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우리 민요들 중에는 노랫말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민요가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온 것이므로 노랫말의 일부가 사어(死語)가 되어 요즘은 쓰지 않는 말일 경우도 있고, 와음(訛音)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어려운 한자어의 경우 쉬운 말로 고쳐 부르다가 뜻이 완전히 변하여, 뜻이 통하지 않게 되자 이를 뜻이 통하게 엉뚱하게 완전히 고쳐버린 경우도 있다.말을 사용하는 언중(言衆)이 변화하면서 이해를 못할 때도 있다. 지방의 방언일 경우도 있다. 때문에 원래의 뜻을 찾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이를 몇 가지 예로 나누어 원래의 뜻을 추적해 보자.1. 방언(사투리)의 이해경상도 민요에 「상주모심기노래」라는 것이 있다. 국립국악원이 제공한 국악정보에는 그 노랫말 중 하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능청능청 저 비 끝에 시누 올케 마주 앉아나두야 죽어 후생가면 낭군 먼저 섬길라네이 노래는 중학교 1학년 음악 교과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전국은 일일생활권으로 묶이기 시작했다.연이어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전국 곳곳에 개통되면서 이제 우리나라 어디에도 서울에서 출발해 하루에 다녀오지 못할 곳은 없다.전라남도 해남이나 진도, 경상남도 거제, 경상북도 울진, 영덕 등 모두 차로 5시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다. 그만큼 교통이 편리해진 것이다.하지만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나라에는 교통이 불편해 등짐장수, 이른바 보부상들이 교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들도 많다.특히 강원도 영동과 영서는 태백산맥으로 인해 거리는 가깝지만 왕래는 매우 불편했다. 때문에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고갯길은 삶의 한 마루이자 아득한 거리감으로 인해 문학작품 혹은 민요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다.진부령, 대관령 등등의 고개는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 담겨있는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경북 봉화와 경북 울진을 연결하는 도로도 지금은 자동차길이 잘 포장되어 있지만, 과거에는 아예 번듯한 길조차 없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김동인의 소설에 「배따라기」(1921)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한 사내의 기구한 운명담을 듣게 된다.그 사내는 잘 생긴 동생과 아내와 함께 사는 데, 동생과 아내의 사이를 의심하게 된다. 어느 날 사내가 장에서 돌아오니 아내의 옷매무새가 풀어져 있고, 동생과 아내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그들의 당황하는 모습에 형은 아내와 동생 간의 간통을 확신하게 된다. 사실은 아내와 동생이 집안에 들어온 쥐를 잡다가 그런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다. 남편의 의심에 아내는 분결에 자살하고 다음 날 시체가 바다에 떠오른다.이 사건 후 동생은 집을 나가 뱃사람이 되어 행방이 묘연하다. 수십 년이 흐른 후 형은 동생을 찾았지만 동생은 ‘다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또 떠나간다.한 형제의 운명적 비극을 다룬 내용의 소설 「배따라기」는 무당의 굿에서 착상한 소설임이 분명하다. 제목도 그렇거니와 소설 「배따라기」의 앞부분
국악 교육의 대모(代母)가 되기까지[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박귀희는 6·25전쟁 후, 주로 세 가지 일에 주력한다.그것은 첫째 국악 교육 등의 국악 전수 활동, 둘째 공연 등의 예술활동, 셋째 운당여관 운영과 관련된 사업이다. 이 세 가지 활동은 각각 다른 영역이면서도 하나의 영역이기도 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하는 일이 여럿이라 해도 그것은 한 인간의 자장 속에서 동시에 형성되기 때문이다.박귀희가 국악교육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처음에는 전후 국악인들의 생계문제를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국악인들은 권번에서의 교습이나 활동, 그리고 공연 수입 등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그런데 6·25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가 지나가자 국악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거의 와해되었다.정악을 했던 일부 국악인들은 국립국악원에서 생계를 이을 수 있었지만 국악인들 중 다수를 차지했던 판소리를 포함한 민속악 계열의 활동을 했던 국악인들은, 영화의 활성화 등과 맞물려 그 활동과
예인의 길로 들어서다[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 대동악극단 공연을 1년 정도 따라다닌 뒤 박귀희는 악극단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대구에 머문다.이때 박귀희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하나 더 보태진다. 대구에서 가야금병창의 명인이었던 강태홍(姜太弘)을 만난 것이다. 강태홍은 전남 무안 세습무가(世襲巫家) 집안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부터 가야금을 배웠으며, 가야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창조(金昌祖)에게서 가야금을 전수받았다.가야금병창은 가야금을 타면서 노래를 하는 것이다. 창(唱)이 주가 되고 가야금이 부(副)가 된다고 할 수 있지만 줄은 줄대로 잘해야 하고 창은 창대로 잘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가야금 산조와 가야금 병창은 모두 19세기 중반 이후 정립된 것으로 김창조와 박팔괘 등을 그 원조로 삼는다.이화중선의 눈에 든 것이 박귀희에게 하나의 행운이라면 마침 대구에서 사범을 하던 강태홍에게 가야금병창을 사사받을 수 있었던 것도 박귀희에게는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박귀희는 강태홍에게
