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 좋은 우럭을 잡은 필자. [사진=하응백 문화에디터]
씨알 좋은 우럭을 잡은 필자. [사진=하응백 문화에디터]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요즘 한 방송사에서 <도시어부>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선상낚시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다. 선상낚시를 전혀 안 해 본 사람조차도 “언제 한 번 데려가 달라”고 부탁을 한다. 초보자를 데리고 가서 낚시를 가이드 한다는 것은 상당히 귀찮고 성가시지만, 맘씨 좋은 꾼들은 기꺼이 그런 희생을 감내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선상낚시는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낚시의 역사는 수만 년이 넘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레저 개념의 바다낚시가 시작된 것은 약 50년 전의 일이다. 1964년 10월 31일 경향신문의 <낚시 결산>이란 기사를 보면 당시 레저 낚시의 상황을 알 수 있어 상당히 흥미롭다. 이 기사에서는 당시 주류였던 붕어낚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낚시 인구는 20여만 운운(云云) 하지만 그건 약간 과장. 서울 장안엔 현재 62군데의 낚시회가 있다. 직장별 낚시회는 30여 군데. 그러니 1만여 명의 태공(太公)은 분명한 숫자이다. 여기에 개인별 숫자를 합치면 약 3만. 그러니 전국엔 약 10만 명의 낚시인이 있다고 어림할 수 있다. 작년보다 2만 명이 증가한 셈. 올해에 새로 생긴 낚시회만도 서울에서 20여 군데나 된다. 대개는 어구상을 겸하고 있지만 순수한 스포츠 동인 정신으로 모인 회도 몇 군데. 

 서울에만 약 3만 명의 붕어 낚시꾼이 있고, 그 중 1만여 명은 낚시회에 소속이 되어 단체로 낚시를 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개인 승용차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기에 개인 출조의 경우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을 것이다. 이 경우 이동에 상당한 불편을 감수해야했기에 단체 버스로 출조하기 위해서는 낚시회에 소속이 되어 출조를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적극적으로 낚시를 다닌 꾼은 약 1만 명 정도로 보면 타당할 것이다. 상당히 많은 숫자다. 그러다보니 부작용도 생겨났다. 같은 기사를 들여다본다.

낚시도 “승리보다 참가에 의의가 있다”는 스포츠 정신에서 시작된다. 주말을 신선한 자연과 마주하고 정적 속에서 보내려는 의도는 사뭇 아름답다. 그러나 낚시 인구가 늘고 나선 무슨 경연대회처럼 돼 버렸다. 새벽녘 낚시터에 닿자마자 명당을 차지하기 위해 뜀박질을 하고 남의 자리를 넘겨다보는 일, 시간이 ㅡ좀 늦었다고 버스 운전사를 윽박지르고, 그래서 낚시 버스가 두 번이나 뒤집힌 사고가 일어났다. 신문사엔 때로 터무니없는 거짓 기록이 보고된다. 그걸로 낚시회의 우열을 샘하려는 욕심이 숨어 있는 것이다. 장삿속으로 회(會)를 벌여 놓은 낚시‘장이’들. 논두렁이 제멋대로 짓밟히고 가을철엔 벼낟가리가 제대로 있질 못한다. 그걸 끌어다가 푹신한 안장으로 삼기 때문이다.

고기를 더 많이 잡기 위해 꾼들끼리 경쟁하는 모습과 상업성에 치우친 낚시회의 낚시‘장이’들을 비판하고 있다. 낚시버스 사고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자연을 훼손하기까지 하는 꾼들의 행태를 나무라고 있는 것이다. 이미 1964년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신경지 바다낚시
<평화(平和)>의 바다낚시는 작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올핸 <전국(全國)바다낚시회>가 또 하나 탄생. 무궁무진한 바다의 가슴을 두드렸다. 민어 농어 우럭 갯장어 등 징그럽게 큰 거물(巨物)들을 올리는 맛도 통쾌하다. 인천 앞바다가 바로 그 낚시터. 낚싯대에 느껴지는 짜릿한 재미는 덜하지만 낚싯줄이 윙윙 우는 맛은 또한 신경지다. 내년엔 민물낚시터의 원거리, 그 따분한 재미에 질려 바다낚시가 새로운 개척지로 군림할 것이란 전망들이다.

