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진에서 바라본 삼학도와 목포항.
목포진에서 바라본 삼학도와 목포항.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1. <목포의 눈물>은 항일 애국 노래

목포 출신 불세출의 여가수 이난영은 <목포는 항구다(1942)>라고 노래했다.

이난영이 불과 20세에 취입한 노래 <목포의 눈물(1935)>은 트롯의 대명사가 될 만큼 빅히트를 쳤다. 이 노래를 모르면 한국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될 정도다.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오케레코드 음반사에서 공모한 ‘제1회 향토찬가’ 공모전에 당선된 가사로 만든 노래다.

목포 출신 문일석이 쓴 가사가 1등으로 당선되었고, <타향살이>를 작곡한 손목인이 곡을 붙여 신예 이난영이 노래했다. 이난영이 목포 출신이기에 곡을 주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잘 아는 가사지만 3절까지 적는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눈물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이 노래는 별 생각없이 들으면 한 여자의 한 많은 사랑 타령처럼 들린다. 목포 항구에서 새악씨, 즉 젊은 여자는 남자와 이별했다.

그 남자는 고깃배를 탔을 수도 있고, 상선을 타고 먼 바다를 돌아다닐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남자는 오지 않고, 여자는 상처를 달래며 절개를 지킨다는 사연이다.

더 간단히 하면 한 여자와 남자는 목포에서 사랑을 했고, 남자는 떠났고 여자는 기다리면서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뻔한 신파다.

1930, 40년대 유행가 가사의 전형이면서 수동적 여성상이 그려져 있어, 남존여비(男尊女卑)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노래 가사에는 뻔하지 않은 내용이 숨겨져 있다. 삼학도, 목포, 노적봉, 유달산, 영산강 등의 지명으로 인해 이 노래는 목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삼백년은 도대체 무엇인가?

삼백년이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놀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긴 세월이다.

이 삼백년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일을 지칭한다고 보아야 한다. 삼백년과 관련된 가사 속의 장소는 노적봉이다.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의 전설과 관련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장군은 왜적을 속이기 위해 유달산 아래 바위에 짚과 섶을 덮어 조선군의 군량미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였고, 그것을 본 왜적이 겁을 먹고 도망쳤다 한다. 그때가 바로 명량대첩(1597) 직후이니, 이 노래 가사를 지은 시점에서 약 삼백년 전이다.

이렇게 보면 이 가사는 정유재란 때 장군에게 당한 왜군의 삼백년 원한일 수도 있고, 반대로 당시 왜적의 침략에 당한 수많은 백성의 원한일 수도 있다.

당한 자가 누구든 이 노래 가사의 2절에 나오는 님은 이순신 장군이 명확해 보인다.[이 생각의 출발점은 최성환이 지은 『목포』(대한민국 도슨트3, 21세기북스)다.

이 책은 목포 여행을 깊게 하기 위한 필독서라 할 만하다.

최성환에 의하면 이 부분의 가사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음반사는 가사를 ‘삼백년 원앙풍’으로 바꾸어 인쇄했다고 한다. 위의 책, 204p]

<목포의 눈물> 가사는 이렇게 신파와 항일 저항 의식이 혼재된 특이한 내용이다. 이 가사를 쓴 문일석은 목포지방의 문사(文士)로 이후 몇 편의 대중가요 가사를 더 썼지만 아쉽게도 1940년 경 요절했다(『목포시사』).

유달산 중턱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 노래비인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서 있다. 1969년 목포시민 박오주 씨가 음반을 팔아 번 돈으로 기금을 마련해 세웠다고 한다.

2. 목포진과 도로 원점

1897년 목포항이 개항하면서 목포는 비로소 항구도시로 출발했다.

그전까지 목포는 무안현에 소속된 유달봉수대 옆의 진(津), 즉 수군기지였다. 목포진은 영산강의 끝에 위치하며 넓은 바다로 나가는 바로 그 길목에 있다.

목포진 바로 앞에는 삼학도가 있어 파도를 막아주고 영산강 하구 쪽에는 고하도가 있다. 북풍은 유달산이 막아준다.

목포진 앞바다만 방비하면 해로로 접근하는 적은 영산강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목포진이 한반도 서남쪽의 조운(漕運)과 국방의 요충지였다는 뜻이다.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장군은 명량에서 적을 대파한 후 후퇴하여 서남해를 오락가락하다가 목포진 앞 고하도에 진을 쳤다(지금은 유달산에서 고하도까지 케이블카가 놓여 있다).

