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고종의 어진으로 붉은색 강사포(降紗袍)를 입고, 통천관(通天冠)을 쓴 고종이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고종이 머리에 쓰고 있는 통천관은 고종이 황제가 된 이후 착용한 관으로 12량(梁)에 12마리의 매미가 붙어 있고, 각 량 마다 5색 구슬을 12주씩 꿰어 장식하였다.강사포는 왕과 황제가 입는 붉은색 조복(朝服)으로, 주로 조정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을 때 입었다.강사포를 입을 때 함께 착용하는 관으로는 원유관(遠遊冠)과 통천관이 있는데, 원유관은 왕이 쓰는 것이고 통천관은 황제가 쓰는 관이다.따라서 통천관을 쓴 고종의 어진은 1897년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이후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고종은 두 손을 옷소매 속에서 꺼내지 않은 채 규(圭: 옥으로 만든 홀)를 잡고, 두 손을 가운데로 모으고,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붉은색의 강사포는 광택이 많이 나고 두께도 있어 보여 공단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이 어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의 풍속화로 풍속화첩 《혜원전신첩》(국보 135호)에 들어 있는 30점 중 하나이다.그믐달이 뜬 겨울 밤 여러 명의 인물들이 초롱을 든 시종을 앞세워 어디론가 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차가운 밤기운 때문인지 등장인물 들은 추위를 막기 위한 방한용 복장을 갖추었는데 그림 왼쪽에 그려진 붉은 철릭을 입은 별감은 머리에 쓴 초립 안에 방한모를 이중으로 착용하였다.그가 쓰고 있는 방한모가 ‘풍뎅이’인지 ‘남바위’인지는 그림 상에서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풍뎅이’와 ‘남바위’는 조선 시대에 남녀가 모두 착용했던 방한모로 서로 모양이 비슷하지만, ‘남바위’는 모자가 귀만 가리는데 반해, ‘풍뎅이’는 모자 양옆에 달린 볼끼를 사용하여 귀와 뺨, 턱까지 가릴 수 있으며,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뒤로 젖혀서 뒤통수에 매어 착용했다.길을 앞서 가고 있는 시종이 들고 있는 것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신임(申銋, 1639~1725)이 야복(野服)을 입은 모습을 그린 전신 초상화이다.그림 속의 신임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이자 전략기인 제갈 량(諸葛 亮)이 즐겨 썼다고 알려진 가운데가 높고 세로로 골이 나있는 와룡관(臥龍冠)을 쓰고, 옥색포를 걸치고, 나비 모양으로 묶은 홍색의 세조대를 맸다.오른쪽을 바라보고 반점 무늬가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반점 무늬가 있는 손잡이로 미루어 보아 줄기에 흑색 반점이 있는 반죽(斑竹)으로 만든 의자로 보인다. 두발을 놓은 족좌대는 낮고 단순한 형태이지만, 장식적인 나뭇결무늬가 돋보인다.팔자로 벌린 두 발엔 하늘색 바탕에 노란색의 무늬가 고운 태사혜(太史鞋)가 신겨져있다.신임이 착용한 와룡관이나, 입고 있는 옥색의 포 모두 얇고 가벼운 재질인 것으로 보아 이 초상화는 더운 계절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옥색 포의 깃은 직령이고, 소매통은 매우 넓으며, 소매 안쪽으로 내의의 흰색 소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신임 평안감사(平安監司)의 부임을 환영하기 위해 평양의 대동강에서 배를 띄우고 베풀어진 연회장면을 그린 것으로, , 와 함께 세 폭으로 구성된 중 하나이다.그림을 보면, 달이 뜬 밤 대동강변에 횃불이 줄지어 밝혀져 있다.강 건너 평양성 성벽에는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있고, 강 위에도 군데군데 불덩이들이 둥실 떠있다. 강변에 줄을 지어 서있는 사람들도 횃불을 들어 어둠을 밝히고 있다.여러 척의 배들이 새로 부임한 평안감사가 타고 있는 배를 호위하고 있고, 그배를 중심으로 강 한가운데에서 야연(夜宴)이 열리고 있다.신임 평안감사를 환영하기 위해 낮에는 풍광 좋은 누정에서 연회를 열고, 밤에는 불을 밝힌 강 한가운데서 야경을 즐기며 잔치를 열었던 것이다.그런데 동원된 사람들이나 배들의 숫자를 보면, 낮에 열린 환영잔치 보다 대동강에서 밤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단오를 즐기는 여인들을 주제로 그린 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의 대표적인 풍속화로,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인《혜원전신첩》에 들어있다.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계곡에서 목욕도 하고, 머리도 다듬고, 그네도 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그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여인들의 나신을 그렸다는 점에서 신윤복의 대담성과 에로틱한 정서가 강조되었다.