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풍속화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중인《신윤복필여속도첩》에 들어있다.푸른색 치마를 입고 치마의 색보다 옅은 옥색의 처네를 쓴 여인이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모습을 담은 풍속화이다.이 여인이 지나가는 담장 너머로 보이는 기와집의 벽은 낡아서 허물어져 있고, 남루하고 처량해 보인다.신윤복은 여인의 뒷모습을 그림의 소재로 삼아 화면의 중앙에 배치했는데, 그의 다른 작품에서는 보기 어려운 경우다.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여인의 표정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쓸쓸해 보이는 뒷모습과 허물어져 가는 흙벽을 통해 주인공의 감정을 상상해 볼 수 있다.더욱이 푸른 치마와 대비가 되는 붉은색 신발의 날렵한 선은 목적지를 향해 부지런히 가고 있는 그녀의 처지를 말해 주는 듯하다.그림 속 여인은 더 이상 불러주는 곳이 없는 늙은 퇴기를 찾는다는 소식에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인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초상화 화폭 상단에 적힌 제발(題跋)에는 이 초상화가 어떤 연유로 그려졌고, 작가가 누구라는 것을 알려준다.그 내용을 보면 이제현이 33세 때이던 1319년, 고려 26대 왕인 충선왕을 시종하여 중국을 유람하던 중 왕의 하교로 원나라 화가 진감여(陳鑑如)가 이 초상을 그리고, 석학인 탕병룡(湯炳龍)이 찬문을 썼음을 알 수 있다.탕병룡의 찬문에 이어 이제현 자신도 시를 남겼는데, 고려로 돌아올 때 가져오지 못했던 자신의 초상화를 31년 뒤에 우연히 다시 보게 된 소감을 적어놓았다.초상화 속 이제현은 왼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데, 검은색의 두건을 쓰고, 곧은 깃인 직령(直領)의 심의를 입고,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어 공수 자세를 하고 있다.소매가 넓은 백색 심의(深衣)의 깃과 소매, 밑단에는 푸른색의 다른 옷감을 댔고, 소매 아래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가 그린 풍속화 가운데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으로, 씨름 경기를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그림을 보면, 양반, 상민 구분 없이 한자리에 모여 흥미진진하게 씨름 경기를 관람중이다. 구경꾼들은 크게 4그룹으로 나뉘어 화면 네 구석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들의 시선을 이으면 대각선이 만들어지고 그 시선의 중심에는 씨름꾼이 있다.승부가 나기 직전의 상황이라 구경꾼들은 흥분한 상태로 응원에 열중하고 있으며, 선수들 역시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화면 앞쪽에 등을 보인 사람이 상대를 들어 올려 넘어뜨리기 직전이고, 한쪽 다리가 들린 사람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버선발로 씨름에 전념하고 있는 선수들 옆으로 이들이 벗어놓은 짚신과 가죽신 한 쌍이 가지런하게 놓여있다.왼쪽 상단에 앉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다리를 모으고 앉아 있는 남자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관음보살(觀音菩薩)이 거주 하는 곳)의 연못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그린 불화(佛畵)다.『화엄경』의 「입법계품」에 나오는 장면인 선재동자가 53인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깨달음을 얻어 가는 과정 중 보타낙가산에 계신 관음보살을 찾아 법문을 듣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수월관음(水月觀音)’은 물에 비친 달을 보는 모습의 관음보살을 지칭하는 말로, 가장 오래된 수월관음도는 중국 둔황 석굴 내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시대에 그려진 관음보살도의 대부분이 수월관음도에 속한다.화면 오른쪽에 있는 바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하고 있는 관음보살은 전신을 감싸고 흘러내리는 백의의 사라(紗羅)를 입고 있는데, 투명한 옷감의 바탕에는 연화당초원문(蓮花唐草圓文)이 금물로 그려져 있다.또 사리 아래 받쳐 입은 붉은 색의 치마에는 백색 안료를 이용하여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을 촘촘하게 그려놓았다.