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2021년 2월 7일 일요일 오후 2시.

경북 봉화의 최북단 작은 마을에서 두꺼운 외투 없이 밖으로 나선다.

마당 가 유독 볕이 오래 머무는 자리에는 꽃다지와 쑥과 망초가 벌써 싹을 냈다.

밭둑에 바짝 붙어 자라는 물오리나무의 수꽃자루는 내 송곳니만큼 길어졌다.

산책길의 따뜻한 오후 볕이 춘분처럼 너그럽구나, 혼자 중얼거린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왜 계속 조급해지는 걸까.

이른 봄 남쪽으로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때문이다. 식물들이 태동을 시작한 것이다.

해는 기울고 오늘 남도의 한낮 기온이 15도를 넘었다는 소식에 내 마음은 자꾸만 남쪽으로 기운다.

2021년 2월 15일 월요일. 오전 8시. 눈이 온다.

어려서도 커서도 눈이 내리는 날은 하염없이 좋다.

하지만 눈이 쌓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오도 가도 못 하게 길을 자꾸만 지워서 나를 난처하게 만드니까.

눈을 치우다 말고, 남도 날씨 소식에 귀가 왕팽나무 겨울눈처럼 쫑긋, 하고 선다.

남녘은 연일 온화하고 어제와 오늘은 단비까지 내렸다고.

온기와 더불어 물기라니, 숲에서 익힌 나의 촉은 그곳의 꽃소식을 예측한다.

아니나 다를까 거기에 꽃들이 피었다는 소식이 남쪽과 서쪽의 바닷가 마을에서 속속 올라오고 있다. 

왕팽나무 겨울눈이 쫑긋 선 모양으로 부풀고 있다. 겨울눈 아래에는 작년에 잎이 붙어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그 엽흔은 관다발 자국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게 특징인데, 자세히 보면 웃는 얼굴 모양이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2021년 2월 17일 수요일. 드디어 내일 나는 올해 첫 개화를 알현할 것이다.

접선 장소는 두 곳.

첫 목적지는 거제도 최남단의 땅끝에 있는 ‘백서향’ 자생지.

내가 사는 곳에서 380km 떨어진 거리다.

그 다음 목적지는 전라북도 서해 변산반도에 있는 ‘변산바람꽃’ 자생지인데, 경유지 거제로부터 300km쯤 된다.

계획대로 그들과의 은밀한 회동에 모두 성공한 후 다시 봉화까지 회귀하려면 400km를 더 달려야 한다. 그러니까 도합 1,000km가 넘는 거리. 지도앱을 켜고 곰곰이 경로를 따져본다. 

2021년 2월 18일 목요일. 

04:00 호기롭게 집을 나서 내 SUV 차량에 올라 시동을 켠다.

계기판에는 바깥 온도가 영하 10도.

이곳에서 몇 해째 겨울을 나니 추위가 이제는 습관처럼 몸에 달라붙었다.

언 손에 입김을 불고 네비게이터에 목적지를 입력한다.

도착 예정 시간은 아침 8시.

어둠을 뚫고 봉화의 지방도를 빠져 나와 풍기IC 톨게이트를 통과한다.

중앙고속도로에 진입한 후 한참을 남진하다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길을 갈아타니 이내 부산과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를 해가 뜰 무렵에 건넌다.

가덕도와 저도가 이 대교 밑에 나란히 있네, 생각할 무렵 거제에 입도한다.

나는 이 섬의 동해안에 인접한 국도를 타고 내려가 최남단 땅끝마을에 적어도 8시 이전에 닿을 예정이다. 

07:50 첫 목적지에 때맞춰 도착했다.

단출한 조사배낭을 메고 카메라와 GPS를 챙겨 서둘러 숲에 든다.

햇살이 덜 번진 숲은 바깥보다 어두웠다.

난대림의 상록수와 양치식물이 내가 와 있는 곳이 남쪽이라는 걸 알려준다.

GPS에서 미리 입력해둔 백서향 자생지의 좌푯값을 확인한다.

그들이 꽃을 피우고 있을 법한 지점이 가까워졌다. 지금부터는 나의 촉을 켜야 할 때다. 백서향이 선호하는 환경을 머릿속으로 복원해낸다.

키가 큰 상록수가 우거져서 빛을 너무 많이 차단하는 저 자리는 아니지.

성격이 도도해서 쉽게 곁을 두지 않으니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어울려 자라지는 않을 거야.

활엽수가 드문드문 섞여 있어서 낙엽층이 두툼한 저곳 어딘가에…… 숲을 헤매는 사이 멀리서 참식나무 잎이 후두두 흔들린다.

바람이 불고 이내 향기가 난다.