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모내기를 마친 사람들이 잠깐이나마 여흥을 즐기며 다가오는 여름을 맞이하기 위해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절기이다.남자들은 주로 씨름을 즐겼고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타기를 하였다.신윤복은 그림의 왼쪽 아래 물가에서 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걷어 올린 채 몸을 씻고 있는 네 명의 여인과 오른쪽 언덕위에 앉아서 머리를 다듬고 있거나, 그네를 타고 있는 여인 세 명을 대각선으로 배치하였다.또한 오른쪽 아래에서 보자기로 싼 무엇인가를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반신 초상이다.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송시열은 유학자들의 상징인 심의(深衣)를 입고, 복건(幅巾)을 썼으며, 얼굴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얼굴은 선묘(線描)를 주로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선의 짙고 옅음으로 얼굴의 부분을 나누었다. 얼굴의 울퉁불퉁한 외곽선과 깊게 패인 주름은 마치 높은 산맥의 줄기를 그린 것처럼 보이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눈썹은 터럭 한 올 한 올을 정치하게 묘사하였다.눈은 크게 뜨지 않았지만 검은색의 세필로 속눈썹과 눈매를 선명하게 그렸고, 눈동자는 윤곽을 그리지 않고 옅은 회색으로 수정체를 칠했으며, 동공은 짙은 색으로 칠한 후 흰색 안료를 점으로 찍어 생생한 눈빛을 연출하였다.수염은 얼굴을 채색한 이후에 그렸는데, 구레나룻부터 턱까지 백색의 선으로 풍성하게 표현하였고, 수염 아래의 턱 선은 그리지 않았으며, 입은 수염에 감추어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조선 후기의 대표적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작품으로, 풍속화첩 인《혜원전신첩》(국보 135호)에 들어 있는 풍속화 30점 중 하나이다.‘시냇가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뜻의 제목을 갖고 있는 이 그림은 더운 여름날 빨래터에 모인 여인들이 빨래를 하고, 머리카락도 정리하고 있는 모습을 활을 들고 지나가는 남자가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다.실내에서 빨래하는 것이 어려웠던 조선 시대에는 야외인 냇가로 빨랫감을 가지고 나가 빨래를 해오는 것이 여인네들의 중요한 가사 노동 중 하나였다.날씨가 더워지면 여인들은 종종 빨래터에서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감기도 했다. 빨래터엔 늘 서너 명의 여인들이 모여 있었으며 모인 여인들의 연배도 다양했는데 이렇게 여러 사람이 모이는 빨래터는 정보를 나누고 소통하는 공간이 되었다.그림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인은 상반신을 노출한 채 빨래를 널고 있고, 흰 저고리를 입고 푸른색 치마 속에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조선 21대 왕인 영조(1694~1776) 임금의 모습을 그린 어진이다.영조는 조선의 역대 왕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임금으로, 각 방면에서 조선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국왕이었다.그는 탕평책을 써서 붕당의 대립을 완화시키고, 균역법을 실시하였으며, 청계천을 준설(浚渫)하고, 신문고를 설치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영조는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으며, 스스로도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다.영조는 어진 제작에도 매우 적극적인 왕이었다. 재위 기간 중 여섯 차례에 걸쳐 모두 12본의 어진이 제작된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아쉽게도 왕위에 오르기 전의 모습을 그린 과 여기에 소개하는 51세 때의 두 점만이 전해진다.51세의 모습을 그린 속 영조는 검은색 익선관을 쓰고, 붉은색의 곤룡포를 입은 모습으로 왼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이 어진은 반신상으로 제작되어 전신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매우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풍속화첩에 들어있는 작품으로,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의 집으로 가는 신랑과 그 일행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다.그림 속 인물들은 언덕을 돌아 나오고 있는 신랑을 중심으로 전체적으로 L자형 구도로 배치되었다. 