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545년(명종 즉위년) 8월 22일, 경복궁 충순당에서는 중신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 문정왕후(文定王后: 중종의 제2계비 윤씨)와 문종이 앉고 그 아래 문무백관들이 도열했다. 왕위에 오른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문종의 나이는 겨우 열한 살이었다. 때문에 친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다.“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임금을 위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소문을 따져보기 위함이요. 누가 먼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소?”낮지만 묵직한 문정왕후의 목소리가 충순당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병조판서 이기가 먼저 나섰다.“찬성 윤임이 주상을 물리치고 다른 인물을 옹립하려 했다하옵니다. 이는 대역죄에 해당하는 일이므로 엄중하게 조사하여 큰 벌로 다스려야 합니다.”병조판서가 말을 마치자마자 이번에는 지중추부사 정순붕이 나섰다. “좌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도 윤임과 함께 역모를 모의했다고 합니다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34년(세종 16년), 세종은 이순지(李純之)를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순지의 본관은 양성(陽城)이며 자는 성보(誠甫)로, 1427년(세종 9년) 문과에 급제했다. 문관 출신이었지만 서울의 위도를 정확하게 계산해 낼 정도로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순지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세종이 야심차게 추진하는 과학 프로젝트를 총괄 지휘하게 된 것이었다.이순지와 함께 『칠정산 내외편』을 완성1435년(세종 17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기 위해서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세종으로부터 후임을 천거하라는 명을 받은 승정원은 집현전 정자로 있던 김담을 ‘나이가 젊고 총민(聰敏)하고 영오(潁悟)하므로 맡길 만한 사람’이라면서 추천했다.그러나 세종은 관직을 시작한 지 겨우 1년밖에 되지 않은 새파란 나이의 김담만으로는 안심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삼년상을 치르고 있던 이순지를 정4품으로 승진시키면서 1년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435년(세종 17년) 12월의 어느 추운 날, 집현전(集賢殿) 정자(正字: 정9품) 김담은 연신 손을 비비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쌀쌀했다. 손이 곱아서 책장을 넘기는 게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김담(金淡)은 전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부러워하는 집현전에 근무하기 시작한 게 불과 1년 전이었다. 과거에 합격하자마자 곧장 발탁되어 집현전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별을 헤아리는 남자집현전은 조선시대 학문 연구를 위해서 궁중에 설치한 기관으로, 학자를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하는데 주력했다. 세조부터 성종에 이르는 조선 초기의 정치, 사회, 문화의 제도를 마련하고 이끌어간 대신들은 대부분 집현전 출신이었다.특히 세종은 민족문화를 창달하는 기관으로서 집현전을 매우 중요시했다. 뛰어난 인재를 집현전에 많이 배속했으며, 일단 집현전에 소속되면 다른 관직으로 옮기지 않고 계속 머물면서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297년(충렬왕 23년) 첨의부 첨의참리가 된 안향은 세자이보를 맡았다. 세자이보는 왕위 계승 1순위인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의 자리였다. 아버지 충렬왕과 원나라 공주 출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세자는 세 살 때 세 자로 책봉된 이후 줄곧 원나라에서 성장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으로 반식민지 상태였다. 고려 조정에서도 아버지 충렬왕보다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권력이 더 강했다.세자의 스승이 되다세자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국대장공주와 원 나라에 눌려 있던 충렬왕은 정사를 멀리 하고 자주 사냥을 나가거나 연회를 즐겼다. 1290년 만주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합단적(哈丹賊)이 원나라에 패하자 고려로 침범해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충렬왕은 자신은 늙었다면서 적과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원나라에 있던 세자는 외할아버지(원나라 세조)에게 요청해서 1만 명의 구원부대를 이끌고 합단
[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275년(충렬왕 원년), 안향은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했다. 벼슬길에 나선 이후 처음으로 지방관에 임명된 안향은 백성들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서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하는 치적을 쌓았다.원나라의 탄생과 일본 원정몽골과의 오랜 전란에 지친 백성들은 구원의 수단으로 토속신앙인 무교를 깊이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유교를 공부한 안향은 무교를 미신으로 여기고 배척하여 민생을 안정시켰다.『고려사(高麗史)』는 안향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충렬왕 원년에 상주판관이 되었다. 그때 요괴를 받드는 여자 무당 세 명이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공중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자 다들 앞을 다투어 엎드리고 수령도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무당들이 상주에 이르렀을 때 안향이 잡아서 곤장을 치고 칼을 씌우자 무당들은 ‘신의 저주가 내릴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지만 안향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1170년부터 100년 동안 계속된 무신정권과, 몽골(원나라)의 잦은 침입 및 간섭으로 말미암아 고려는 많은 혼란과 시련을 겪었다. 원나라에 대항 하여 40년 동안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굴복하고 화친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려왕실과 귀족계급은 원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고려의 부흥을 꾀하는 학문1289년(충렬왕 15년), 원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위치인 유학제거 사의 책임자로 있던 안향은 충렬왕의 원나라 방문을 수행하여 5개월 동 안 연경(원나라의 수도, 지금의 베이징)에 머물렀다. 일찍부터 유학에 깊은 관심이 있었던 안향(安珦)은 이때 주자학(성리학)을 처음 접하고 이것이야말로 유교의 정통임을 깨달았다.이듬해 봄 귀국할 때 많은 주자서와 함께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온 안향은 국학교육의 부흥과 민족사상의 정립을 위해 성리학을 널리 보급시켰다. 원나라를 통해 고려에 들어온 성리학의 근본 사상인 민족주의는 결국 원나라 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