그 향을 좇아 왼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리는데 나의 시선이 어깨를 넘어서는 찰나에 하얀 꽃을 단 자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정확하게 시야에 포착된다.

‘백서향’이 내 앞에서 꽃 핀 모습으로 존재하는 순간이다.

상서로운 향기가 난다는 뜻의 ‘서향’에 하얀 꽃이 핀다는 의미의 접두어가 붙은, 그 이름부터 이미 벌써 하얗게 향기로운 식물.

장미처럼 너무 익숙해져 버린 향도 아니고, 라일락이나 백합처럼 두텁고 짙은 향도 아니고, 프리지아처럼 지나치게 경쾌한 향도 아니고, 저렴한 비누나 값비싼 향수는 더더욱 아닌, 은은하게 감도는 균형 잡힌 어떤 꽃향기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내 이마를 짚어주던 담임선생님의 하얗고 가녀린 팔목에서 났었다.

모든 학년이 한 학급뿐인, 전교생 100명이 안 되던 나의 모교는 교대를 갓 졸업한 그녀가 부임한 첫 학교였다.

숱이 많은 상고머리에 칼라를 빳빳이 세운 하얀 셔츠와 검정색 바지정장이 근사하게 어울리는 여성은 이 세상에 그녀가 유일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녀가 폴폴 풍기던 그 상서롭던 냄새를 2월의 남도의 숲에서 드디어 찾았다. 백서향 향기다.

08:30 큰 어려움 없이 계획한 대로 백서향을 만났으니 운이 좋은 날이다.

여유를 갖고 그들 삶을 들여다본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백서향 분포. 따뜻한 지방을 좋아하는 남방계 식물이다. 난대림이 중부 이남에만 형성되는 한반도에서는 백서향의 분포가 더욱 제한된다. [사진=세계생물다양성정보기구 제공]

백서향은 우리나라 도서 지역을 비롯하여 일본 혼슈 이남과 중국 중남부 지역과 대만 등지에 자라는 난대성 상록수다.

난대림이 중부 이남의 일부 바닷가 지역에만 형성되는 한반도에서는 특히 그들 분포가 더 제한적인 편이다.

그래서 산림청에서는 백서향을 우리나라 희귀식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고 환경부에서는 이들의 해외 반출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최근 백서향 탐사 연구가 늘면서 제주에는 비교적 많은 개체가 곶자왈 지대를 은신처로 삼고 대체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남획으로 상당수가 사라져버리기 이전에는 거제를 비롯하여 도서지방의 해안가 숲에 지금보다 많은 백서향이 집단을 이루며 살았을 것이다.

아담한 크기의 상록수로 사철 내내 짙은 녹색 잎을 싱싱하게 달고 있어서 관엽식물로서의 가치가 빼어난데, 꽃이 귀한 겨울부터 이른 봄까지 새하얀 꽃을 피우고 향기마저 고우니 그들의 경제성을 알아챈 사람들 손에 아주 오래 전부터 대거 뽑혀 나간 것이다. 

백서향은  ‘상서로운 향기가 나는 흰꽃’이라는 뜻이다. 겨울부터 이른 봄 사이에 꽃이 피는 팥꽃나무과 상록수로 우리나라 도서 지역의 숲에 아주 드물게 자란다. 관상가치가 높아, 불법 채취로 많은 개체가 소실된 것으로 본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제주백서향  꽃이 크고 그 수가 많아서 마치 한 그루의 나무에 꽃다발이 우수수 달린 모양이다.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제공]

최근 식물분류학계에서는 제주의 백서향을 내륙의 난대림에서 자라는 백서향과 따로 구분해서 보는 견해도 있다.

백서향의 하얀 꽃은 얇고 긴 나팔모양인데, 그 가늘고 긴 통부에 털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제주의 백서향은 그 자리에 털이 없고 매끈하다는 점, 또 내륙의 것은 잎이 크고 넓은 반면에 제주의 것은 잎이 훨씬 좁다는 점, 내륙에서는 해안가에 인접해서 자라지만 제주의 백서향은 비교적 중산간 지방에 자란다는 점 등을 들며 2013년 식물분류학회지를 통해 ‘제주백서향’이 새로운 종으로 발표되었다.

이 견해는 DNA 유전자분석 결과가 추가로 제시되며 힘을 얻기도 했다.

제주와 거제와 일본 큐슈 지방의 백서향을 대상으로 DNA 유전자를 해독해 보니 거제와 일본의 백서향 집단은 같은 구조를 지녔으나 제주의 백서향은 이들과 완전히 구분된다는 것.

제주백서향의 고유성이 인정된다는 결과다.