경삿날 임에도 등롱꾼 중 한사람은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인 채로 청사초롱을 들고 길을 열고 있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벙거지를 쓴 차림이다. 조선후기에 일반적으로 청사초롱은 궁중에서는 왕세손이 사용하거나, 일반인은 혼례식에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등롱꾼 뒤로 검은색 단령을 입고 갓을 쓴 사람이 붉은 천으로 감싼 기러기를 안고 가고 있다. 붉은 보자기에 싼 목기러기 한 쌍을 들고, 초행길의 선두에 서서 가는 사람을 기럭아비라 하는데, 기럭아비는 대개 신랑 측에서 가장 복이 많은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관례였다.기러기는 암수가 한번 짝을 맺으면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예로부터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김홍도와 이명기가 합작해서 그린 서직수(徐直修, 1735~?)의 전신 입상 초상화이다.초상화의 주인공인 서직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썼던 이중관 형태의 쓰개인 동파관(東坡冠 :송나라의 시인인 소식이 썼다고 해서 그의 호를 따 동파관이라고 한다)을 쓰고 검은색 띠(광다회·廣多繪·넓고 크게 짠 끈목)를 두른 미색의 도포를 입었는데 소매통의 폭이 매우 넓다.초상화 속 서직수는 두 손을 소매 속에 넣어 밑으로 내려 마주잡고 있으며, 신을 신지 않은 버선발로 오른쪽을 보며 서 있다. 머리에 쓴 동파관은 음영의 차이를 두고 채색되어 입체감이 두드러지며, 전체적으로 옅은 살구색으로 채색된 얼굴은 외곽선과 이목구비에 잔 붓질을 많이 해서 윤곽이 뚜렷하게 나타난다.눈썹은 골격대로 위로 올라갔으며, 눈꺼풀에도 음영의 차이가 보인다. 쌍꺼풀은 굵은 선으로 그려 눈매가 뚜렷하게 완성되었고, 눈 앞머리 부분은 붉은색, 동공은 검은색, 홍채 주변은 금색과 청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풍속화로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국보 135호)에 들어 있다.이 그림은 양반 몇 명이 기녀와 악공을 불러 춤판을 벌이고 구경하는 장면을 그렸는데, 신윤복의 풍속화 중 가장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화면은 크게 삼단으로 나뉘어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무용을 감상하는 양반들과 기녀, 심부름꾼 시종이 그려져 있고, 중앙엔 춤을 추고 있는 두 명의 무용수, 하단엔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과 춤을 감상하는 양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들로만 화면을 꽉 채웠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작품이다.화면 왼쪽 별도의 돗자리에 앉아 죽부인에 기대어 느긋하게 구경하는 남자가 오늘의 검무 공연을 주최한 주인공으로 보이는데, 도포를 입고 자주색 띠를 매고 있어 벼슬이 당상관 이상인 지체 높은 양반으로 보인다. 주인공 보다 앳된 얼굴의 다른 남성들은 뒷줄에 앉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회혼례도첩(回婚禮圖帖)'은 혼인 60주년을 기념하여 회혼례를 여는 모습을 다섯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뒤 하나로 묶은 도첩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이 첩에는 회혼례의 전 과정이 매우 생생하게 그려져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림 외에 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회혼례를 치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첫 장면에는 고령인 신랑이 지팡이를 짚은 채, 기럭아비를 앞세우고 신부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두 번째 장면은 회혼례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고령의 신랑 신부는 자손과 하객들에게 둘러싸여 초례청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서있다. 처음 혼례를 올릴 때처럼 신부는 녹색의 원삼을 입고 가체를 올렸으며, 신랑은 남색의 단령을 입고 관모를 썼다.세 번째 장면은 회혼례 의례에서 제일 중요한 과정인 헌수(獻壽)를 하는 장면으로, 큰 상을 받은 노부부에게 자손과 하객들이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며 술잔을 올리고 시를 지어 바치고 있다.네 번째와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문인 화가인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그린 심득경(沈得經, 1673~1710)의 전신 초상화이다.