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향유가 지천으로 피었다.

가을이 왔다는 뜻이다.

쑥이나 서양민들레처럼 애써 가꾸지 않아도 민가 주변에서 아무렇게나 자라는 게 향유다.

꽃이 화려하지 않아서 사람들 눈에 쉽게 띄지는 않는다.

그 대신에 특유의 향기로 향유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추석에 찾아간 엄마 계신 고향 집 마당에도, 코로나 검사를 받기 위해 들렀던 예천보건소 언저리에도, 그리고 ‘좀풍게나무’를 조사하러 갔던 경북 의성의 빙계계곡에도 향유가 피어 너울너울 향기를 내고 있었다.

9월의 끝자락에 경북 의성의 빙계계곡에서 만난 우리 자생식물 ‘향유’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9월의 끝자락에 경북 의성의 빙계계곡에서 만난 우리 자생식물 ‘향유’ [사진=허태임(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식물 전체에서 강한 향기가 난다고 해서 이름도 ‘향유(香薷)’다.

나물로 먹기도 해서 옛사람들은 먹을 ‘여(茹)’자를 붙여 ‘향여(香茹)’라고도 했다.

동아시아를 비롯하여 히말라야와 유럽에도 널리 자라는 향유는 먼 옛날부터 인류가 약용식물로 널리 이용해왔다.

조선 초기에 발간된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에 향유가 등장하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그 이전부터 향유를 국산 약재로 다루었을 것이라고 본다.

'향약채취월령'은 과거부터 널리 쓴 우리 약재가 무엇이고 이들을 정확히 언제 채집해야 하는지를 민간에서 노래로 익힐 수 있도록 기록한 일종의 의학서이다.

여기에서 11월은 ‘향유를 채집하는 달’이라고 설명한다.

'동의보감'도 향유를 중요한 약재로 기록한다.

특히 ‘곽란(霍亂)’을 다스리는 데 ‘반드시’ 향유를 쓴다고 했는데 그 시절 배탈의 특효약이 향유였던 걸로 보인다.

실제로 오늘날 식중독을 일으키는 대표 세균인 살모넬라균에 대한 항균 성분이 향유의 몸에서 확인되었다.

식물의 약성은 주로 식물 체내의 ‘정유(精油)성분’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공기 중에 노출될 때 식물은 특유의 향기를 낸다.

정유성분을 영어로는 ‘에센셜오일(essential oil)’이라고 부른다.

대개 향이 짙은 식물이 약성도 높은 편이다. 추출법을 달리하면 식물 체내에 둥둥 떠다니는 다양한 종류의 ‘에센셜오일’을 밝힐 수 있고 새로운 천연향료나 신약 성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관련 연구는 끊임없이 진행 중이다. 

향유의 체내에서 확인된 정유성분은 자그마치 70여 종류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나의 관심을 끄는 건 리모넨(limonene)과 시트럴(citral)이다.

이들은 마치 레몬과 오렌지를 버무린 듯 상큼한 향을 담당하는 성분이다.

영국과 미국의 유명한 향수 브랜드 ‘조말론’과 ‘이솝’은 그 향을 담은 제품을 주력 상품으로 내걸기도 했다.

이들 성분을 자연에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재배식물 ‘레몬그라스’에서 주로 얻는다.

레몬그라스는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널리 키우는 ‘벼과’ 작물이다.

잎만 보면 억새나 갈대처럼 큰 특징 없이 생겼는데 옹근풀에서 나는 특유의 레몬향은 독보적이다.

그래서 이름처럼 ‘레몬풀’인 거다.

향수를 만드는 원료의 대명사가 된 식물이자 셰프가 사랑하는 향신료, 태국의 대표 음식 ‘톰얌쿵’에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식물이 ‘레몬그라스’다.

하지만 이렇게 화려한 이력을 가진 레몬그라스가 안타깝게도 우리 땅에서 저절로 자라지는 않는다.

최근 들어 다양한 작물의 재배 기술이 보급되어 국내에서도 레몬그라스 생산이 가능해졌지만 레몬그라스와 같은 수입 식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해당 식물의 원천에 대한 로열티를 따로 내야 한다.

국제협약인 ‘나고야의정서’의 엄격한 의무조항에 따라 ‘원산지에 마땅히 이익이 공유되어야’ 하기 때문에 외국 원산의 재배식물을 키워 쓰는데 숱한 제약이 따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레몬그라스의 대체 식물이 될지도 모를 ‘향유’라는 식물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싶다.

타국에서 수입하는 식물에 막연히 기대는 것보다 지금은 우리 땅에 저절로 자라는 ‘자생식물’을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같은 견해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식물학계와 국제법학계를 오가며 다양한 곳에서 점차 번지고 있다. 

일찍이 600여 년 전에 우리 선조들은 그 생각을 실제로 행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던 시기에 국내에는 중국의 학문과 기술 등이 폭넓게 도입되었고 동시에 한국의 고유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일고 있었다.

특히 의학 분야에서는 당약에 의존했던 과거와 달리 약이 되는 우리 자생식물을 조사하고 기록하는 일에 힘이 실렸다.

조선 건국 초기였던 1399년에 편찬된 의학서'향약제생집성방'에는 우리 땅에 자라는 향약이 중국산 당약에 비해 우월하다는 주장이 곳곳에 담겨있다.

이를 토대로 초기 조선의 서민 의료기관이었던 ‘제생원’에는 국내의 각 지역에서 수집한 약용식물을 심어 기르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었다.

특히 세종은 즉위 초기부터 지역별로 향약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지시하였고, 그 결과를 '세종실록 지리지'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조선의 3대 의학서(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동의보감)가 연이어 편찬될 수 있었다. 

