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해정 기고가
노해정 기고가

“결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우리”

[뉴스퀘스트=노해정 휴먼멘토링 대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유한하다는 것이 최신 물리학의 견해이다. 양자라고 하는 미시의 세계에서 최소공간이라는 개념이 밝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물리적 세상은 상대적인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입자와 입자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중력의 루프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 파동은 연속되며 연동된다.

그 결과 마치 물이 모여서 너울과 파도를 이루듯이 중력장 상호 간의 에너지에 의해 간섭현상이 지속 되며 이 같은 반응이 우주를 변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인 물리적 세상에서는 결과라고 하는 궁극의 도착점이 없다. 상대적인 결과가 연속되어 끝없는 새로운 과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제한되어 있는 원의 곡률에 무수히 많은 선을 그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죽음조차도 생(生), 사(死), 휴(休)라고 하는 물리적 자연계의 연계반응일 뿐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물리법칙이 작용하지 않는 절대적인 세계가 있으니 이곳이 곧 마음의 세상이다. 다시 말하자면 상대적 세계는 유한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절대적 세계는 유한하지 않다. 본래 마음의 경계는 없기 때문이다.

결과(結)의 사전적 의미는 열매를 맺거나 어떤 원인으로 생기는 결말을 의미한다. 우리는 결과를 원인에 의한 것으로 알고 있고, 그에 따라서 결과를 내는 원인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배워 왔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사회는 지나치게 결과에만 집착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현상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절친한 지인이 늦둥이를 ‘득녀’ 하였다. 첫 아이면서 늦둥이, 거기에다가 딸이니 그 아기가 그에게 얼마나 예쁘고 사랑스럽겠는가? 지인은 나에게 딸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이 아이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게 좋을까요?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기를 가진 기쁨,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서 힘들게 다가오지만 기쁘게 보내는 시간과 아름다운 기억들, 또 아내와 더불어 아기와 함께할 값진 순간들, 아기를 가르치면서 느끼게 될 보람과 아이와의 정서적 교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보다는 갓 태어난 아기가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지, 좋은 대학을 들어갈지를 걱정을 하다니. 어쩐지 측은한 감정이 들었다. 지인 역시 학식이 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대학교수였기에 필자는 잠시 가벼운 멘붕을 경험했다.

그래도 이 질문은 좀 낫다. 이번에는 한 1년 정도 지난 얘기이다.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사회적 위치가 있는 한 노신사께서 손자를 얻었다. 이분은 그 당시 필자에게 역시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면서 ‘겸연쩍은 표정을 띠며’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 손주가 흐흐 ~ 문과일까요? 이과일까요?”( 이 당시 필자의 멘붕은 지인의 경우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왔었다. )

이 어른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강남에서 엄마들 사이에 도는 우스갯 소리에 따르면, 할아버지의 경제력이 아이를 명문대에 진학시키는 데에 크게 일조한다고 한다. 이 할아버지의 경우 경제력도 있는 데다가 손자 교육에 대한 관심 또한 매우 높으니 그야말로 특급 할아버지인 셈이다.

이 노신사의 관심은 손자와 함께 행복하게 지낼 기쁨의 순간들이 아니었고, 오로지 자신의 손자를 좋은 대학에 들여보내기 위하여 어떻게 준비할지의 전략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다음 질문은 이 아기가 장차 좋은 의과대학에 들어갈까요? 이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 이었다.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점이나 사주를 자주 보러 다닌다. 그들은 나쁜 점괘를 얻거나 상담의 내용이 나쁜 결과를 예측할 때, 이것을 경고나 경각심을 느끼는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대비하려 하기보다는 좋은 점괘나 상담의 결과를 얘기해 주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발에 문턱이 닳도록 점집 등을 드나들게 된다.

심지어 개운을 해준다거나 부적이나 굿을 통해서 흉을 길로 바꿀 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금전적 손실을 보거나 심한 경우에 많은 자산을 탕진하기도 한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공통점이 있다. 욕심을 낸다는 것이다. 지나친 욕심이 결국 사기를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사기를 당하는 원인 요소는 ‘탐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적인 세상에서는 욕구와 욕망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음료와 술을 마시고, 더 좋은 집에서 살고, 더 좋은 세상을 여행하고, 더 좋은 문화와 권력을 누리고 싶은 것이 인간과 생명의 본능인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인 대상 세계에서는 반드시 물질의 여유를 통해 얻어지는 상대적인 행복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결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 2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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