보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 중인《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여덟 폭 병풍 중 한 폭으로, 홍살문이 세워진 관아 앞에서 두 명의 백성이 행차 중인 관리의 앞길을 막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행려풍속도병》병풍의 여덟 폭 중 한 폭에는 34세의 김홍도가 초여름의 어느 날 조선후기 화가인 강희언(姜熙彦 1738년~미상)의 집인 담졸헌(澹拙軒)에서 그렸다고 적혀있어, 회화사적으로 화가와 제작연도가 밝혀진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또한 각 폭마다 상단에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 1713~1791)의 그림 평이 쓰여 있어, 그림에 대한 강세황의 평가까지 동시에 알 수 있는 작품들이다.행려풍속도는 선비가 산천을 유람하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장면을 소재로 삼아 그린 일종의 풍속화다.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중인《행려풍속도병》의 그림들은 원래 낱장으로 전해오던 것을 8폭의 병풍으로 나중에 다시 표구한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신임 평안감사의 부임을 환영하기 위해 대동강변 부벽루에서 열린 연회 장면을 그린 풍속화이다, , 와 함께 세 폭으로 구성된 중 하나다.평안감사는 조선 시대의 관리들이 최고로 선망했던 벼슬자리였다. 감사는 각 도를 다스리는 지방관을 지칭하는데, 관찰사라고도 부른다.평안감사는 지금의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에 해당하는 지역을 맡아 다스렸는데, 감영이 평양에 있어 평양감사라고도 불렀으며, 경찰권·사법권·징세권 등 행정상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종이품의 벼슬이다.조선 시대에 평양은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과 상인들이 반드시 지나가는 곳이다 보니, 새로운 문물의 수입도 빠르고, 들고 나는 물산도 풍부했다.그런 이유로 평양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지역이었고, 문화와 예술의 수준도 다른 지역보다 높았다.그래서 신임 평안감사가 부임할 때 열리는 환영연은 규모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구한말의 유학자 겸 항일운동가인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의 반신 초상화다.초상화에 그려진 최익현은 사냥꾼들이 겨울철에 주로 쓰고 다니는 털모자를 쓰고, 흰색의 심의(深衣)를 입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복부까지만 화면에 담겨있는데, 소매 속에 넣어 앞으로 모은 손은 화면에서 잘렸다.심의를 입고 있지만 털모자를 쓰고 있어, 일반적으로 복건이나 유건을 쓰고 심의를 입은 조선 시대의 초상화와는 다른 독특한 모습이다.얼굴 바탕색은 갈색으로 칠하고, 윤곽과 이목구비는 짙은 선으로 그렸다.안면 전체는 잔 붓질을 이용한 미세한 선의 반복으로 음영을 표시하여 입체감을 주었는데, 눈 주위부터 귓구멍까지 안면의 볼록한 곳은 붓질을 적게 하여 밝게 처리하고, 움푹 들어간 곳은 잦은 붓질로 어둡게 묘사하였다.검은색 선으로 그린 눈매는 최익현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려준다.흰 자위의 아랫부분과 눈 꼬리 주변에 칠한 붉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풍속화가 단원(壇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작품으로, 6명의 악사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어린 소년이 신명나게 춤을 추는 장면을 그렸다.그림을 살펴보면, 왼쪽 상단에는 벙거지를 쓴 남자가 매달아 놓은 북을 치고 있는데,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펴낸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 편』에 따르면, 벙거지는 “조선 시대 신분이 낮은 무인 등이 쓰던 전립의 속칭으로 동물의 털에 습기와 열을 가한 후 다져서 펠트처럼 만들어 사발을 엎어 놓은 것처럼 둥글게 만들고 양태를 단 모자”를 말한다.그 옆엔 갓을 쓰고 포를 입은 악사 두 명이 앉아 한 사람은 장구를 치고, 다른 한 사람은 피리를 불고 있다. 장구를 치는 악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장단을 맞추고 있는 것 에 비해 피리를 부는 악사는 피리를 사선으로 잡고 부는데 거의 움직임이 없다.