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핵과 식물이 과육의 즙을 늘리는 계절이다.

장마가 과즙의 단맛을 빼앗아 가기 전에, 살구와 앵두와 복숭아와 자두를 부지런히 맛보는 이맘때를 나는 손꼽아 기다린다.

내가 좋아하는 살구를 사러 면소재지의 오일장에 꼬박꼬박 때맞춰 나가고 있고 요 며칠 개살구를 맛보러 거의 매일 뒷산에 오른다. 

개살구나무(Prunus mandshurica)는 우리 산야에 저절로 나는 자생종이다. 중부 이북의 깊은 산을 중심으로 북한과 극동 러시아와 중국의 일부 지역에도 자란다. 그들의 분포가 말해주듯이 비교적 북방을 선호하는 편이다.

반면에 살구나무(P. armeniaca)는 한반도 전역에서 심어 기르는 중국 원산의 외래종이다. 삼국시대 이전에 살구나무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한다. 

살구나무는 오랫동안 우리의 삶 안에서 넓고 깊이 사랑받아 온 나무다. 하지만 개살구나무는 우리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만 할 뿐 그 정체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을 만나면 개살구나무가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쓴 것 같아서 내가 다 억울해진다.

그가 얼마나 멋진 우리 토종 나무인지를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개살구나무의 ‘개’는 심어 기르는 살구나무와 구분하기 위하여 살구나무가 아니라는 뜻의 ‘개’를 접두어로 쓴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겉만 그럴듯하고 실속이 없는 경우를 일컫는 메타포가 되어버렸다. 한반도에 자라는 식물 이름에 ‘개’자를 다는 것을 멀리하는 북한에서는 산살구나무라고 부른다. 

‘빛 좋은’이라는 말처럼 개살구나무는 말랑하면서도 단단하고 탐스러운 살굿빛 열매를 맺는다.

때깔은 좋지만 살구나무에 비해 맛이 덜해서 개살구라고 한다는 말이 내게는 마치 가담항설 같다.

살구나무의 열매가 개살구나무의 열매보다 단맛이 더 많을 뿐이다. 새콤함과 달콤함이 적절하게 배합된 맛은 개살구나무 열매에서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오일장과 산을 오가며 살구와 개살구의 맛을 저울질하는 동안 마치 선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그 맛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살구향’이라는 것을 달콤한 살구나무 열매보다는 새콤함과 달콤함이 경쟁하듯 섞인 개살구나무 열매에서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개살구나무는 말랑하면서도 단단하고 탐스러운 살굿빛 열매를 맺는다. 살구는 비교적 단맛이 강한 편이고 개살구는 새콤함과 달콤함이 적절하게 배합된 맛이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아주 먼 과거부터 인류는 살구나무를 약재로 널리 썼다.

꽃과 잎과 가지와 나무껍질과 뿌리를 각각 행화, 행엽, 행지, 행수피, 행수근이라는 약재로 한방에서 이용한다.

특히 살구씨의 효험을 한방에서 높이 사는데, 폐의 기운을 윤택하게 하고 기를 내리고 체한 것을 다스리고 상처를 아물게 한다고 그 효능을 설명한다.

우리나라 식약처에서 제공하는 '한약재 표준 제조 공정 지침'에 따르면 개살구씨의 약효도 살구씨와 똑같다고 평가한다.

단, 동의보감에서는 그 쓰임을 다소 엄중하게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산살구(개살구) 씨는 약에 넣을 수 없고, 반드시 집 뜰에 심은 살구의 씨를 써야 한다”고.

그래서 개살구나무에 대한 평이 낮아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개살구나무가 남한보다 널리 자라는 북한에서는 개살구나무를 살구나무와 또렷하게 구분해서 보고 그 쓰임을 살뜰하게 챙겨서 설명한다.

북한의 식물학자 임록재 박사는 1997년에 출판한 '조선식물지'에 “특히 산살구나무(개살구나무)는 추위에 견디는 힘이 세기 때문에 살구나무의 우량 품종을 얻기 위한 접그루로 쓴다”고 적어두었다.

