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스토리]

이기영 논설주간

대한민국 재벌은 1960년 이래로 박정희 정권부터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정부는 외국으로부터 도입한 자본과 기술을 특정 재벌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지원했고, 그러한 배타적인 금융지원, 대규모사업인허가지원 등을 통해 재벌들은 사업규모를 늘리고, 국내 경제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많은 이윤을 축적할 수 있었다.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이라는 결과는 정부의 특혜뿐만 아니라 무수한 노동자들의 노동과 소비자들의 소비 등 국민경제 전반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재벌은 통제되지 아니한 상태로 과잉차입을 통항 과잉, 중복투자를 계속했고 그 결과가 1997년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 IMF사태였다.

외환위기 때 재벌들의 부실을 해소하기 위해 수십조 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투입했지만, 재벌은 노무현 정부까지도 자본의 투자파업을 무기로 친재벌적인 정책을 계속 유지하도록 굴복시켰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이 자본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것이 그 단면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노골적인 친재벌정책을 통해 재벌에 대한 규제완화와 지원을 강화했고, 그 결과 재벌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은 더욱 심화됐다. 4대 재벌의 매출액은 국내총생산의 50%를 넘고, 최근 4년간 재벌 계열사는 60%가 넘게 늘었다. 이렇게 늘어난 재벌 계열사는 재벌 3세, 4세를 위한 편법적인 증여의 수단이 돼, 중소기업과 중소상인들의 사업분야인 비제조업, 서비스업으로 발을 뻗었고, 그 결과 중소기업과 중소상인은 궁핍해졌다.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정책의 결과 재벌 등 대기업과 수출기업의 호황으로 수치상의 성장을 기록하긴 했다. 그러나 중소기업과 중소상인들은 전례없는 불황과 경영위기를 겪었으며, 근로자의 고용의 질이 악화되었고, 고용 또한 늘지 않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양극화는 대기업에 속하지 못한 근로자나 자영업자들의 소득에게 영향을 미쳐 사회적 양극화의 주요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재벌의 역사이고 재벌이 만들어 낸 대한민국의 경제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대선, 그리고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재벌개혁이 곧 경제민주화”라는 등식이 될 만큼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재벌의 지배구조는 지배하는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제적인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재벌은 불과 1~2%에 불과한 지분을 가지고 계열사를 통한 순환출자 등의 방법을 통해 재벌에 속한 기업 모두의 경영을 100% 지배하고 있지만, 경영의 잘못으로 인해 해당 기업에 발생한 손해에 대하여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회사나 주주전체의 이익보다는 재벌 일가의 사적인 이익관계에 따라서 기업의 주요한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문제점이 있고, 재벌일가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경영이 사실상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은 하도급단가 인하 등 중소기업의 존립을 위협하는 바탕 위에 서 있으며,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길을 막고 있어 국민경제의 지속가능한 선순환 구조를 깨뜨리고 있다.

셋째, 재벌일가로 집중된 과도한 경제권력은 단순히 경제 분야의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 사회, 문화 등 전영역에 걸친 영향력 행사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우선 재벌은 막대한 자금과 인맥을 동원한 로비를 통해 정부 정책마저 좌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공정거래위위원회, 국세청, 검찰, 사법부까지 대규모 로펌이나 소속 임원들을 통한 로비, 퇴임 후 뒤봐주기 등을 통하여 우호세력으로 포섭한 상태이다.

과거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들이 회식에서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불러 회식비 200만원을 결제시킨 일이나, 4대강 사업에서의 대형 건설사들이 담합을 통해 국고 1조원 이상을 추가로 챙겼음에도 공정거래위원회는 담합을 인지한 후 2년8개월이나 지나서 정권말이 되자 비로소 과징금을 부과한 일이나, 재벌들의 경우 횡령 배임의 액수가 천문학적임에도 불구하고 집행유예로 풀려 나오고, 기다렸다는 듯이 특별사면을 통해 경영 일선에 복귀하는 사례 등이 바로 법치주의 위기의 한 단면이다.

재벌의 언론 장악 역시 심각하다. 4대 재벌은 신문사, 방송사 광고비 총액의 20%를 차지하고, 재벌의 경제연구소가 쏟아 내는 친재벌적 보고서는 재벌에 장악된 언론을 통해 여론의 주류를 형성해 내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의 경제력 집중 문제보다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의 문제의식을 갖고 재벌의 잘못된 경영으로 발생한 손해를 배상받는 방식의 소액주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재벌의 편법상속 문제 공론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둔 바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재벌의 권력과 행태는 실제로 개선된 것이 없다는 반성도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재벌을 현실로 존재하는 하나의 기업집단으로 보고, 그 기업집단에 대한 합리적인 규율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독일식 기업집단법의 제정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재벌개혁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개혁이라는 것 자체가 반드시 기득권자의 반발을 유발한다. 작금의 ‘경제민주화’ 역시 이런 운명에 놓여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과정과 당선인 시절, 그리고 대통령에 취임해 여태까지 경제민주화를 언급하면서 단 한차례도 ‘재벌’이라는 용어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단순히 ‘대기업’이라고 빠져 나갔을 뿐이다. 대기업의 부당한 일감 몰아주기나,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만 외쳤을 뿐, 경제민주화의 핵심 분모인 “재벌을 개혁하겠다”는 말을 직접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따라서 현 정부의 경제민주화의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다.

초등학생도 알다시피, 대기업이란 소기업 중기업 보다 덩치가 큰 규모의 기업이 대기업이다. 대기업이라고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서 사람들은 “대기업을 개혁하자”고 외치지 않는다. 물론 최근 ‘갑을 관계’ 논란처럼 규모가 크고 시장 지배력이 강한 대기업이 중소기업에게 ‘갑의 횡포’를 부릴 수 있다. 이 역시 경제민주화의 하나로써 ‘공정한 시장경제의 규칙’을 적용해 시정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재벌의 문제는 다르다. 재벌은 정부가 나선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오직 방법은 하나다. 개혁 아니면 해체다.

재벌 세습과 경제력 집중의 근원적 모순이 현재 진행형이라면, 박근혜 정부가 외치는 경제민주화는 국민에 대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편안한 집권을 위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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