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토리]

이기영 논설주간

요즘 세간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돈다. 어느 하청업체 사장이 외국에 다녀오면서 선물용으로 고급 양주 한 병을 사왔다. 이 사장은 양주를 원청업체 핵심간부에 선물했다. 그러자 그 간부는 기업을 쥐락펴락하는 정부의 핵심 관계자에게 이를 주었고, 정부 관계자는 “잘 봐달라”며 회식 자리에서 언론사 편집국장에게 이를 선물했다. 편집국장 역시 그것을 아들의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선물했다. 결국 이 양주는 선생님의 아들 과외를 맡고 있는 대학생이 친구들과 마셨다는 이야기다.

이 황당한 양주 이야기는 우리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갑을(甲乙)문화’의 한 단면이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는 ‘갑’이 될 수 있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을’로 작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세상을 영원히 ‘갑’으로 생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갑’이 되면 인식이 달라지고 거만해진다. 왜 그러는 것일까. ‘을’때 당한 서러움을 ‘갑’이 돼서 복수라도 해보고 싶은 것인가.
 
갑과 을은 원래 계약서 편의상의 대리명(代理名)일 뿐이다. 주종(主從)이나 우열(優劣), 높낮이가 아니라 수평적 나열이다. 계약에 따라 권리와 의무를 행하고, 위반하면 책임을 지면 된다. 그러나 권력과 계급과 돈을 가진 갑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도를 넘은 횡포를 부리기 때문에 '을'이 서럽고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을’에서 해방되기 위해 저항을 시작한다. 남양유업 사태로 촉발된 ‘갑’의 횡포에 대한 ‘을’들의 저항이 드세다. 따지고 보면 말도 안 되는 갑을관계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추진한 ‘산업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승자독식의 천민자본주의가 그 때부터 태동되었고 극단적인 양극화를 불러온 신자유주의가 지금 갑을관계의 핵심이다.

일부 대기업들은 ‘협력업체’와의 계약서에 갑과 을이라는 표현을 바꾸겠다고 하지만 문구를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접근을 해야 하는 바, 본질은 제대로 된 경제민주화에 있고 제대로 된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노동권을 온전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남양유업 영업사원 역시 대리점에 대해서는 ‘갑’이지만 기업구조 내에서는 ‘을’은커녕 ‘병’이나 ‘정’도 되지 못하는 ‘피고용 노동자’일 뿐이다. 만일 남영유업에 제대로 된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상적이고 구조적으로 벌어졌을 것인지를 살펴 볼 일이다.

고용노동부 표준근로계약서만 보더라도 회사는 ‘갑’이고 근로자는 ‘을’로 표현돼 있다. 전근대적인 지배-피지배관계를 상징하는 갑을관계가 개별적인 노사관계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관행은 회사와 노동자로 바꾸어야 마땅하다. 노동자가 그나마 갑을 관계가 아닌 형식적으로나마 회사와 대등한 관계로 표현되는 것은 노동조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가입률이 10%에 불과한 현실에서는 90%의 노동자는 여전히 가장 밑바닥의 ‘을’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재벌대기업부터 비정규노동자들에게까지 층층이 내리누르는 다단계 착취구조-갑을관계를 바꾸기 위해서는 모든 노동자의 단결권이 온전하게 행사될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사회적 장치와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헌법에 명시된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이 하위 법률에 의해 제한되고 국제노동기구(ILO)의 시정권고조차 매번 무시되는 조건에서 노동권의 보장은 요원하며 갑을관계의 횡포는 문구를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 남양유업 사태는 특정 개인이나 기업의 일탈행위가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다. 현대백화점이 10일부터 3500여개 협력사와 체결하는 모든 거래 계약서에 ‘갑’과 ’을’이란 명칭을 쓰지 않기로 했다고 9일 밝혔다. ‘갑’은 백화점으로, ‘을’은 ‘협력사’로 대체한다. 다른 기업들도 이 문화에 동참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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