바로 옆에 있는 또 한명의 피리를 부는 악사는 짙은 청색의 포 위에 소매가 없는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조선 후기의 화가인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가 그린 풍속화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단원풍속도첩》에 포함되어 있는데 자리를 짜고 있는 아버지, 물레질을 하는 어머니, 글을 읽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그림을 살펴보면 부모들은 실을 잣거나 자리를 짜며 열심히 일을 하고 있으며, 자식은 나무 가지 하나를 들고 문장을 짚어 가며 글을 읽고 있다.넓은 깃에 짧은 고름이 달린 흰 저고리와 잔주름이 잡힌 담청색 치마를 입은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은 물레로 실을 뽑아내는 중이다.그림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렇게 물레질을 통해 뽑아낸 실로 어머니는 옷감도 짰을 것으로 보인다.실을 뽑거나 옷감을 짜는 일은 조선 시대에 여인들이 가족들을 위해 옷을 만들던 작업이기도 하지만, 가족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했던 노동 가운데 하나였다.고드랫돌을 앞뒤로 옮겨 가며 열심히 자리를 짜고 있는 아버지는 머리에 상자 모양의 사방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그림으로,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풍속화첩《혜원전신첩》에 포함된 풍속화 30점 중 하나다.이 그림의 제목인 의 의미를 살펴보면 ‘연소(年少)’는 ‘나이 어린 젊은이’를, ‘답청(踏靑)’은 ‘푸른 풀을 밟는다’는 것인데, 글자 그대로 청춘들이 파릇파릇한 풀을 밟으며 꽃놀이를 하러 떠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앳돼 보이는 양반들과 기녀들, 그리고 말을 끄는 두 명의 하인 등 모두 8명의 인물이 등장한다.한껏 잘 차려 입은 남자들은 돈 많고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들로 보이는데, 활동하기에 좋은 창의(氅衣)를 입고 있다.창의는 왕실 및 사대부가의 남성들이 입던 평상복으로, 뒤 중심선이 트인 겉옷으로 도포의 윗자락을 제거한 형태와 유사하다.그림 속 남자들은 걷기나 행동하기에 편리하도록 무릎 아래까지 행전(行纏)을 치고, 향주머니와 긴 띠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금관조복(金冠朝服)차림을 한 흥선 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초상화 속의 흥선 대원군은 머리에는 금관(金冠)을 쓰고, 조복을 입고, 검은색 목화를 착용한 채, 호피로 덮은 의자에 앉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이하응이 입고 있는 조복은 왕실의 종친이나 관원이 명절이나 경축일 또는 국가의 대사가 있을 때 입던 관복으로, 가장 화려한 예복이다.조복을 입을 때는 푸른색의 청초중단을 받쳐 입고, 붉은색 적초의를 맨 위에 입는다.또한 조복을 입을 때는 양관(梁冠)을 썼는데, 양관은 표면에 금칠이 되어 있어 금관(金冠)이라고도 불렀다.이로 인해 조복을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고 불렀다.금관이란 이름에 걸맞게 관은 매우 화려한데, 앞면과 뒷면을 모두 금으로 칠했으며 관에 꼽는 비녀도 금박 칠을 했다.대원군이 쓴 관은 세로로 선 다섯 개가 있는 오량관(五梁冠)으로, 이는 최고 품계인 1품을 나타낸다.그리고 금관조복을 입을 때는 상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조선 중기의 양명학자(陽明學者)이자 서예가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이 초상화의 작가는 신한평(申漢枰, 1726~미상)으로 본관은 고령이고, 호는 일재(逸齋)로 영조와 정조의 어진 제작에 참여했으며, 초상과 화조, 산수를 잘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 화원이다.조선시대 풍속화의 대가로 알려진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 ?~1813 이후)의 아버지다.조선 시대에 그려진 초상화중 반신상(半身像)은 대부분이 가슴이나 복부까지만 묘사하였는데, 은 두 다리의 일부까지 그려졌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초상화를 살펴보면 이광사는 얼굴을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두 손은 소매 속에 넣어 보이지 않지만 마주하여 앞으로 모으고 있다.머리에는 사방관(四方冠)을 쓰고 몸에는 미색의 도포를 입고 있다. 사방관은 조선 중기에 벼슬을 한 사람들이 평상시에 갓 대신에 즐겨 썼던 위가 막혀있는 사각형 모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은 길을 가는 일가족이 지나가는 젊은 선비와 마주치는 순간의 모습을 그린 단원(檀園)김홍도(金弘道, 1745~1806이후)의 풍속화로《단원풍속도첩》에 실려 있다.