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자리돔 한상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1. 석북 신광수의 제주 출장

서울에서 제주로 가려고 한다면 요즘은 대부분 비행기를 탄다.

김포에서 제주 공항까지는 1시간 1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차를 가지고 가야 한다면 육로로 목포, 부산, 완도로 가서 배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조선 시대에도 육지에서 제주를 왕래했다.

왕의 자리에서 쫒겨난 광해군은 제주에서 생을 마쳤고,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도 제주에서 그려졌다.

조선시대에는 어떤 방법으로 제주까지 갔을까? 그런 궁금증을 풀어주는 자료가 있다.

조선 후기 영조 때의 시인이자 관리였던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1712∼1775)는 제주를 다녀와서 '탐라록(耽羅錄)'이란 기록(시집)을 남겼다.

신광수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현실 비판적이면서도 당시의 풍속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석북은 서울 가회동에서 태어났다.

귀가 없는 자화상으로 유명한 윤두서(尹斗緖)의 사위이기도 하다.

39세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로 바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석북은 50세가 되어서야 미관말직인 영릉 참봉에 임명되어 마침내 적빈(赤貧)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53세 때인 1764년 1월 13일 석북은 왕명을 받아 제주로 향했다. 당시 그의 직책은 의금부도사였다.

의금부도사는 죄인을 체포, 호송하거나 중요한 문서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영조 임금은 1764년 1월 12일 “제주 어사(濟州御史)인 이수봉(李壽鳳)에게 별유(別諭)를 내렸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서 ‘별유’는 임금이 특별히 내리는 유지(諭旨), 즉 특별한 지시 사항이다.

이에 앞서 제주에서는 역모 사건이 있었다. 석북은 역모사건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왕명으로 제주도 출장을 갔던 것으로 보인다.

석북은 왕명을 받자마자 서울에서 해남으로 말을 타고 달렸다.

'탐라록' 서문에 “주야치일기(晝夜馳馹騎) 삼일반도해남 (三日半到海南)”이라고 하였으므로 밤낮으로 역마를 달려 3일 반 만에 해남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람을 기다리느라 4일을 보내고 고달도(古達島)에서 배를 탔다.

고달도는 현재의 해남군 남창리 포구다. 여기서 배를 타고 반일(半日) 만에 제주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시를 보면 석북은 소안도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출발한 것을 알 수 있다.

남창리에서 다도해를 빠져나와 소안도에 이르고, 소안도에서 제주에 가는 것이 해로상 가장 빠른 코스다. 석북도 그 코스로 갔다.

여기서 반나절만에 제주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제주까지 도합 8일이 걸렸다.

이렇게 먹어도 별미. 김에 싸서 자리회와 밥.

음력 1월은 북서 계절풍이 불기에 전남 해남에서 제주 쪽으로 분다.

따라서 순풍을 받고 바로 제주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거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석북은 다음날 육지를 향해 제주를 떠났다가 바다 한가운데서 바람을 만나 다시 제주로 회항했다.

다른 배로 출발했던 어사(御使)는 무사히 육지에 도착해서 석북의 배는 표류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석북은 그 뒤에도 45일 동안 4차례 육지로 가려고 배를 탔지만 그때마다 바람이 세거나 역풍이 불어 제주를 떠날 수가 없었다. 

석북은 화북포구에 부근 객관 환풍정(煥風亭)에 머물러 있다가 3월 13일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배를 출발, 추자도를 경유 15일 밤에 해남에 도착했다.

석북이 제주로 갈 때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단 듯이 갔지만 올 때는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여 오히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5차례 시도 끝에 겨우 육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스러운 건 석북이 제주에 45일이나 머물렀기에 제주의 풍습과 환경에 관한 시 30여 수가 남아 있다. 

어쨌거나 석북은 1월 13일 서울에서 출장가서 3월 15일 해남에 도착했다. 2달이 더 걸렸다.

제주는 언제 도착하고 떠날지 모르는 그런 먼 곳이었다. 저승사자와 동반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험한 곳이었다. 
 
2. 만덕의 한양과 금강산 구경 

석북 신광수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친한 친구 사이였다.

요즘 말로 하면 절친.