소리에 홀려, 국악에 미쳐[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 가난과 근심에 쪼들리는 백이십만 서울시민에게 하루 동안 명랑한 기쁨을 드리오리니 온갖 볼일 제쳐놓고 봄빛 어리인 창경원 금잔디로나 오시라!1947년 3월 19일 『경향신문』 기사 중의 한 구절이다. 『경향신문』은 1947년 이라는 것을 개최했다. 이때가 8·15해방을 맞이하고 두 번째 봄을 맞는 해이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 미군정 치하에서 국민을 위로하는 잔치를 마련한 것이다.‘가난과 근심’에 쪼들리는 서울시민을 위로하겠다는 문구가 와 닿는다. 이 신문은 “창악으로는 임방울, 오태석, 정남희, 박록주, 박귀희 등과 이밖에 수많은 명기명창들이 총동원하야…” 3월 29일부터 4월 1일까지 4일 동안 일종의 국악축제를 연 것이다.임방울이야 국창(國唱)으로까지 알려진 사람이지만 박귀희는 누구인가?박귀희는 1921년 생으로 당시 스물여섯 살. 함께 출연한 박록주가 1906년 생으로 당시 마흔한 살이었다는 점을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고려 무신정권 때부터 시작된 팔경의 유행은 조선 개국 초 정도전에 의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정도전, 조준 등의 신흥사대부 세력은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라는 맹자의 말을 모토로 삼아 왜구의 침입, 권문세가의 착취, 토지제도의 모순 등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자 이성계를 앞세워 역성혁명에 성공한다. 당시 역성혁명파의 성리학은 실용적 경세지학이었던 것이고, 그들은 곧 새로운 국가 수립에 착수한다.정도전은 당시 새로운 수도 한양 건설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정도전은 경복궁, 근정전, 숭례문 등의 한양 도성의 궁궐이나 사대문 이름을 짓고 한양 주변의 도성을 설계하고 공사 책임을 맡았다. 한양을 5부로 나누고 52방의 동네로 구획하여 여러 관청을 들어서게 하고 52방의 이름을 지은 것도 바로 정도전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가회동이니 안국동이니 하는 지명이 바로 그때 탄생했다.이성계와 건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 에는 심청이가 공양미 3백석에 몸이 팔려 인당수에 빠지기 직전, ‘범피중류’와 ‘소상팔경’ 대목이 나온다. ‘범피중류’는 중국의 여러 경승지를 노래하는 대목이고, ‘소상팔경’은 억울하게 혹은 안타깝게 죽은 중국의 여러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는 대목이다. ‘범피중류’는 사람을 물에 제물로 바치러가면서 한가하게 경치 타령이나 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전체 스토리와는 상관없이 보이는 장면이 판소리 다섯 바탕에서는 가끔 등장하는 것이다. ‘소상팔경’은 단가로도 부르는데, 한 대목은 이렇다.격안어촌(隔岸漁村) 양삼가(兩三家)에 밥 짓는 연기 일고파조귀래(罷釣歸來) 배를 매고 유교변(柳橋邊)에 술을 산 후애내성(欸乃聲) 부르면서 흥을 겨워 비겼으니소림(疏林)에 던진 새는 지는 해를 설워 울고벽파(碧波)에 뛰는 고기 빗긴 볕을 맞어 노니어촌낙조(漁村落照) 이 아니냐이 대목을 쉽게 풀이하면, “강안 민가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일고 낚시하다 돌아와 배를 매고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우리 국악 판소리 다섯마당 중 , , , 의 스토리는 조선시대까지 전해오는 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새롭게 창작한 스토리라고 볼 수 있다.하지만 의 경우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한 장면을 소재로 하여 재창작한 것이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조조(曹操)는 오초연합군의 화공작전에 말려 대패하고, 연합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치다가 화용도에 이른다.이때 조조 앞에 나타난 저승사자는 의리의 사나이 관우(關羽). 관우는 조조를 정에 이끌려 조조를 못 죽이고, 겨우 살아난 조조는 탄식하는 그 장면을 노래한 것이 바로 판소리 다. 외에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를 소재로 한 시조도 많고 이중에는 시조창으로 지금까지 부르는 노래도 있다. 남창지름시조로도 불리는 도 그렇다.장판교 상에 환안(環眼)을 부릅뜨고 장팔사모창 메고 섰는 저 장사야 너의 성명이 무엇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석북 신광수는 50세가 되어서 처음 관직에 오른다. 영릉(寧陵:효종의 능)을 돌보는 참봉으로 종 9품 벼슬이었다. 그야말로 뒤늦게 겨우 미관말직의 벼슬자리를 하나 받은 셈이었다. 하지만 한양 풍류가에서 석북은 시로 명성을 제법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석북이 지은 시로 가객 이응태에게 주는 시가 있는데 바로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증가자이응태((贈歌者李應泰)당대의 명창 이세춘이십년동안 한양사람들을 경도시키네청루에 협소들은 능히 창을 전하고백수로 강호에서 신가락을 움직이네9월9일 국화꽃이 벽사를 찾고한 잎 배 옥피리로 섬강을 올라와영동에 와 놀며 내 시를 많이 얻어가또 장안 안에 이름을 가득 퍼뜨리겠구나(當世歌豪李世春 十年傾倒漢陽人 靑樓俠少能傳唱 白首江湖解動神 九日黃花看甓寺 孤舟玉笛上蟾津 東游定得吾詩足 此去聲名又滿秦)능지기라는 게 사실 별 할 일 없는 자리다. 여주에서 능지기를 하면서 석북은 늘 그랬듯이 소일거리로 시를 지었는데, 몇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국악에서 민요로 분류되는 노래 중에 작사가와 작곡자가 알려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조나 가곡의 경우, 시조시(時調詩)를 노랫말로 하고 있기에 작사가가 알려져 있는 경우는 상당히 많지만, 일반 민요의 경우 자연스럽게 발생하여 구전되어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작곡자는 거의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서도 시창(詩唱)으로 분류되는 의 경우 예외적으로 신광수 작사, 평양 기생 모란 작곡으로 추정된다.