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경칩과 춘분의 중간쯤 되는 날 정오에 외씨버선길을 걷는다.

청송에서 시작해서 영양과 봉화를 거쳐 영월에서 끝나는 이 길은 전체를 이은 모양이 외씨버선을 닮았다.

길은 시인 조지훈의 고향인 영양을 사뿐히 지나가기 때문에 그의 시 '승무'에 등장하는 ‘외씨버선’을 이름으로 얻은 것도 같다.

전체 13코스 중 내가 걷는 ‘외씨버선9길’은 소나무가 순림으로 펼쳐진 춘양목솔향기길이다. 

식물은 태양이 지구를 비추는 시간을 동물보다 더 빨리 체감한다.

숲길에 만난 나무의 겨울눈이 전보다 부풀었다. 밤보다 낮이 길어질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선생님, 저는 겨울눈이 나무의 심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생명이 나무의 뿌리 그 깊은 곳에서부터 쉼 없이 박동하고 있으니까요. 뼈와 근육과 혈관을 켜켜이 쌓아 심부를 단단히 지키는 저 유기적 결합체가 심장이 아니라면 무어라 말해야 하나요. 

나무의 눈이라는 것은 분열하고 발달하여 장차 잎이나 꽃이 되는, 한 식물체의 기원과 같은 기관이다.

그래서 식물의 눈을 말하는 한자 ‘아(芽)’는 ‘시초’나 ‘시작’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잎’이라는 삶으로 뚜벅뚜벅 나아갈 눈을 ‘잎눈’ 또는 ‘엽아(葉芽)라’ 말하고 꽃의 길을 사뿐사뿐 걸어갈 눈을 ‘꽃눈’ 또는 ‘화아(花芽)’라고 한다.

꽃을 품은 꽃눈이 잎눈보다 훨씬 크다.

이것은 잎보다 꽃이 퍽이나 복잡한 구조를 지녔다는 사실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꽃눈을 반듯하게 잘라서 그 단면을 보면 이미 꽃의 형태가 차곡차곡 접혀서 그 안에 다 들어 있다. 

마로니에(가시칠엽수) 꽃눈 단면의 실제 사진과 꽃 세밀화. 겨울꽃눈 안에 이미 꽃의 형태가 갖추어져 있다. [사진=꽃눈단면 ohioplants.org/꽃세밀화 위키피디아]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지는 춘분 무렵은 겨울눈을 관찰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

개화가 빨라서 올되기로 유명한 올괴불나무는 목하 꽃눈을 틔울 참이다.

귀룽나무는 다른 나무의 겨울눈들 다 자고 있을 때부터 새순을 부지런히 만들어 이미 연둣빛을 내다 걸고 있다.

만년필 촉만큼 뾰족해진 당단풍나무와 회잎나무의 겨울눈은 양면색종이로 접은 돛단배처럼 배색이 절묘하다.

겨울눈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길을 걷다가 나보다 훨씬 더 일찍 이들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관찰하고 기록한 인물을 떠올린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자연보호를 이끈 환경운동가 존 뮤어(1838-1914).

그는 나를 숲으로 안내한 스승과도 같은 존재다.

자연의 개발과 잠식이 인류 발전의 원천과도 같다고 여기던 19세기에 존 뮤어는 생각과 글과 행동으로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을 개발구역 곳곳에 식수하듯이 심었다.

광활하고 깊고 심오한 자연 앞에서 우문과도 같은 의문이 내 안에서 세차게 일 때면 본 적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그를 아스라이 찾게 된다.

그러니까 선생님, 겨울눈은 나무에게 어떤 존재인 건가요.

눈은 혹독한 환경을 무사히 견디기 위해 나무가 선택한 생존전략이다.

겨울이라는 고비를 아무 탈 없이 통과하기 위하여 나무는 일찍부터 눈을 만드는 일에 힘을 쏟는다.

겨울눈을 안전하게 만들고 나서야 바야흐로 낙엽의 시절에 든다는 사실은 보통의 곁눈질로는 절대 확인할 수 없다.

꽃 지고 열매도 다 맺고 난 이후의 시간까지 유심히 살펴야 알 수 있다. 