목포항이 개항하기 꼭 300년 전인 1597년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곳에 통제영을 두면서 수군을 재정비하고, 약 40여 척의 판옥선을 건조했다. 기울어진 수군 전력(戰力)을 사력을 다해 키웠다.

이후 어느 정도 몸집이 불자 장군은 완도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겼다. 고금도에서 장군은 마지막 전투 장소인 노량으로 출전했다.

야트막한 돌산을 오르면 복원된 목포진 객사를 볼 수 있다. 천천히 올라도 10분이면 충분히 오를 수 있는 나지막한 돌산 위에는 전망대가 있다. 이 전망대에 서면 유달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삼학도와 목포항을 비롯 목포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조선조에도 여기서 영산강을 드나드는 배를 관측했다. 목포진 바로 아래에는 항만이어서 목포진의 책임자인 목포만호는 병선을 지휘 관리하면서 영산강을 방어했다. 현재의 목포진 바로 아래가 원래의 목포항 자리였다.

목포진 객사.
목포진 객사.

1900년 일본은 노적봉 아래쪽 목포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영사관을 지었다.

 상당히 정성들여 지은 이 건물은 1910년부터는 목포부청, 해방 이후 1974년까지는 목포시청으로 사용했다. 이후 목포시립도서관 등으로 사용하다가 2014년부터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897년 개항하자마자 일본은 먼 미래를 보고 영사관 건물을 지었다는 말이 된다. 그 미래가 바로 조선에 대한 침탈이고 만주사변이고 대동아전쟁이고 태평양전쟁이며,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의 원자탄 피폭이다.

몇몇 사무라이와 호전주의자들의 철부지 야욕이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다. 그럼에도 그들의 호전성은 여전하다. 숨기고 있을 뿐이다.

목포는 간척의 도시이기도 하다. 목포역을 비롯하여 목포역 주변 상당 부분이 100여 년 전부터의 간척을 통해 조성되었다.

호남선의 종착역인 목포역은 제방 위에 신설되었고(1913), 다음 해 호남선이 개통되었다. 이후 간척을 통해 항만 시설도 확충되었다.

철도와 항만 시설이 완비되자 일제는 본격적으로 쌀과 면화 등 호남의 물자를 일본으로 수송했다.

목포는 군산과 함께 호남 최대의 물류 중심지가 되었고, 돈과 사람이 모여들었다. 1930년대 목포는 전국 6대 도시 중의 하나가 될 정도로 번성한다.

항만과 철도 외에 일제는 효율적인 식민지 침탈을 위해 육상도로망을 근대화한다. 그게 바로 신작로(新作路)다. 간척, 철도공사, 도로공사에는 조선의 값싼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도로법」을 제정하여 조선의 도로를 1등 도로, 2등 도로, 3등 도로, 등외도로로 나누고 정비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조선도로령」을 제정, 시행하였고 이때 국도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아래는 당시 「조선도로령」 제 13조다.

제13조 국도의 노선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노선에 대하여 조선총독이 인정한다.

1. 경성부에서 도청소재지ㆍ사단사령부소재지ㆍ여단사령부소재지ㆍ요새사령부소재지ㆍ요항부소재지 또는 개항에 달하는 노선

2. 도청소재지ㆍ개항 또는 추요지ㆍ비행장 또는 철도역 상호간을 연결하는 노선

3. 군사상 중요노선

4. 경제상 중요노선

이 조항을 보면 일제가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면서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 얼마나 골몰했던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정해진 국도 1호가 경성-부산선, 국도 2호가 경성-신의주선, 국도 3호가 경성-목포선, 국도 4호가 경성-웅기(함경북도)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십자 모양의 도로 체계를 만들고 각 지선을 연결한 것이다. 이러한 체계는 1971년 ‘일반국도 노선지정령’에 따라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도 체계로 바뀐다.

국도 1, 2호선 기점 기념비.
국도 1, 2호선 기점 기념비.

국도 체계의 현장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구일본영사관, 즉 목포근대역사관 바로 앞에 있는 <국도 1,2호선 기점 기념비>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도 체계는 국토를 바둑판처럼 격자형식으로 나누어 국토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도로에는 홀수번호, 횡단하는 도로에는 짝수번호를 붙인다.

국도 1호와 2호가 바로 목포에서 시작한다.