는 조선 영조 때의 문인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1713-1775)가 과거 때 시험 답안으로 제출한 시이다. 모두 44구의 칠언(七言)으로 상당히 긴 시이다. 원제목은 이었고 1746년(영조 22년) 가을에 시행된 한성시(漢城試)에서 2등에 오른 작품이다. 이 시는 당나라 시대의 시인 두보(杜甫)가 만년에 천하를 유랑하다가 악주(岳州)의 악양루에 올라 안녹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서도소리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발달한 우리의 전통 소리를 말한다. 서도소리에는 민요, 잡가, 입창(立唱), 재담소리, 송서(誦書), 시창(詩唱)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서도소리의 대표는 역시 다. 노랫말은 인생의 허무함을 노래하고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의 유래에 대해서는 서북인의 차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 때의 기생 부용이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다.노랫말을 살펴보면 시(詩)에서 여기저기 두서없이 차용한 흔적이 보이는 점, 한문 문투의 혼합적 사용이 보이는 점 등으로 보아, 오랜 세월에 걸쳐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기방(妓房) 등에서 구전되면서, 소리하는 자에 따라 변형되고 증편에 증편을 거듭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처럼 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방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 오래도록 구전되면서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에 이른 것이다.현재의 서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중학교 때이던가? 음악 시간이면 선생님은 피아노를 치고 아이들은 한 소절씩 따라서 노래를 불렀다. “성문 앞 샘물 곁에/ 서 있는 보리수”로 시작되는 노래를 배운 기억도 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보니 이 노래는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의 ‘겨울 나그네’라는 연작시에 역시 독일의 작곡가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연가곡 중의 하나라고 되어 있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와 같은 여러 동요를 배우다가 중학교 음악 시간에 ‘가곡’을 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 가안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 간다...”와 같은 ‘사공의 노래’나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와 같은 ‘동심초’도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학기말이 되면 음악은 실기 시험이 있어 노래 연습도 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학교에서 배운 가곡들은 음과 노랫말이 기억이 난다.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여러 연주자가 서서 소고를 두드리며 합창을 노래를 부르는 를 처음 보고 들었을 때, 참 특이한 노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판소리나 다른 국악의 소리를 연희하는 방식보다 우선 물량적으로 많은 사람이 동원되는 것이니 만큼, 원래 노래하는 주체가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일반적인 서도소리나 경기소리와는 상당히 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가 하는 생각으로 와 이와 흡사한 방식으로 연희되는 의 노랫말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에 대한 의문은 점점 호기심과 흥미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의 노랫말을 보면 참으로 이채롭다. 에는 여러 원본 시가(詩歌)가 다채롭게 들어있는 것이 발견된다. 는 네 곡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연곡 형식인데, 이 네 곡은 각각 , , , 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중 을 보면,
문학평론가 하응백이 인문학적 관점에서 여러 국악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나갑니다.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우리 민요 중에 발림을 섞어가며 서서 부르는 노래를 입창(立唱)이라 한다. 입창의 반대 개념은 좌창(坐唱)이다. 좌창에는 경기좌창, 서도좌창 등이 있으며 입창의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이다. 은 산타령이라고도 부른다.국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국악을 정의하라면 상당히 힘들어 한다. “판소리 같은 거 아니예요?”라고 답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맞다. 틀린 말이 아니다. 조금 거창하게 설명하면 국악은 우리 민족이 우리 땅에서 오래도록 향유했던 우리 민족 고유의 노래와 연주와 춤의 총칭이다.무엇이든 분류해서 설명하면 이해가 쉽다. 국악은 성악, 기악, 춤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럼 ‘농악’은 뭐예요? 하고 물을 수 있다. 농악은 춤과 기악이 함께 하는 국악의 한 장르다. 영산회상과 같은 관현악 합주, 가야금이나 대금 산조 같은 악기 중심의 소리 표현이 기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