눈은 ‘눈비늘(아린, 芽鱗)’이라는 겹겹의 장치로 보호받는다.

눈비늘은 잎과 그 기원이 같다. 잎을 만들 때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를 나무는 최대한 능률적으로 사용하고 그 일부를 비축해 두었다가 잎의 변형기관인 눈비늘을 만드는 일에 모두 짜서 쓴다.

눈비늘은 생명과 직결되는 특수한 기관이기 때문에 보통의 잎보다 나무 자신에게는 더 든든한 존재다.

눈을 가장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하여 눈비늘은 잎보다 매우 질기고 야무지게 설계되어 있다.

그 재질은 잎과 나무껍질의 중간 정도로 제법 딱딱한 편이다. 외부의 극한 환경을 차단하기 위하여 표면에는 왁스를 입혀서 방수 기능도 갖추었다.

겨우내 닥칠 추위와 폭설과 건조한 바람과 미지의 감염으로부터 나무를 반드시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무장한 나무의 눈.

그래서 덜렁쇠 같은 저는 그 정치한 생명체의 모습을 유년에 당신을 응시하던 선망의 눈을 하고서 그지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비늘이 가지런히 겹쳐있는 모습이 우리가 보는 겨울눈의 전형적인 형태다.

그 모양은 기왓장을 고르게 쌓은 듯이 여러 장이 포개진 모양이 있는가 하면 족집게가 맞물린 마냥 눈비늘 두 장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도 있다.

식물학적인 한자어로 전자는 복와상(覆瓦狀), 후자는 섭합상(鑷合狀). 모두 일본식 한자 표기다.

수종에 따라서 아린이 없이 아예 겨울눈을 드러내 놓기도 한다.

이를 나아(裸芽)라고 하는데, 나무 스스로가 눈비늘을 만드는 일이 생산적이지 않다고 판단할 경우 털이 그 역할을 대신하도록 한다. 

당단풍나무(좌)와 회잎나무(우)의 복와상 겨울눈. 눈비늘 색은 양면색종이로 접은 돛단배처럼 배색이 절묘하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단풍나무류나 팽나무류처럼 기왓장 모양을 한 겨울눈이 대체로 우리 주변에서 눈에 익은 편이다.

겹겹의 복와상의 눈비늘은 색깔도 다채롭다.

이보다 더 친숙한 것이 백목련 동아다.

꽃눈이 먹에 젖은 붓을 닮았다 하여 목련은 목필(木筆)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두 장의 눈비늘이 맞대어 빚은 붓의 형상으로 섭합(鑷合)의 겨울눈이다. 여기에 속하는 대표 수종 가운데 들메나무가 있다.

들메나무와 물들메나무는 삵과 고양이의 관계처럼 같은 혈통의 서로 다른 종으로 생김새가 닮아서 헷갈리기 쉽다.

들메나무는 경북의 가야산을 남방한계지로 긋고 그 이북에 자라는 북방계 식물이고 물들메나무는 그 한계선으로부터 이남에만 자라는 우리나라 고유종이다.

마치 삵과 고양이가 사는 장소가 서로 다른 것처럼.

이처럼 사는 환경은 뚜렷하게 구분이 되지만 그들 줄기와 잎과 꽃의 형태는 너무 닮아서 차이가 선명하지 않다. 이를 구분해주는 것이 겨울눈이다.

들메나무는 아린 두 장이 감싸고 있는 섭합의 겨울눈을, 물들메나무는 아린이 한 장도 없이 나출된 나아를 가졌다는 것.

이렇게 종간을 구분 해 주는 형태적 특징을 식물학 용어로 ‘식별형질(diagnostic characters)’이라고 한다.

식물학자는 모든 식물을 계통에 따라 정확하게 ‘식별’하는 그 ‘형질’을 찾기 위해 산과 들과 강과 랩에서 날마다 고투한다. 