그림 속의 심득경은 얼굴을 오른쪽으로 향하고 등받이가 없는 사각형의 의자에 앉아 있는데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즐겨 쓰던 동파관(東坡冠)을 쓰고, 옅은 회색의 도포를 입었으며, 녹색의 세조대로 허리를 묶었다. 그가 쓰고 있는 관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인 소동파가 썼던 관이라고 해서 동파관이라고 불렸는데, 내관과 외관이 겹쳐 있는 이중 형태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심득경은 두 손을 소매에 넣은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가죽으로 만든 녹색의 태사혜(太史鞋)를 신고 있다. 신발 뒤축에 ‘태사문(太史文)’이라는 당초문 형태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태사혜는 조선 시대 사대부가 평상복을 입을 때 신었던 신발이다.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유복(儒服) 차림의 문인 초상화들과 이 초상화를 비교해 보면 풍부해진 옷 주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고종이 왕의 일상복인 황색의 곤룡포를 착용하고, 익선관을 쓰고, 주칠에 금색 장식이 달린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을 그린 어진이다.어진 속 고종은 화문석이 깔린 바닥에 놓인 의자에 앉아 붉은 색 족좌대 위에 두발을 올려놓았다. 황색 곤룡포 속엔 붉은색 받침옷을 입었고, 받침옷의 깃이 위로 올라왔다. 각대는 가슴까지 위로 올려 맸고, 왼쪽 옷자락을 접어서 각대에 끼워 붉은색 안감을 드러냈다. 얼굴과 몸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두 손은 양쪽 무릎 위에 편안하게 올려놓았다.왼쪽 허벅지 위로 붉은색 술과 상아로 만든 호패가 보이는데, “임자생 갑자등국(壬子生 甲子登國)”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임자년(1852년)에 태어나 갑자년(1864)에 왕위에 오르다’는 뜻이다.이 어진은 표제가 없지만, “광무황제 사십구세어용(光武皇帝 四十九世御容)”이라는 표제가 있는 원광대 소장본 고종 어진과 전체적인 형식이 유사하여, 두 어진은 같은 초본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은 사람들이 모여 그림을 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풍속화로 《단원풍속도첩》에 들어 있는 작품이다.그림 속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모여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데, 그들 대부분은 유건(儒巾)을 쓰고 있다. 유건은 조선 시대에 벼슬이 없는 선비나 성균관 유생, 생원 등이 실내에서 착용하는 두건이다.그림 상단에 두 손으로 그림을 잡고 서있는 수염이 무성한 사람이 스승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자들로 보인다. 제자들 중에는 앳된 얼굴의 소년도 있고, 코와 턱에 수염이 난 장년의 남성도 있다. 스승 왼쪽 옆에 서있는 사람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마치 그림에 침이 튀는 것을 방지하려는 모습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로 옆에 서있는 사람은 한 손엔 담뱃대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그림을 받쳐 들고 있어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림 앞면에 등을 보이고 서서 그림을 맞들고 있는 두 사람은 미투리를 신은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조선 시대에는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기로소(耆老所)라는 관청을 만들고, 70세 이상으로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전·현직 문관들에게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비록 특별한 직무를 맡은 것은 아니지만, 조선 시대 관리들은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더할 나위 없는 영예로 여겼다. 기로소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한 차례씩 기로소에 입소한 원로들을 예우하고 위로하기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잔치를 시대와 참석 범위에 따라 ‘기로연’ 또는 ‘기영회’라고 불렀다. 기영회가 열리면 임금이 직접 술과 악(樂)을 내려주었다.이 그림은 조선 선조 때의 기영회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그림의 격이 높고,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은 작품이다. 족자로 꾸며져 있는데, ‘기영회도’라고 제목이 쓰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전서체로 쓴 ‘기영(耆英)’ 두 글자만이 남아 있고 ‘회도(繪圖)’ 두 글자는 보이지 않는다. 