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궁기리 왕버들

대한민국에는 약 1만5000그루의 보호수가 있습니다.

마을에 오래 살아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한 나무입니다. 느티나무, 은행나무, 소나무 등 여러 수종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에는 각자 스토리가 있습니다.

나무와 관련된 역사와 인물, 전설과 문화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문화콘텐츠입니다.

나무라는 자연유산을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킨 예입니다.

뉴스퀘스트는 경상북도와 협의하여 경상북도의 보호수 중 대표적인 300그루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연재합니다. 5월 3일부터 매주 5회 연재를 시작합니다.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구미 궁기리 왕버들은 고려 때의 충신 김주의 얼이 담긴 당산나무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서쪽으로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동쪽으로는 너른 들이 펼쳐졌으며 그 곁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마을 궁기리에는 고려시대의 충신 농암(籠巖) 김주(金澍:1365~?)와 그 후손의 혼이 역력히 남아있다.

인재가 많이 나왔다 해서 ‘재궁(才宮)’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마을이다.

행정구역 이름인 궁기리는 재궁마을의 ‘궁(宮)’자와 도개면사무소가 있는 면 소재지가 있는 터라는 뜻에서 ‘기(基)’자를 더해 궁기리라 했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재궁마을은 김주의 고향이다.

김주는 본관은 선산(善山, 一善) 아버지는 예의판서(禮儀判書) 김원로(金元老)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고, 공양왕 때에 예의판서를 지냈다.

고려 말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러서 공양왕의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개국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통곡하며 부인 유씨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 내가 강을 건너면 가서 몸을 둘 곳이 없다. 압록강까지 왔다가 도로 명나라에 돌아가는 날을 내 기일로 삼고, 장사 지낸 후에는 지문(誌文)과 묘갈(墓碣)을 하지 말라.”라는 편지를 쓰고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하인에게 자신의 조복(朝服)과 신을 주어 보내면서 부인 유씨가 죽으면 이것으로 합장하라고 했다고 한다.

다시 명나라로 돌아간 그를 명나라 태조는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임명했지만 그는 끝내 사양했고 중국에서 살다 죽었다.

[사진=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조선의 개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훗날 조선의 정조는 그의 충절 정신을 높이 사서 1798년에 ‘충정(忠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기까지 했다.

구미 궁기리 재궁마을에는 충정공 김주 사당인 충렬당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소박한 사당인 충렬당의 현판은 조선의 우암 송시열이 썼다.

송시열은 '선산삼인록(善山三仁錄)' 서문에서 “고국(故國)과 처자(妻子)를 마치 헌신짝처럼 버리고 형초(荊楚)에서 생을 마치면서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던 농암(籠巖)”이야말로 “바름[正]을 잃지 않고 각기 본심(本心)의 편안함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충렬당 앞에 세워진 신도비에는 고려시대의 선비를 통틀어 끝까지 의리를 지킨 의인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농암 김주뿐이라고 기록으로 남겼다.

마을 길 안쪽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주의 증손인 경질공(景質公) 송파(松坡) 김지경(金之慶:1419~1485)과 그의 아들인 문대공(文戴公) 병암(屛菴) 김응기(金應箕:1455~1519)의 신도비다.

신도비를 끼고 골목 안쪽으로 돌아들면 곧바로 충렬당이 나타나고, 충렬당을 지나면 마을 논 오른편으로 재궁마을회관이 나온다.

논과 논 사이의 갈림길 가운데에 서 있는 나무가 바로 구미 궁기리 왕버들이다.

<구미 궁기리 왕버들>

·보호수 지정 번호 11-27-4-4
·보호수 지정 일자 1982. 9. 24.
·나무 종류 왕버들
·나이 260년
·나무 높이 10m
·둘레 3m
·소재지 도개면 궁기리 826-13
·위도 36.416728, 경도 128.16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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