“목재는 굳고 무늬가 아름다워서 여러 가지 가구재로 쓰며 열매는 가공식료품 원료로 쓴다. 꽃이 아름다워서 마을에서 심어 가꾼다”는 설명도 눈에 띈다.

북한 자료에서 설명하듯이 개살구나무는 꽃이 정말 곱다.

나는 그래서 단언할 수 있다.

‘꽃 좋은 개살구’라고.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 김용택 「그 여자네 집」 중에서

살구꽃 피는 봄날을 누가 감히 그냥 보낼 수 있을까.

그 미학을 아는 이들에게 개살구나무의 개화는 조금 충격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개살구꽃이 살구꽃보다 적어도 두 배는 더 예쁘니까. 그 이유는 두 종의 형태학적 차이에 있다.

꽃자루가 짧아서 꽃송이 하나하나가 가지에 바짝 붙어서 피면 살구꽃, 꽃자루가 적어도 서너 배는 길어서 가지와 거리를 두고 나부끼며 피면 개살구꽃인 것이다.

그래서 개살구나무는 꽃송이가 모여 핀 모습이 살구나무보다 전체적으로 더 풍성한 포물선을 그린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눈에 삼삼하다.

뒷산에 올라 개살구나무의 열매에 손을 대본다.

바로 이 자리, 꽃이 폈던 자리에 맺힌 단단하고도 말랑한 열매가 한없이 사랑스럽다. 

개살구나무의 꽃. 개살구꽃은 살구꽃과 달리 꽃자루가 길어서 가지와 거리를 두고 나부끼며 핀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개살구나무 개화 풍경. 꽃자루가 길어서 꽃송이가 모여 핀 모습이 살구나무보다 전체적으로 풍성한 모습이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우리 땅에 사는 토종 살구나무가 또 하나 있다.

드문 개살구나무보다 더 드물게 자란다는, 이름도 낯선 ‘시베리아살구나무(P. sibirica)’.

한반도 중부 이북의 석회암 지대에 살고 러시아와 몽골과 중국의 북부지방에도 분포한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북방에 적응한 북방계 식물이다.

열매가 살구나 개살구와 달리 찌부러져서 납작한 게 시베리아살구나무의 가장 큰 특징이다.

메마르고 척박한 석회암 지대에만 사는 것도 이들의 고유한 습성이다.

식물지리학적으로는 개살구나무보다 북방을 조금 더 선호하는 식물이다.

이에 걸맞게 북한 식물학자들은 ‘북산살구나무’라고 부른다.

이들을 북한에서는 살구나무에 접을 붙여 추위와 건조에 강한 살구나무 품종을 얻는다.

그 품종들이 북한에서도 북쪽 지역인 함경북도 회령군 등지에 가로수나 유실수로 심겨져 있다. 

한반도 중부이북의 석회암 지대에서 드물게 자라는 시베리아살구나무.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열매가 살구나 개살구와 달리 찌부러져서 납작한 게 시베리아살구나무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하지만 남한에서는 시베리아살구나무가 살 수 있는 땅이 차츰 더 줄어드는 추세다.

석회 채광 산업은 그들이 딛고 선 땅을 허물고 있다.

게다가 올해에도 찾아올 기록적인 폭염과 이상 기온 현상은 그들을 자꾸만 북쪽으로 떠밀 것이다.

시베리아살구나무뿐만 아니라 개살구나무도 남한에서의 자생을 차츰 철수하고 있는 낌새다. 

우리가 미처 그들을 알아보기도 전에 개살구나무와 시베리아살구나무는 우리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리를 다 지워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나의 식물일지에는 소멸, 두려움, 긴장감, 경각심과 같은 단어들이 그들 이름과 나란히 적혀있다.

그 고운 꽃들 다 사라져버리기 전에 개살구나무와 시베리아살구나무에게 우리가 조금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 내게는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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