1963년 <평화바다낚시회>가, 1964년 <전국바다낚시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인 바다레져낚시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바다낚시의 대상어종이나 장비는 어떠했을까? 1964년 9월 26일자 경향신문을 보면, 당시 바다낚시의 개척자로 보이는 <전국바다낚시회> 송치훈(宋治勳) 회장의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송회장은 장소로 인천 앞바다를 이야기한다. “인천 앞 무의도, 용유도 부근은 농어와 민어가, 팔미도 근처에는 우럭, 인천항 앞과 영종도, 범섬, 작약도 근처에는 장어, 우럭, 땅도미 등이 몰린다. 고기가 모이는 곳은 해안 2-3백m 나가 골이 진 곳으로 아래는 돌밭과 흙밭이 있는 사이이다”고 말한다. 팔미도 근처만 가도 우럭이 잡혔다니 요즘 바다 환경과 대비하여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장비는 릴이나 합사, 낚싯대가 없었다. 때문에 ‘자새’(낚싯줄을 감아놓은 얼레)에 낚싯줄을 감아 바늘 세 개를 달아 낚싯줄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봉돌은 30호에서 80호를 사용했다. 이렇게 해도 고기가 관으로 잡혔다고 한다. 미끼는 미꾸라지, 갯지렁이, 새우 등을 썼다. 극성맞은 꾼들은 닭이나 오리의 내장을 준비하기도 했다. 출조지는 주로 인천의 만석부두였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다 선상낚시는 70년대, 80년대 낚시회 위주로 성장하여, 인천의 남항부두, 만석부두를 주 출조지로 하여 서서히 인구를 넓히기 시작했다. 90년대 들면서 개인 자가용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전문 낚시배가 대형화되고, 장비도 현대화되기 시작했다.

선상낚시의 매력은 역시 많은 조과이다. 주꾸미와 갑오징어를 무거울 정도로 잡은 필자. [사진=하응백 문화에디터]
선상낚시의 매력은 역시 많은 조과이다. 주꾸미와 갑오징어를 무거울 정도로 잡은 필자. [사진=하응백 문화에디터]

필자가 처음 낚시를 시작한 1990년대 초반에는 선상바다 낚싯대와 장구통릴, 합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다. 당시만 해도 자새를 사용하는 사람도 꾼들도 상당히 많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전동릴과 합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면서 선상바다낚시의 대중화시대가 열린다. 한편으로 보면 선상바다낚시 확산은 레저에 대한 수요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수요 증가와 맞물려 공급 측면에서 출조 항구, 낚시점과 낚싯배, 낚시 장비 등이 같이 성장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바다선상낚시는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2010년대 이후 바다선상낚시는 세분화, 전문화 추세로 치닫고 있다. 어종별로, 낚시 방법 별로 점점 전문화되어가는 것이다. 물론 우럭이나 주꾸미와 같이 대중적인 선상낚시도 확산 추세다. 

요즘은 처음 낚시를 가는 사람을 주꾸미 선상 낚시 철이 되는 가을의 주말, 오천항과 같은 서해의 항구로 데려가면, 새벽부터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낚시 인파에 깜짝 놀란다. 해도 뜨기 전 남대문 시장보다 더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이렇게 낚시하는 사람이 많은가 하고 놀라는 것이다. 그리고 배를 타고 나가 충남 보령 원산도 앞바다나, 군산 연도 앞바다에 가면, 해가 서서히 뜨고 난 뒤, 1592년 임진년 4월 부산 앞바다를 뒤덮은 왜적선(倭敵船)의 숫자보다 훨씬 많을 것임에 분명한 주꾸미 낚싯배들이 연출하는 광경을 보고, 또 한 번 깜짝 놀란다. 그 많은 적선은 오로지 주꾸미를 포획하기 위해 새벽부터 항구를 부지런히 출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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