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를 풍미한 ‘1세대 포크 가수’ 양병집(본명 양준집)이 지난 24일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사진=연합뉴스]
 

【뉴스퀘스트=오광수 대중문화 전문기자 】 타복타복 타복네야. 너 어드메 울며 가니/ 우리 엄마 무덤가에 젖 먹으러 찾아간다/ 물이 깊어서 못 간단다. 물 깊으면 헤엄치지/ 산이 높아서 못 간단다. 산이 높으면 기어가지/ 명태 주랴 명태 싫다. 가지 주랴 가지 싫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함경도 지방에서 구전돼 온 민요를 양병집이 발굴해 부른 ‘타복네’는 듣는 이의 마음을 뒤흔든다. 노래의 주인공인 양병집(본명 양준집)이 지난 24일 서울 용산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70세 

크리스마스에 그의 부음을 전해 들으면서 가슴 한 켠이 쓰리고 아팠다. 페북 친구이기도 한 그가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세상에 펼쳐보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잘 봐왔다.

적지 않은 나이에 그룹을 결성하기도 하고, 버스킹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에세이집을 펴내기도 했다. 또 자신의 주특기인 번안곡을 만들어서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적어도 히트곡 몇 곡 내놓고 원로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가수가 아닌 영원한 현역이고 싶어했다.

처음 언급한 노래 ‘타복네’는 원래 표기는 ‘타박네’로 문학평론가 이어령은 그의 책에서 ‘타박타박 걷는 아이’라는 뜻에서 유래된 제목이라고 주장했다.

정태춘 노래 ‘양단 몇 마름’의 2절 가사를 쓰기도 했던 양씨의 어머니가 자장가로 불러준 노래였다. 함경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구전돼 오면서 제목과 가사 또한 지역마다 다르게 전해져 왔다.

김민기·한대수와 더불어 1970년대 3대 저항가수였던 양병집은 굵고 짧게 한국 포크계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

양병집은 학창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고 유명 음악감상실을 드나들었다. 그리고 음악의 꿈을 좇아 서라벌예대 음대 작곡과(현 중앙대 작곡과)에 입학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증권사에 입사했다.

그러나 증권사에 입사한 뒤로도 음악을 버리지 못한 양병집은 밥 딜런의 노래를 개사한 ‘역(逆)’-훗날 김광석이 부르면서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로 제목이 바뀜-으로 포크 콘테스트에 참가한다.

결국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신촌 라이브카페로 간다. 그곳에서 조동익과 최성원, 정태춘, 전인권 등과 어울린다. 양병집은 밥 딜런의 노래를 개사한 ‘소낙비’를 만들어 이연실에게 주기도 했다.

1974년 발표한 '넋두리'는 포크의 본령이 살아 있는 앨범이었다, ‘역’과 ‘서울하늘’ ‘타복네’ 등은 유신 독재정권을 향한 풍자와 해학이 가득했다. 그의 노래는 현실을 비꼬는 노랫말과 구수한 가락으로 당시 젊은 청년들의 답답한 마음을 대변했다.

미국 민요 '윕 포 제이미'(Weep For Jamie)를 개사한 '잃어버린 전설'에는 월남 파병, 민주화 항쟁, 산업 전선에서 스러져간 젊은이를 애도하는 메시지가 담겼다.

‘서울 하늘 1’에서는 '나도 출세 좀 하고 싶어서 일자리를 찾아봤으나 내 맘대로 되지 않습디다…두 번 다시 안올랍니다'라는 가사로 당대 사회 이슈였던 '이농향도'(離農向都)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때문에 이 음반은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는 등 독재 정권 아래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양병집은 이후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가 1999년 한국으로 돌아왔고, 2005년에는 7집 '페이드 어웨이'(Fade Away), 2013년에는 8집 '에고&로고스'(Ego&Logos)를 발표했다. 2016년에는 들국화 원년 멤버인 기타리스트 조덕환과 앨범 '흔치 않은 노래들'을 내기도 했다.

불과 한 달여 전 자신의 음악 여정을 풀어낸 자전적 소설 '밥 딜런을 만난 사나이'를 펴내기도 했다.

1986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 생활하던 양병집은 1999년 영구 귀국해 후배들과 함께 음악을 향한 열정을 불태워왔다. 이태원의 숙소에서 홀로 생활하면서도 영원한 현역이고 싶어했던 그는 분명 재평가 돼야할 아티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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