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에 마음을 맡기다

허련 '기명도', 翰墨淸緣帖, 1879, 지본담채, 18.4x25.4cm, 남농미술문화재단.
허련 '기명도', 翰墨淸緣帖, 1879, 지본담채, 18.4x25.4cm, 남농미술문화재단.

[뉴스퀘스트=최혜인(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찻잔과 자사호, 그리고 인장. 배경에 별다른 묘사 없이 세 가지 기물들만 나열되어 있다. 이 작품은 허련(許鍊, 1809~1892)이 그린〈기명도〉《한묵청연첩(翰墨淸緣帖)》이다. 《한묵청연》은 지인들에게서 받은 시와 자신의 그림들을 함께 모아 만든 시화첩(詩畵帖)이다. 이 시화첩이 만들어질 당시 허련의 나이는 72세였다. 시화첩에는 〈기명〉과 함께〈연하(蓮蝦)〉,〈노매구석(老梅癯石)〉,〈난(蘭)〉등 네 점이 실려 있다. 모두 배경을 생략하고 그림 소재에 집중하여 그렸다.

〈기명도〉를 다시 살펴보면, 엎어진 찻잔과 당당한 몸체의 자사호가 있다. 찻잔 표면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선들은 빙렬(氷裂)로 보이는데, 빙렬은 도자기를 굽는 과정에서 유약과 흙의 온도 차이로 생겨난 미세하게 난 금을 일컫는다. 차를 우릴 때 쓰는 주전자인 자사호는 붉은 흙[紫沙]으로 만들어져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림에서 자사호 특유의 색감을 잘 표현해 냈다. 어깨 부분에 대나무 잎도 간결하면서 멋스럽게 그려졌다. 화가의 예리한 관찰력을 알 수 있다. 그 옆에는 백문방형(白文方形) 인장이 놓여 있다. 마치 그림에 찍혀진 듯 표현하여 재밌다.

찻잔과 자사호는 차 도구라는 같은 카테고리 안에 있지만, 인장은 이것들과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세 기물들이 한 화면에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이러한 구도와 소재의 선택은 화가와 그가 살았던 시대상이 반영 되었다.

허련이 살았던 시기는 “물건을 지나치게 애정하고 집착하게 되면 원대한 뜻을 잃게 된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의 개념에서 벗어나, 대상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고자 하는 의식이 생겨났다. 예전에는 물건에 마음이 쏠리면 큰 뜻을 잃어버린다고 하여 물건을 좋아하고 수집하는 일을 꺼리고 피하였지만, 18세기 후반 19세기로 오면서 ‘우아한 취미’라 하여 오히려 적극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 대상으로 고동서화(古董書畵)는 물론이고 분재, 괴석, 인장, 심지어 비둘기나 앵무새도 완상하고 즐겨 그 범위는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즉, 완물상지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사물에 대한 집착이 18세기 후반부터는 지식인이라면 갖춰져야 할 자질로 인식이 변화된 것이다. 당시 조선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원굉도(袁宏道, 1568~1610)는 “ … 혜강(嵇康)은 쇠 단련하기를 좋아하였고, 무자(武子; 왕제의 자)는 말을 좋아하였으며, 육우(陸羽)는 차를 좋아하였고, 미전(米顚; 미불)은 바위를 좋아하였으며, 예운림(倪雲林; 예찬의 호)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였으니, 이 사람들은 모두가 어느 한쪽에 지나칠 정도로 취향을 응집함으로써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남달리 웅장하고 빼어난 기운을 거기에 기탁하였던 사람들이다. … (嵇康之鍛也, 武子之馬也, 陸羽之茶也, 米癲之石也, 倪雲林之潔也, 皆以癖而寄其磊塊㒞逸之氣者也.『袁中郞集』卷24 「甁史幷引」)”라 하였으니, 한 가지에 몰입하는 것이 오히려 세속에서 자유로워지고 기운을 흩트리지 않는 일이라고 하였다.

완상의 대상은 올바른 성정(性情)을 길러주고, 세속과 탈속 공간을 구분시켜주면서 운치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사물 그 자체에 관심을 두면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녹앵무경(綠鸚鵡經)』 등 백과사전류가 많이 나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회화작품에서도 18세기 이전에는 사물은 주로 그림의 부수적 요소로 그려졌지만, 18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기명도〉와 같이 사물이 단독주제인 그림들이 등장한다. 사물에 대한 집착[癖, 痴]을 중요한 문화적 소양으로 평가한 시대적 분위기와 연관된다. 그 당시 차벽(茶癖)에 대해 말한 이들도 있다. 차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기명도〉의 자사호와 다완은 완상을 위한 물건으로, 허련이‘내면을 정화시키고, 고상한 문인문화에 필요한 대상’으로 인지하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완상의 물건으로 자사호와 다완을 선택했다는 것은 그가 음다 생활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림은 주어진 환경이 반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련은 일상에서 음다 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차가 지닌 맑고 깨끗한 세계를 지향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 김정희(金正喜, 1786~1856)를 스승으로 모셨는데, 두 소중한 인연을 이어 준 이가 바로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이다. 초의선사는 사원차(寺院茶)의 복원, 『다신전(茶神傳)』등의 편찬과 『동다송(東茶頌)』의 저술로 조선 후기 차 문화 중흥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다.

초의가 허련에게 차를 보내주면, 허련은“지난번 연영에 보낸 차는 비록 스님(초의선사)이 손수 감독해 만든 것은 아니지만, 차품이 깨끗하고 맛이 맑아 사람들에게 칭찬 받을 만합니다. … 이 한포의 차로는 부족하니 애석합니다. (向之蓮營所送茶物 雖非師之親手監封 品潔味淸 見稱於使家 奪人見功 有近歉然這 … 一苞茶 無足 爲惜矣)”이와 같은 편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의 음다 생활과 청정한 삶의 지향은 자연스럽게 다구를 완호(玩好)하게 되고 그것을 관찰하면서, 회화 제작으로까지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기명도〉는 그 결과인 것이다. 허련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감상해 보길 바란다.

·참고문헌

심경호 외 2인 역주, 『(역주)원중랑집』권5, 소명출판, 2004.

박동춘, 「草衣禪師의 茶文化觀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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