조선이 낳은 모든 의학서에 하나같이 중요한 식물로 등장하는 게 ‘향유’다.

한방에서는 ‘향유’라는 이름 외에‘노야기’라고도 부른다.

실제로는 향유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 식물인 ‘꽃향유’도 같은 이름으로 한방에서 함께 썼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꽃향유의 주 분포지는 한반도다.

향유는 북반구 일대의 여러 국가에 걸쳐 비교적 널리 자라지만 꽃향유는 한반도를 벗어나면 중국 동북부의 일부 지역에만 자란다.

꽃향유도 향유처럼 몸에서 특유의 레몬향을 발산한다.

향유와 비교하자면 옅은 편인데 그래서인지 꽃향유 몸에서 밝혀진 정유성분은 향유의 절반에 그친다.

그 대신 꽃향유는 이름처럼 꽃이 두드러진다.

앙증맞은 체구에 짙은 보라색 꽃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크게 피어 수십여 포기가 군락을 이루면 마치 그 자리에 보랏빛 융단이 깔린 것만 같다. 

우리 땅에 자라는 자생식물 꽃향유. 앙증맞은 체구에 짙은 보라색 꽃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크게 피어 수십여 포기가 군락을 이루면 마치 그 자리에 보랏빛 융단이 깔린 것만 같다. [사진=온라인교육연구회]
우리 땅에 자라는 자생식물 꽃향유. 앙증맞은 체구에 짙은 보라색 꽃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크게 피어 수십여 포기가 군락을 이루면 마치 그 자리에 보랏빛 융단이 깔린 것만 같다. [사진=온라인교육연구회]

내가 지금껏 만난 가장 멋진 꽃향유 군락은 북악산 성곽길에 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018년 가을의 일이다.

현 정부의 공약 중 하나인 ‘청와대 개방’의 일환으로 북악산이 2019년 마침내 국민에게 개방되었다.

그에 한 해 앞서 그곳에 어떤 식물이 자라고 있는지를 파악해달라는 요청이 내게 도착했다.

당시만 해도 북악산 성곽길 일부 구간은 청와대의 북쪽을 감싼 채 미개방 지대로 묶여 있었다.

그 길이 청와대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에 실제로 내가 담당했던 조사지는 북악산을 포함하여 청와대 전 구역이었다.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경복궁의 뒤뜰로 드넓은 녹지대를 자랑하던 곳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현재 청와대 안에는 5만여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선조가 물려준 숲을 가장 완벽하게 보전하고 있는 장소 가운데 하나가 청와대의 숲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숲을 나는 2018년 가을부터 2019년 가을까지 종횡무진 누볐다.

고려시대부터 살아온 주목을 만났고 조선시대에 그곳에 뿌리내린 회화나무와 소나무를 찾았으며 역대 대통령의 기념식수를 일일이 파악하여 그 종류를 밝히기도 했다. 

그중에 내게 가장 또렷하게 새겨진 식물은 단연코 꽃향유다.

내 생애 가장 멋진 꽃향유 군락을 그렇게 그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혹시 이들이 제생원을 두었던 시절부터 자라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 나는 청와대를 조사하면서 제생원이 있었던 자리에도 가 보았다.

안국역 3번 출구 앞에 있는 현대사옥이 제생원 터다.

하지만 그곳에는 일찍이 고층빌딩이 들어섰고 꽃향유가 살 법한 땅에는 외국에서 수입한 고가의 정원식물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정작 우리는 잘 모르고 지나치는 우리의 꽃향유를 서양에서는 정원식물로 주목하고 있다.

꽃이 곱기도 하거니와 그 향기가 ‘아로마테라피’소재로 제격이라는 점에서다.

이미 유럽에서는 꽃향유를 인간의 심신에 이로운 주요 ‘치유식물’로 손꼽으며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다. 

가는잎향유(좌)와 좀향유(우). 가는잎향유는 꽃향유에 비해 잎이 실처럼 가늘다. 충북과 경북을 잇는 이화령에 아주 드물게 자란다. 좀향유는 이름처럼 작아도 너무 작다. 좀향유의 사진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현무암의 크기가 아기 주먹만 하니 좀향유는 도대체 얼마나 작다는 말인가. 한라산 중턱을 올라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사진=가는잎향유_국립생물자원관/좀향유_허태임]
가는잎향유(좌)와 좀향유(우). 가는잎향유는 꽃향유에 비해 잎이 실처럼 가늘다. 충북과 경북을 잇는 이화령에 아주 드물게 자란다. 좀향유는 이름처럼 작아도 너무 작다. 좀향유의 사진 속 배경으로 등장하는 현무암의 크기가 아기 주먹만 하니 좀향유는 도대체 얼마나 작다는 말인가. 한라산 중턱을 올라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사진=가는잎향유_국립생물자원관/좀향유_허태임]

꽃향유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는 꽃향유를 쏙 빼닮은 ‘가는잎향유’와 ‘변산향유’와 ‘좀향유’가 자란다.

가는잎향유는 충북과 경북을 잇는 이화령에서, 변산향유는 변산의 해안가 바위지대에서, 좀향유는 한라산에서 만날 수 있다.

지구의 드넓은 대륙에서도 이들이 우리 땅을 선택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이 나는 참으로 고맙고 크게 기쁘다.

‘향유’와 ‘꽃향유’는 우리 선조가 미리 알려준 ‘K-플라워’의 대표 식물이 아닐까?

꽃들이 점점 자취를 감추는 가을, 향유를 찾아나서 보자.

그 향기를 덤으로 얻는다면 우리가 맞는 가을 또한 한 겹 더 향기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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