제목 아래 화면은 크게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초상화 속의 이채는 조선 시대 고위층 사대부들이 집에서 입던 편복 차림을 하고 있는데,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심의를 입은 채 정면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두 손은 소매 속에 감추고, 복부 근처에서 모으고 있다. 정자관은 북송의 대유학자인 정자(程子)가 착용했던 관이라 하여 정자관이라고 부르는 2단으로 된 관인데, 을 그린 이는 정자관의 말총 올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또한 검은 깃을 댄 흰색의 심의에는 옷의 주름이 음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옷감의 재질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초상화의 얼굴 표현을 통해 화가의 뛰어난 인물 묘사 능력을 볼 수 있는데, 이채의 얼굴을 그릴 때,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물이 마르기 전에 안료를 칠해 농담의 차이를 두는 운염(暈染)법을 사용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을 마주 대하는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하였는데, 검은색 안료와 흰색 안료를 이용하여 가는 붓으로 이채의 풍성한 눈썹 숱을 표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길쌈은 부녀자들이 주로 가정에서 하던 일로, 삼(麻)·모시·목화·누에 등에서 실을 뽑아 삼베와 모시, 무명, 명주 등의 천을 짜는 전 과정을 말한다. 길쌈은 크게 실잣기와 천짜기 두 가지 공정으로 나뉘는데, 원재료의 종류에 따라 실을 잣는 방법도 달랐다. 조선 시대에 가장 대표적으로 사용됐던 천으로는 비단·삼베·모시·무명이 있는데, 이 가운데 고려 말에 중국에서 전래된 무명이 생산 과정이 간단하면서도 보온성이나 내구성이 뛰어나 가장 많이 생산되는 일반적인 옷감이 되었다.이 그림은 길쌈의 두 가지 공정을 위아래 2단으로 배치한 뒤, 전체 구도를 ‘S’자 모양으로 역동적이게 구성하였다. 또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은 크게 그리고 먼 곳에 있는 사람은 작게 그리는 원근법을 사용하여 심도 깊은 화면을 보여준다.위쪽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여성은 실에 풀을 먹이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일은 베매기라고 하며 이렇게 풀을 먹인 실이 날줄이 된다. 본격적으로 옷감을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1335~1408)의 어진이다.태조는 조선을 개국한 시조로서의 상징성이 있었으므로 조선 왕실에서는 특별히 국초부터 태조 어진을 제작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봉안해왔다. 공식적으로 서울의 문소전을 비롯하여 경주·개성·평양·전주·영흥의 여섯 곳에 건물을 지어 태조 어진을 봉안했고, 이후에도 많은 태조 어진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 전해지고 있는 태조 어진은 전주의 경기전에 봉안된 한 점뿐이다. 과거에는 어진이 낡고 오래되면 다시 그려 보관했는데, 이 어진 역시 고종 9년(1872)에 새로 이모한 어진이다.익선관을 쓰고 푸른색 곤룡포를 입은 태조는 두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곤룡포 속에 입은 포의 깃이 목 위로 바짝 올라와 있어 경건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어진 이모 당시 흰색 비단에 써서 붙인 ‘태조대왕어용 소자사복지구년 임신 이모(太祖大王御容 小子嗣服之九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는 이원(梨園), 즉 장악원(掌樂院)에서 열린 기로회 장면을 그린 기록화다. 버드나무 늘어진 아름다운 봄날, 스물 한 명의 노인이 한자리에 모여 잔치를 열었다. 이들이 잔치를 연 곳은 조선 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을 관장하던 장악원, 다른 말로 이원이라 부른 관청 내 누정이다. 이 잔치에 참석한 인물들은 전 장악원 도정 홍수렴을 포함하여 모두 21명으로, 65세부터 85세까지 20년을 아우르는 연령대의 노인들이다. 이들은 5품에서 6품의 관직을 역임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기로회는 전·현직 고위 관리들의 공적인 모임이라는 성격이 강했는데, 18세기가 되면서 사적인 모임으로 성격이 변하고, 참여 범위도 확대되었다. 원래 ‘기로(耆老)’는 퇴임하거나 나이 든 관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일반 사대부 노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일반 노인들의 모임도 아취를 가미하여 기로회라고 부른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