들메나무(좌)와 물들메나무(우)의 섭합상 겨울눈. 들메나무는 몇 겹의 눈비늘이 겨울눈을 감싸고 있지만, 물들메나무는 눈비늘 없이 봉송한 털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개발로 하나둘 떠나간 자연의 빈자리를 살뜰히 살피고 더는 아프지 않게 메꾸려고 선생님은 부단히 애를 쓰셨습니다. 살아서 당신의 활동은 ‘자연을 지켜내기 위한 무분별한 개발의 제한’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국립공원’이 탄생하게 되었던 거지요. 오늘날 지구는 국립공원이라는 둘레 안에서 수많은 나무와 드넓은 숲과 산이 보호받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일찍부터 그러한 자취를 더듬고 좇는 일을 공부하고 익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떠난 자리에 남은 흔적을 더 주의 깊게 살필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 것도 같습니다.

겨울눈 바짝 밑에는 얼마 전까지 달려있던 잎의 흔적이 남는다.

이를 ‘엽흔(葉痕)’ 또는 ‘잎자국’이라고 한다.

잎과 줄기를 연결하는 고리가 ‘잎자루’니까 엄밀히 말하면 ‘잎자루’가 떨어진 자국이다.

사시나무를 포함한 포플러류는 잎자루가 유독 길어서 얕은 바람에도 ‘사시나무 떨 듯이’ 잎을 나부끼게 된다.

그러니까 낙엽이라는 것은 나무가 줄기에서 잎을 자루째 떼어내는 일.

잎자루는 나무 몸체의 일부이므로 떨어져 나간 줄기에는 상처가 생기기 마련이다. 찢겨나간 세포들을 봉합하는 일련의 회복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렇게 코르크를 만들어 생채기 부위를 덮는 방식으로 나무는 외부로부터의 감염을 막는다.

코르크딱지 덕분에 잎이 떨어져 나간 자리는 차츰 아물게 된다.

그 상흔이 잎자국(엽흔)인 것이고, 나는 그 잎자국 모양을 살펴서 나무를 식별한다. 엽흔이 웃는 얼굴을 한 팽나무류, 그중에서도 내 눈에 제일 오래 담아두고 싶은 좀풍게나무.

잎자국은 수종에 따라 그 모양도 다양한 편이다.

생물체가 잘린 부위에 혈관의 단면이 드러나듯이 잎이 떨어진 자리에는 관다발이 배열된 모양이 고스란히 비치기 때문이다.

좀풍게나무 겨울눈과 엽흔. 팽나무류는 겨울눈 아래 엽흔이 웃는 얼굴 모양을 한 것이 특징이다. 관다발 배열의 단면이 눈과 입이 된 것. 그중에서도 좀풍게나무는 겨울눈 고깔비니를 예쁘게 쓰고 웃는 모습이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선생님의 존재를 처음 알려준 이는 나의 아버지였습니다. 열 살 때였던가요. 당신의 삶이 소개된 책을 그이는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내게 읽어주었습니다. 나무를 정성껏 돌보는 법도 그분께 소개받았습니다. 나무의 정아를 다치지 않게 해야지 무럭무럭 자랄 수 있다며 숲을 지키기 위해선 나무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그이는 말씀하셨어요. 정아(頂芽)라는 게 무언지 몰라서 물끄러미 소나무의 푸른 바늘잎만 건너다보고 있을 때 아버지는 가만히 다가와 내 오른손을 포개어 잡고서 검지를 세워 이끈 다음 나뭇가지의 가장 끝 지점을 짚고 또 다른 가지의 끝을 이어 짚으며 포물선을 만들었지요. 그때의 나는 소나무의 초록의 끝들이 모인 선을 정아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겨울눈은 그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이 붙는다.

가장 꼭대기에 부푸는 끝눈(정아,頂芽), 가지의 측면에서 쏙하고 나오는‘곁눈(측아, 側芽)’, 잎겨드랑이에 돋는 ‘겨드랑이눈(액아, 腋芽)’. 눈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꽃눈이 되기도 하고 잎눈이 되기도 하므로 그들이 커가는 과정을 놓치지 않아야 어떤 눈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빵긋하게 부푼 꽃눈인지, 홀쭉하게 내민 잎눈인지. 

끝눈이 그 옆에 바짝 붙어 자라는 곁눈의 성장을 견제하도록 조정하는 것은 나무의 본능이다.