국도 1호는 목포에서 정읍, 천안을 거쳐 서울을 지나 신의주에 이르는 서쪽 종단 노선이다.

3호는 남해군에서 시작하여 북한의 초산까지, 5호는 마산에서 중강진까지, 7호는 부산에서 동해안을 따라가다가 함경도 온성에 이른다. 2호는 목포(신안)에서 남해안을 따라가다가 부산까지 간다.

국도의 시작은 일제가 했지만 우리 체계에 맞게 재설계를 해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3. 목포는 맛있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은 1942년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를 불러 히트시켰다. 목포는 항구임에 틀림없다.

그 점은 이난영의 노래가 아니라 목포의 여러 음식점이나 상점들의 간판을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다.

해남집, 완도집, 진도집, 지도집, 하의도집 등 목포의 간판을 보면 신안군의 여러 섬을 비롯 온통 인근 바다의 섬 이름이 총집합했다.

목포가 항구라서, 목포에 기차역이 있어서, 목포에 학교와 병원이 있어서 목포로 모여들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목포에 연인이 있어서 목포로 왔다. 사람이 모이니 여러 섬의 음식재료와 음식 솜씨가 모여든다.

때문에 목포는 남도 여러 섬 음식의 각축장이며 섬 미각의 집결지다. 대표적으로 민어가 그렇다. 전라남도 각 섬 지역에서 민어가 잡힌다. 해남 지역에서 먼저 잡히면서 서해 임자도에 최대의 민어 어장이 형성된다.

 민어야 임자도에서 먹도록 하고 항동시장 골목 안쪽으로 찾아 들어간다. 목포집, 완도식당, 진도식당, 지도집, 도초식당, 장산집 등의 간판이 보인다. 주인이자 주방장의 출신지를 따서 붙힌 이름이다. 이중 완도식당에 들어간다.

항동시장 보리밥골목(횟집골목)
항동시장 보리밥골목(횟집골목)

이 집에 동행한 이는 보길도 출신인 강제윤 시인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섬을 가장 많이 다니는 섬연구소 소장이기도 하다. 나는 아직 그보다 섬을 많이, 자주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직업적 섬 여행가다.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군에 대한 지리여행 가이드북 『신안』이라는 책을 낼 정도이고, 그의 섬과 섬 음식 편력은 대한민국에서 독보적이다.

전화를 해 놓아서 밑반찬이 바로 나온다. 밑반찬이 두툼한 먹갈치 구이와 조림일 정도다. 김치나 머위줄기 같은 다른 반찬도 정갈하고 모두 입에 붙는다. 갈치조림에 들어있는 호박 한 점을 먹으면서 입은 바로 느낀다. “목포는 맛있다.”

완도식당의 밑반찬
완도식당의 밑반찬
완도식당의 먹갈치 조림
완도식당의 먹갈치 조림

혹 목포 먹갈치와 제주 은갈치를 다른 갈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갈치다. 은갈치는 낚시의 일종인 채낚기 어법으로 잡는다.

비늘이 덜 상하고 신선도가 좋다.

대신 비싸다.

먹갈치는 그물로 잡은 갈치라 신선도는 떨어지지만 저렴하고 씨알은 더 좋다. 목포에서는 주로 구이나 조림으로 먹기에 먹갈치를 사용한다. 살이 딱딱하지만 크기와 솜씨로 승부를 건다.

오늘의 주인공 검복죽이 등장한다.

검복죽은 참복과의 생선인 검복을 주재료로 해서 만든 죽이다. 전복죽이야 보양죽의 대명사지만, 검복죽은 처음 들어보았고, 처음 접하는 죽이다.

검복을 잘 손질해서 일일이 찢어서 만드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기도 하다.

검복죽
검복죽

죽은 주인공인 검복, 녹두와 콩나물이 들어갔다. 고소하고 시원하다.

복이 씹히는데 거슬리지 않는다. 전혀 비리지도 않다. 복국이나 복수육, 복매운탕과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또 비슷한 맛이기도 하다.

숙취 해소에는 최고라고 한다. 언젠가 강제윤 시인은 술병이 나서 지옥문 앞에서 오락가락하다가 이 검복죽으로 소생했다고 한다.

강시인이 누님이라고 부르는 완도집 주인 여자는 삶과 음식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화도 출신의 음식 고수(高手)다.

배가 불러도 죽을 두 그릇을 비우고 밑반찬도 하나하나 맛을 본다. 맛없는 반찬이 하나도 없다. 간장게장도 어지간한 전문 게장집 보다 윗길이다.