훗날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채제공은 석북보다 8살 아래였지만, 벼슬은 먼저 시작해 출세 가도를 달렸다.

번암은 1774년에는 평양감사가 되었고, 이 해에 석북은 108수로 이루어진 평양의 풍속을 담은 연작시 '관서악부'를 지어 번암에게 보냈다.

그 이듬해 석북은 유명을 달리했다. 석북 최후의 공들인 연작시가 바로 '관서악부'였던 것이다. 

자리회무침
자리회무침

채제공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하려 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막아낸 적이 있다.

이 사건을 기억한 영조는 훗날 정조에게 채제공을 가리켜,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채제공을 매우 신임했다.

그런 번암이 매우 특이한 글을 하나 남겼다. 그게 바로 '만덕전'이다.

만덕은 제주 여성으로 성은 김씨. 조실부모하고 혼인도 하지 않았다.

만덕은 육지와의 무역으로 크게 성공한다.

1795년 제주에 큰 흉년이 들자 만덕은 자신의 돈으로 육지에서 쌀을 사와 제주 백성을 먹였다.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임금 정조는 제주 목사에게 만덕의 소원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게 했다.

만덕은 “서울로 가서 임금이 계신 곳을 한 번 바라보고, 금강산으로 가서 1만 2천 봉을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당시 제주 여성은 출도(出道) 금지가 법이었으니, 법을 어기는 대단한 소원을 말했던 셈이다.

정조는 자신이 있는 곳을 바라보고 싶다는 말에 혹했는지 소원을 들어주라고 했다.

1796년 가을에 만덕은 서울에 당도했다.

이때 번암이 먼저 만나보고 정조에게 만덕이 왔음을 보고했다.

정조는 선혜청에 하명하여 그녀의 식량을 지급하도록 했고, 내의원 의녀의 반수(班首)로 임명했다.

반수는 의녀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정조가 이렇게 한 이유는 일반 여염집 여자는 임금을 알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궁중에 출입하고 입금을 뵙기 위해서는 벼슬이 필요해서 이런 절차를 정조가 만들었다.

궁중에 들어온 만덕은 임금을 알현했다.

임금은 후한 상을 내렸고, 반년을 서울에서 머물렀다.

이듬해 봄 58세가 된 만덕은 금강산 구경을 다녀왔고, 그리고 제주로 돌아가겠다고 내의원에 아뢰었다.

만덕이 장안을 떠난다는 소문이 퍼지자, 장안에서 이름깨나 있는 사대부들이 앞을 다투어 만덕을 만나기를 청했다.

만덕은 제주로 돌아가기 직전 번암을 찾아가서 “이승에서는 다시 대감의 존안을 뵙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此生不可復瞻相公顔貌 仍潸然泣下)  

여기까지가 번암이 지은 '만덕전'의 스토리다.

정계의 거물 번암은 이때 78세의 나이였으나, 만덕을 향한 필치가 예사롭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만덕을 향한 사랑과 인간적인 신뢰가 '만덕전'에는 담겨 있다.

그후 만덕이 얼마나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성품으로 보아 제주로 돌아가서 씩씩하게 잘 살았을 거다.

3. 제주는 자리돔

석북이 그토록 오래 걸려서 도착한 제주를 요즘은 1시간 남짓이면 서울에서 갈 수 있다.

서울 구경을 오고 싶은 제주 사람보다는 제주 구경 가고 싶은 육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제주 여행에 매력이 많기 때문이다.

제주의 가장 큰 매력은 풍광이다. 남쪽 바다 한가운데 있는 화산섬이 그려내는 이국적인 풍광.

그것에 더하여 육지에서 맛보기 힘든 이색적인 먹을거리도 제주의 매력 중의 하나다.

고등어, 갈치, 옥돔, 전복(오분자기), 다금바리, 방어, 부시리...... 이 중에는 자리돔도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한다.

자리돔구이
자리돔구이

자리돔이 무엇인가?

자리돔은 새끼 붕어처럼 생겼다.

보통 10cm 정도. 제주 주위 바다에 서식하며 남해와 울릉도와 독도 바다에도 산다.

농어목 자리돔과 생선이다.