그림 속 소를 타고 가는 여인은 푸른색 치마에 남색 끝동을 단 회장저고리를 입어 반가의 부인으로 짐작되는데, 녹색 장옷을 쓰고 어린 아이를 본인 몸 앞에 앉히고, 한 손으론 장옷의 깃을 잡아 얼굴을 가리고 나머지 한 손으론 아이가 떨어지지 않게 안고 있다.소등에는 길마가 얹혀 있고, 그 위로 짚으로 짠 가마니 방석이 놓여 있는데, 여인은 그 위에 올라 앉아 있다.길마는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얹는 연장으로, 말 굽쇠 모양으로 구부러진 나무 2개를 앞뒤로 나란히 놓고 몇 개의 막대를 박아 이들을 고정시키고, 얹었을 때 소등이 상하지 않도록 안쪽에 짚으로 짠 언치를 대서 만든다.원래 양반가의 여성들이 외출을 하려면 부담롱(負擔籠: 물건을 넣어서 말에 실어 운반하는 조그마한 농짝)을 얹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풍속화로 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데 《혜원전신첩》안에 들어있다.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려진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고개 마루이고, 등장인물은 법고와 타악기를 치고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과, 두 손 가득 종이를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는 여인네들에게 그것을 내밀고 있는 고깔을 쓴 사람과, 이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양반 한사람이다.신윤복은 어떤 상황을 그린 것일까? 다행히 이 모습이 어떤 장면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해진다.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인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 한양의 풍속에 대해 쓴 『경도잡지(京都雜誌)』에는 ‘원일(元日)’ 즉 설날의 풍속 중에서 한양 도성에 출입이 금지된 승려들이 성 밖에서 법고를 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주를 받는 모습을 언급하고 있다.중들이 큰 북을 지고 들어와 울리는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명종 1년(1546)에 시행된 과거 시험에 합격한 동기생 중 5명이 20년 뒤 다시 전라도 광주에 있는 희경루(喜慶樓)에서 모임을 한 뒤 이때를 기념하여 그린 계회도이다.5명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과거합격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강섬(姜暹)이 1567년(선조 즉위년)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광주 인근에서 근무하거나,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동기생들을 불러 광주 객사 근처에 있던 희경루 에서 잔치를 열었던 것을 알 수 있다.이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주최자인 전라도 관찰사 강섬· 광주목사 최응(崔應龍)· 전 승문원 부정자 임복(林復)· 전라도병무우후 유극공(劉克恭)· 전 낙안군수 남효용(南效容) 등 총 5명이다.는 비단 바탕에 그려지고 족자 형태로 꾸며졌다. 그림 상단에 전서로 ‘喜慶樓榜會圖’라고 제목을 쓰고, 중단에 희경루에서 열린 방회 장면을 그리고, 하단에 좌목과 발문을 적었다. 좌목에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계(趙啓,1740~1813), 조두(趙蚪1753~1810), 조강(趙岡1755~1811) 삼형제의 모습을 한 폭의 화면에 그려 으로 알려져 있다.화면속의 삼형제는 모두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맏형인 조계를 가운데 축으로 삼아 삼각 구도로 배치를 한 점이 매우 독특한 초상화다.삼형제 모두 머리에 검은색의 오사모를 쓰고 있고, 담홍색의 관복을 입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흉배를 달지 않은 담홍색의 단령이다.이 옷은 조선 시대에 관리들이 일상 공무를 볼 때 입었던 집무복 으로, 시복(時服)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관리들은 격식과 의례를 갖추어야 할 때는 흉배를 단 검은색 흑단령을 착용하였고, 일상적인 업무를 볼 때는 시복인 담홍색 단령을 입었다.그림 속의 삼형제는 다른 종류의 대(帶)를 두르고 있어, 초상화를 그릴 당시 형제들의 품계가 달랐음을 알 수 있다.맏형인 조계가 착용한 대는 소금대(素金帶) 또는 학정금대(鶴頂金帶)라고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인물화다.