거기다가 준치회까지 곁들였다. 막 쓸어 낸 준치회 한 점을 노화 누님이 70년 내공으로 만든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니, 그 맛은 전라도 사투리도 ‘아따 고습다’이다.

그 이상의 표현을 찾을 수가 없다.

준치회
준치회

그렇게 점심 거하게 먹고 무안의 박시인과 광주의 김시인과 함께 목포시내를 팔자걸음으로 활보한다. 만호동이나 동명동이나 다 걸어 다닐 수 있다.

걷다 보니 ‘갑자옥 모자점’이라는 상점이 나타난다. 1927년에 개업한 집이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자 전문집이다.

문을 열어보니 잠겨 있다.

아쉽다. 기념으로 모자 하나 사려고 했으나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바로 옆에 ‘손소영 갤러리 앤 카페’란 카페에 들어간다.

오래된 일본식 가옥을 완전히 리모델링해 세련된 도회풍의 분위기를 연출해 놓은 집이다. 중정(中庭)이 예쁘다.

사내들의 수다는 이 집의 주인인 손소영씨의 눈길을 의식하면서 우아해진다. 손소영씨는 미모의 여배우였기 때문이다.

카페 기둥에 손소영씨가 출연한 영화 스틸 사진이 붙어있지만,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 나로서는 영화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손소영씨는 모자점이 왜 휴업이냐는 나의 질문에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았고 곧 모자박물관을 열 거라고 대답해 준다. 모자박물관도 재미있을 거 같다. 원래 우리나라는 모자의 나라였다.

목포 시내 구경하고 수다를 떨다보니 저녁 시간이 되어 간다.

오거리식당 입구
오거리식당 입구

드디어 저녁 만찬이다.

목포 오거리식당, 홍어와 홍어애, 준치회 무침, 낚지 탕탕, 삼치회, 말린 농어구이, 육전, 아구탕이 차례로 나온다.

차례로 음미하며 맛에 빠져든다. 모두 하나같이 맛있다. 메인 요리로 내어도 손색이 없는 맛이다. 영화로 비유하자면 주연배우가 너무 많다.

오거리식당의 기본 찬과 먹을 거리. 삼치회, 건농어구이, 육전 등(계절마다 달라진다.)
오거리식당의 기본 찬과 먹을 거리. 삼치회, 건농어구이, 육전 등(계절마다 달라진다.)

목포시에서는 홍어삼합, 세발낙지, 민어회, 갈치조림, 꽃게무침, 병어회, 준치무침, 아구탕(찜), 우럭간국을 목포 9미(味)로 정해 목포의 해산물 요리를 알리고 있다.

이 중에서 타지역에서 먹기 힘든 게 바로 준치회나 준치무침이다.

준치는 청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다. 봄인 4월에서 6월까지가 제철이며, 국, 만두, 자반, 젓국찌개, 찜, 조림, 회, 구이 등 다양하게 조리하여 먹었다지만, 요즘은 대개 무침이나 회로 먹는다.

시장 어물전의 준치. 횟감이다.
시장 어물전의 준치. 횟감이다.
오거리 식당의 준치 무침, 새콤달콤하고 고습다.
오거리 식당의 준치 무침, 새콤달콤하고 고습다.

준치는 활어 상태로 유통할 수 없기에 오히려 신선도가 생명이다.

산지 외에 준치를 먹을 수 있는 곳은 드물다. 목포가 준치의 본고장이랄 수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다.

준치무침이나 준치회 모두 바탕은 신선한 준치지만 핵심은 초고추장이다. 목포에는 한다 하는 음식점마다 비장의 초고추장이 있다.

고추장은 무화과나 유자로 은은한 단맛을 가미하여 발효하고, 막걸리 식초를 사용하되 음식점마다 전수되는 비결과 특색이 숨어 있다.

거기다가 마늘과 고추를 다질 때도 나름의 비법이 있다.

‘음식에 신명을 다 한다’라고 할 정도로 세심하게 음식에 신경을 쓴다.

재료가 신선하고 기본양념이 맛있고, 솜씨가 좋고 정성을 다하니 음식이 맛있을 수밖에 없다. 그 여러가지가 합쳐서 자부심으로 승화되었다.

그게 목포 음식의 정체다. 목포는 맛있다.

(목포 인문 맛 기행에 동참해 주신 박관서 시인, 강제윤 시인, 김옥종 시인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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