제주에는 자리돔과 비슷한 물고기로 노랑자리돔, 연무자리돔, 파랑돔, 나가사끼자리돔, 샛별돔 등이 있다.

이중 연무자리돔은 자리돔과 비슷하고 사는 곳도 겹친다.

자리돔은 제주 어민들의 주요 소득원이다.

큰 뜰채를 연상시키는 그물로 들어서 잡거나, 보조선을 이용하여 그물을 펼친 다음 고기가 들어오면 들어 올려 모아 잡는 방식을 사용한다.

자리돔은 떼를 지어 살며 한 자리에 붙박이로 산다고 하여 자리돔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여름이 맛있다는 말도 있지만 먹어보면 5월, 6월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뼈가 덜 억세고 산란 전이라 몸에 기름기가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물고기는 산란이 끝나면 맛이 없어진다. 암수를 가리지 않고 그렇다, 수놈도 방정을 하고 짝짓기에 엄청난 에너지를 쏟는 것이라 당연히 몸에 기름기가 빠질 수밖에 없다. 

비행기에서 내려 일행들과 함께 모슬포로 향한다.

모슬포항 돈지식당.

돈지식당은 계절 제철 요리를 내는 식당이다.

부시리, 방어, 자리돔 등등을 내며, 5·6월부터 여름철까지는 자리돔을 특화하여 한상차림으로 낸다. 가격도 합리적이다. 

이른 저녁 모슬포항으로 들어선다. 돈지식당은 항 초입에 있다.

바로 회가 나온다. 세로로 뼈채 썰었다.

그 이유는 잔가시 때문일 것이다.

세로로 칼질을 해야 잔가시도 부담이 적어진다.

김에 싸서 된장에 밥을 좀 넣고 마늘대 장아찌와 함께 먹어보라고 한다. 그렇게 먹어보니 아주 고소하다.

초장에도 찍어 먹어보고 간장에도 먹어본다.

다 맛있다. 작은 생선에 기름이 올랐다. 된장이 맛이 있다. 

자리돔 물회

다음에 나온 것이 자리돔 무침 회다. 이 역시 맛있다.

차례로 구이가 나온다. 회에 못지않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구이가 맛있는 생선도 많다.

자리돔구이는 한 마리씩 들고 뜯어 먹어야 제맛이다.

가시가 좀 있더라도 잘 발라 먹으면 그 특유의 고소함이 입에 남는다.

마지막으로 자리돔으로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요리, 자리돔 물회가 나온다.

된장을 풀었기에 구수하고 회는 뼈가 억세지 않은 작은 것을 골라 했는지 무척 부드럽다.

입에 걸리지 않아 훌훌 마실 수 있다. 밥을 말아 먹어도 좋다.

제주에 여러 번 와서 자리돔 물회를 먹었지만, 이번 물회가 가장 맛있다.

역시 5, 6월 물회다.

서귀포 보목 쪽에서 잡히는 자리돔은 작고 뼈가 덜 억세서 물회감으로 좋고, 모슬포 쪽에서 잡히는 자리돔은 구이감으로 좋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한여름이 그럴테고 5, 6월에는 어디나 다 그렇게 뼈가 억세지 않다.

그것보다 자리돔을 다루는 솜씨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돈지식당은 대단히 훌륭하다.

일행 4명은 대만족. 운전을 할 한 사람만 빼고 기분좋게 취한다.

제주 사람 중에 허리가 굽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 이유가 자리돔을 뼈채로 많이 먹어서 그렇단다.

자리돔은 젓갈로 시작해서 물회로 끝난다.

돈지식당이 조금 아쉬웠던 것은 자리젓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리젓은 다음날 한림항 삼일식당 해장국을 먹으면서 맛볼 수 있었다.

제주는 해산물도 해산물이지만 돼지고기와 고기국수 그리고 제주 특유의 해장국도 꼭 맛보아야 할 음식 목록에 들어간다.

미풍식당과 은희네 해장국도 좋지만 한림항 삼일식당도 제주 해장국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집이다.

제주 해장국과 자리젓
제주 해장국과 자리젓

제주의 음식을 건성이라도 다 맛보려면 계절별로 한 3일씩은 머물러야 한다.

일정이 아쉽다.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그때는 남아 있는 만덕의 행적도 찾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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