맏이 하나 잘 키워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기대가 둘째와 셋째의 대학진학 포기로 이어졌던 것처럼, 나무는 발생의 원천이 머무는 가지의 끝눈만을 간택하고 곁눈의 생장은 의도적으로 억제한다.

옥신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해서 끝눈 주변의 곁눈이 커지는 것을 막아내는 서슬푸른 생존 본능.

끝눈 근처의 곁눈은 옥신의 신호를 받고 생장이 멈추는 휴면에 들어가지만, 반대로 끝눈에서 멀리 떨어진 곁눈일수록 자람의 혜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둘째와 셋째의 포기와 양보로 대학에 가는 수혜를 막내가 입는 것과 같은 논리다. 이처럼 나무의 끝눈이 가진 신비한 권력을 식물학에서는 ‘정단우세(apical dominance)’라고 쓴다.

이로써 나무는 삼각이라는 균형을 얻는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떠올리면 알 수 있듯이 나무의 형상은 흔히 세 개의 끝을 가진 삼각꼴이다.

가지 끝에서 합성된 옥신은 가지의 아래쪽으로 이동하며 점차 그 농도가 줄어들기 때문에 끝눈에서 멀면 멀수록 곁눈은 상대적으로 생장을 먼저 시작하게 된다는 것.

정단우세는 나무가 삼각의 모양을 갖춤으로써 태양이 보낸 빛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진화된 자연 적응 현상의 하나다. 

그러면 선생님, 정아라는 끝눈이 돌연 사라지면요? 온 힘을 바쳤는데 정작 그 대상이 없어져 버린 나무의 삶은요? 

똑똑 따기 쉬운 위치에 놓인 나무의 끝눈을 동물들은 좋아한다.

이른 봄에 입맛을 다실 먹이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거센 바람과 폭우도 뾰족하게 솟은 끝눈을 없앨 수 있다. 이를 대비하여 자연은 나무에게 위급할 경우 곁눈을 깨우는 능력을 주었다.

어떤 이유에서 끝눈이 제거될 때, 곁눈은 휴면에서 깨어 잎을 내고 꽃을 피워 이내 끝눈의 자리를 대신해준다.

과수원을 생각해보라. 농부의 손이 닿을 수 있는 높이만큼만 자라도록 관리되는 과수원의 나무는 끝눈을 제거하여 곁눈의 생장을 촉진한 결과다.

위로 자랄 힘을 차단하여 가지의 양 끝으로 퍼뜨리는 원리다.

수박과 오이와 참외와 같은 박과 채소의 끝눈을 잘라주면 곁눈이 왕성하게 자라는데, 이로써 작물은 더 많은 열매를 달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곁눈은 생장을 멈춘 것이 아니라 끝눈의 생장을 신중하게 지켜보며 자신의 발생을 보류한 상태인 것이다.

끝눈이 여력을 다했다는 것을 판단할 때 비로소 나무는 곁눈을 틔운다.

선생님에게서 발원한 보전 활동은 가지를 내고 잎과 꽃을 피우며 무성히 자라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구 곳곳에서 다양한 보호 활동으로 뻗어나가 수많은 끝눈들을 맺으면서요.

시에라산맥에는 ‘존뮤어트레일’이 있습니다.

그곳을 지켜낸 당신을 기리는 산악로지요.

지금은 세계적으로 너무 유명해져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뽑혀야만 걸을 수 있는 길이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제가 걷고 있는 이 길 또한 당신이 지켜낸 숱한 갈래 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개발의 손길에서 벗어난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제가 선 곳에서 서쪽으로 난 갈림길로 접어들면 소백산자락길로 이어집니다.

소백산국립공원의 둘레를 걸을 수 있는 길이지요. 선생님과 함께 걷는 마음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아름다운 지구는 인간의 개발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알고 계시겠지요.

끝눈의 부재가 곁눈의 태동을 이끄는 나무의 삶처럼 연약한 생명을 보살피고 지키는 일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임한 것은 아닌지요. 

선생님, 봄이 오고 있는 숲길에서 저는 자꾸만 겨울눈은 나무의 심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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