얹은 머리를 곱게 올린 자그마한 얼굴의 아름다운 여인이 다소곳하게 서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여인은 반듯하고 환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 작고 쌍꺼풀이 없는 눈매, 단정하고 예쁘장한 코와 앵두를 닮은 살짝 다문 입술을 가지고 있다.입고 있는 짧은 회장저고리는 몸에 꼭 맞고 푸른 색 치마는 풍성하게 그려졌다. 주인공 여인은 고름에 매단 삼작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옷고름을 살짝 만지고 있는데, 말 대신 손짓으로 마음을 전하는 듯이 보인다.작가인 혜원 신윤복은 조선 시대 어느 화가보다 색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감각이 탁월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은은한 색조를 사용하면서, 군데군데 과감한 색을 포인트로 사용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역시 색의 강약과 대비를 절묘하게 사용하였는데, 회장저고리의 깃과 고름, 곁마기는 진한 자주색으로 그렸고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것으로 간송미술관 소장 풍속화첩 《혜원전신첩》에 들어있는 풍속화 30점 중 하나다.이 그림은 두 쌍의 남녀가 야외에서 사선으로 편 돗자리위에 앉아 쌍륙 놀이에 빠져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쌍륙을 두고 있는 여자가 차분하고 신중하게 그러나 도발하듯 막 말을 옮기려 하고 있는데, 승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순간을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여인의 경기 상대인 남자는 탕건도 벗어놓고 망건만 쓴 채로 쌍륙을 두고 있다. 남자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기다란 담뱃대를 입으로만 물고서 쌍륙판 쪽으로 몸을 굽혀 여자가 옮기려는 말을 노려보고 있는데, 승부에서 밀리고 있는 사람의 조바심 내는 모습이 느껴진다.뒤에서 구경하는 남자는 뒷짐을 진 채 점잖은 척 하고 있지만, 쌍륙판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몸을 앞으로 굽혔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 발은 이미 땅에서 떨어져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단원풍속도첩》에 실려 있는 풍속화로, 단원 김홍도가 동네 우물가에서 일어난 일을 포착하여 재미있게 그려낸 작품이다.그림 속에는 아낙네 둘이 물을 긷고 있고, 지나가던 남자 한 사람이 물을 얻어 마시고 있다. 이 남자는 갈증이 심한지 두레박 채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데, 챙이 넓은 갓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이 낮아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웃옷을 다 풀어 헤쳐 가슴 털을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다.이 사내가 입은 옷은 철릭으로 왕을 비롯하여 문관이나 무관 모두 융복(戎服)으로 착용하였으며, 하급 관료·악공·무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겉옷으로 즐겨 입었다. 조선 후기의 철릭은 포의 끝자락까지 주름을 잡은 형태여서 주름치마와 유사하였다.사내에게 두레박을 건네주는 고운 얼굴의 여인은 차마 사내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얼굴을 돌렸고, 다른 여인도 우물에만 시선을 고정시켜 남성의 행동을 일부러 외면하고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1919년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이 그린 권기수(權沂洙)의 63세 때 초상화다.초상화 오른쪽 상단에 “정삼품통정대부 중추원의관 송계 권기수 육십삼세상(正三品通政大夫 中樞院議官 松溪 權沂洙 六十三歲像)”이라 적혀 있고, 왼쪽 상부에는 을미년(1919년)에 채용신이 그렸다는 글귀가 적혀있다.초상화의 주인공인 권기수는 화려한 문양이 있는 옥색 전복 위로 딸기술이 달린 붉은색 세조대를 매고, 복숭아 모양의 홍색 단추를 달고 있는데, 이로 보아 그가 옷치장에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권기수는 고종 때 대원군이 주도한 사회 개혁에 따라 양태가 작아진 갓을 쓰고 있지만, 갓끈은 옥으로 만들어 매우 화려하다.양손은 소매 밖으로 내놓고 부채와 안경을 쥐고 있는데, 부채도 매듭에 금니를 칠한 붉은 술에 밀화장식을 매단 것이고, 안경테 역시 대모로 만들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이 초상화의 신분은 문인이지만, 주인공 권기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