하지만 이러한 집단의 고유성을 별개의 독립된 종으로 구분할지 말지에 대한 확신은 중국과 대만에 분포하는 백서향까지 아우른 확대 연구가 진행되어야 뚜렷해질 수 있다. 제주도 선흘리에 가면 제주도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제주백서향군락지가 있다. 

서향은 원산지인 중국에서 도입된 재배식물이다.

백서향과 달리 꽃은 분홍색. 꽃향기가 하도 짙어서 천리를 간다는 뜻에서 ‘천리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예로부터 널리 사랑받아 온 동양의 식물이다.

국내에는 고려 충숙왕 시대에 들어온 것으로 보며,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초기 꽃을 기르던 선비화가 강희안(1418~1464)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에서 서향을 두고 “나는 이 꽃을 얻어 매우 사랑하였다…… 꽃이 피자 향기가 수십 리까지 퍼졌다”고 적었다.

나는 거제의 난대림에서 혼자 생각했다. 서향보다는 백서향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되기로. 
9:30 그들 삶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았다.

사진을 남겨야 한다.

사진은 식물과 그들이 사는 환경을 가장 정확하게 기록하는 한 방법이다.

식물촬영용 카메라는 빛에 너무 민감하다. 하필이면 나의 피사체에 그늘이 드리운다.

난대림에서 쉽게 만나는 새덕이가 잎사귀를 자꾸만 백서향 쪽으로 흔들어대는 탓이다.

꼬리가 날렵한 바닷물고기 서대기(서대)를 꼭 빼닮은 잎 때문에 나무 이름도 ‘새덕이’다.

배낭에서 우산을 꺼낸다. 조사를 나갈 때 우산은 비와 햇볕을 가리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건 아니다. 오늘은 새덕이 그늘가림용이다. 

10:00 사진을 담아가도 된다는 허락을 백서향에게 얻고 더 늦기 전에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11:15 서해안으로 가려면 거제를 빠져 나와 통영을 거친 후에야 고속도로를 탈 수 있다. 통영 시내에 들러 미리 검색해둔 카페에서 핸드드림 커피 한잔과 스콘을 오늘 첫 끼로 먹는다. 

12:30 통영대전 간 고속도로를 타고 진주분기점까지 달린 후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남단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이 도로의 서쪽 끝에 닿은 후 호남고속도로로 옮겨 북진하다가 서해안고속도로를 만날 것이다. 그러면 부안에 도착한다. 

14:00 줄포IC 톨게이트를 빠져나온다. 목적지까지 30분 이내에 도착할 것이다. 거의 해마다 2월이면 명절 인사하러 가듯이 변산의 변산바람꽃 군락지를 방문한다. 덕분에 줄포에서 목적지까지는 눈을 감아도 훤한 길이라 아침보다는 조금 넉넉한 마음으로 그곳을 향한다. 

14:30 변산바람꽃이 정확하게 만개했다. 겨울 땅에 돋은 별처럼 보인다. 개체가 줄어든 걸까, 군락지가 작년보다 수척해진 모습이다. 자생지의 이곳저곳을 살피며 그들 삶을 염탐한다.

1993년 국내 식물분류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우리 식물이 발견된 것. 발견 당시만 해도 지구에서 유일한 자생지는 전북 부안군 변산면 세봉계곡이 전부였다.

그래서 얻은 이름이 변산바람꽃. 그 후로 마이산,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 등지에서도 그들의 군락지가 발견되어 2월이면 곳곳에서 놀라운 꽃밭을 만든다.

변산바람꽃은 그 수가 많지 않아 보호받고 있는 희귀식물이고, 지구라는 행성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는 한국의 고유종이다. 눈이 다 녹기도 전에 언 땅을 뚫고 꽃을 피우는 식물로, 얼음 속에서 핀다는 복수초와 순위를 다투며 꽃소식을 전한다.

학명의 첫 번째 단어인 속명 Eranthis는 ‘꽃’을 말하는 ‘anthis’ 앞에 ‘일찍’이라는 의미의 접두어 ‘Er’이 붙은 단어로, 일찍 피는 꽃이라는 뜻이다.

땅이 온전한 해빙을 허락하기도 전에 제 온기로 꽃을 피우고 서둘러 열매를 맺는 부지런함은 그들의 생존 무기가 되었다.

그 전략은 첫째, 온 에너지를 꽃에 투자하는 것. 꽃의 변형이다. 연약한 체구에 반해 유독 커 보이는 꽃에 정작 꽃잎이 없다.

