 힘들었던 기억밖엔 없다.

멀리 소양호, 나무 밑에 청평사가 보인다. 아래는 오봉산 오르는 바윗길.
멀리 소양호, 나무 밑에 청평사가 보인다. 
아래는 오봉산 오르는 바윗길
오봉산 오르는 바윗길.

왔던 길 되돌아 정상부근에 자리를 폈다. 참나무 밑으로 바람이 시원하다.

대신 매고 올라온 도시락은 유리그릇과 쇠 수저였는데 벽돌 짊어진 것처럼 골탕 먹었다하니 한바탕 웃는다.

햇볕은 구름에 가려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땀에 젖은 몸도 하얗게 불었다. 정상에서 바위를 따라 청평사 쪽으로 내려간다.

암릉과 어우러진 소나무를 벗 삼아 구멍바위다. 더 내려가면 망부석이 있고 갈림길에서 완만한 오른쪽으로 내려섰다.

깊은 산중에 자라는 함박꽃나무(木蘭) 앙증맞은 꽃잎을 한참 살펴보며 내려간다. 함박꽃인 작약을 닮아 나무에 핀대서 함박꽃나무, 산목련이다.

길옆의 나뭇잎 따서 슬슬 장난기를 발동하는데 일행의 코끝에 쑥 대어준다.

“어휴, 냄새.”

“누린내다.”

확실히 이곳의 누리장나무 냄새는 진하다.

까마귀 울음 두고 어느덧 세수 터, 적멸보궁, 척번대, 기우단을 지나 청평사 뒤 물이 흐르는 바위에 앉아 있다. 손이 시리다.

“4시 반 배? 5시 배를 탈까요?”

우두커니 앉아 단풍나무, 참나무 그늘 아래 물소리, 하늘엔 구름, 자연의 품에 있으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가?

“건강 나이를 78세로 칠 때 오늘 이 곳에 있으니 하루 더 늘었습니다.”

“산속에 오면 우선 심리적으로 안정됩니다.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이 최적의 상태를 만들려는 항상성 유지가 이뤄져 면역력이 강화되니 건강할 수밖에 없어요. 부지런히 산에 다니십시오.”

그 사이 나는 모기에게 뜯겼다.

구멍바위.
구멍바위.
산목련.
산목련.

계곡이 끝나는 지점에 어릴적 논두렁, 못 주변을 돌아다니며 복조리와 여치 집을 만들던 식물이 눈에 띄는데 골풀이다.

우리나라 원산으로 초여름에 녹갈색 꽃이 피고 물가, 습지에 잘 자란다. 자리를 만들었고 등심초(燈心草)라 해서 줄기는 말려 약으로 썼다. 오줌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임증(淋證)에 생것을 끓여먹었다.

어느 절 할 것 없이 경내에 불두화·백당나무·나무수국, 꽃잎은 떨어지고 없다.

청평사엔 보물로 지정된 회전문인데 일행은 의아스러워 한다.

이것은 건축양식 변화를 알게 하는 문이다. 처마 부재들도 간결한데 주심포(柱心包)에서 짜임새가 밋밋한 익공(翼工) 양식으로 바뀐 것이다.

만물은 가고 다시 오니 사는 것과 죽는 것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인생일장춘몽(人生一場春夢)이라. 윤회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마음의 문이 이 절집의 회전문이다.

회전문.
회전문.

고려시대에 만들었다는 작은 연못 영지(影池) 앞을 지나는데 모두 발걸음이 무거워진 것 같다. 지금까지 4시간 반 걸렸으니 내일 삼악산 등산도 염려해야 할 일이다.

선착장 배 시간을 맞추기 위해 걸음을 빨리 옮긴다. 오후 5시 배, 어느덧 더위도 강바람에 한풀 꺾여 있었다. 떠나기 싫은 발길, 호수에 둥실 배 띄우고 음풍농월(吟風弄月)이 이곳 아니면 어디랴?

봉우리 5개가 줄지어 있다 해서 비로·보현·문수·관음·나한봉을 일컬어 오봉산(五峯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옛 문헌은 청평산(淸平山), 경운산(慶韻山)으로 나온다. 병으로 고생하던 중국의 공주가 청평사까지 오게 된다.

아홉 가지 소리가 들린다는 구성폭포에서 몸을 씻고 회전문으로 나오는 순간 벼락이 내리쳐 뱀을 떨치게 되자 탑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이산 정상에 종종 구렁이가 나오는 것일까?

사랑에 사무친 상사병은 예나 지금이나 현재 진행형이다. 소양호를 내려오면서 막국수 집을 찾으니 천전리(川田里)다. 샘밭골……. 봄봄 한 잔 뒤로하고 어둑해질 무렵 시내로 돌아왔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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