하얗게 다소곳이 피어 꽃잎 행세를 하는 것은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다. 곤충의 눈에 잘 띌 수 있게 기왕이면 주변의 색과 대조되는 하얀색으로, 되도록이면 크고 넓적하게 만들어 꽃가루받이를 해줄 생물이 쉽게 찾아와서 편히 앉아 쉴 수 있도록 설계된 꽃받침 말이다.

실제 꽃잎이 나야 할 자리에는 개나리색 깔때기 모양의 젤리 같은 것이 오종종 박혀있다.

너무 작아서 언뜻 보면 둘레의 수술과 구분이 잘 안 되지만 곤충을 모으는 역할만은 확실하다. 가장자리에 꿀을 두르고 있어서 봄이 오기도 전에 활동하는 몇 안 되는 곤충을 전략적으로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두 번째 전략, 꽃 아래 잎처럼 생긴 기관을 추가로 만들어 꽃이 잉태에 성공할 때까지 씨앗이 될 밑씨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것.

그 보호기관의 식물학적 용어는 ‘포엽(苞葉)’이다.

인간이 소중한 생명을 감싸거나 값진 선물을 포장할 때 포(褓)나 포대기를 쓰듯이 식물은 자신의 꽃을 보호하기 위해 포(苞)라는 잎의 변형기관을 사용한다.

어려운 한자 대신 ‘꽃싸개라잎’이라고 불러도 좋을 거란 말을 나는 그들에게서 읽었다.

숲 안에 경쟁자가 적을 때 서둘러 꽃을 피워 꿀을 빚고 실패를 무릅쓸지라도 곤충을 유인하여 그들이 앉을 공간을 넉넉히 만드는 지혜와 용기.

이른 봄꽃구경을 하다말고 여태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마음에 나는 괜히 멋쩍어진다.

변산바람꽃은 개화한 지 몇 주 내에 모든 전술을 동원하여 열매를 맺고 다음 생명이 준비된 것을 점검한 후 숲이 초록을 채 입기도 전에 홀연히 모습을 감춘다.

2월 초순부터 꽃이 피는 변산바람꽃. 하얀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다. 곤충의 눈에 잘 띄어 수분매개에 성공하기 위한 전략이다. 꽃 아래에는 잎처럼 보이는 ‘꽃싸개잎’이라는 기관을 추가로 만들어 잉태에 성공할 때까지 씨앗이 될 꽃의 밑씨를 완벽하게 보호한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그들을 살피는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변산바람꽃은 주변의 이야기를 넌지시 내게 해 준다

‘Eranthis’는 우리말로‘너도바람꽃속’으로, 여기에 속하는 식물은 그를 포함하여 전 세계에 10여 종 정도 되며 그중 자신과 너도바람꽃만 우리나라에서 자란다고.

그 둘이 남매지간이라면, 그들과 사촌쯤 되는 ‘바람꽃속’식물도 있다며 그 유명한 ‘아네모네(Anemone)’이야기를 꺼낸다.

꽃이 좋아서 수많은 품종이 개발되어 전 세계적으로 아네모네 꽃시장은 제법 성황을 이룬다.

꽃집이나 화단의 ‘아네모네’는 알고 우리 이름 ‘바람꽃’을 모른다면 한반도 도처에 자라는 바람꽃 식물들이 서운해 할 지도 모른다고, 바람꽃과 꿩의바람꽃과 홀아비바람꽃을 비롯한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바람꽃 이름을 줄줄이 호명한다. 

15:10 변산반도에서 지금 출발해야 저녁 8시 전에 귀가할 수 있다. 서해의 땅끝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경북 봉화의 최북단 마을까지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한다. 

18:30 영주 IC를 빠져나와 봉화방면 36번 국도에 진입한다. 해가 길어져서 아직도 낙조가 불콰하다. 며칠 전 내린 눈이 소백산 꼭대기를 하얗게 덮고 있다. 

19:40 강행군을 마치고 무사히 회귀점에 도착한다. 오늘 만난 봄꽃이 마치 먼 나라의 일처럼 아득해져서 나는 무언가를 불러내 본다.

존경하는 뇌과학자 올리버색스가 노년에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나의 생애'라는 글에 이렇게 썼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이른 봄꽃을 시작으로 식물의 개화와 개엽의 연속이 숲을 차츰 초록으로 채울 것이다.

꽃을 틔우고 꿀을 빚고 열매의 육즙을 채워 씨앗을 지키는 식물의 생애, 그것을 기록하는 나의 생애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특권이자 모험”이다.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서 “이 아름다운 행성”을 오늘도 내일도 내내 조화롭게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여장을 푼다. 

21:00 밤하늘 남쪽에 등장한 오리온자리가 총총 핀 남도의 봄꽃 같다. 오래지 않아 꽃들의 북진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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