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 '심득경 초상', 1710년, 비단에 채색, 160.3cm×77cm, 보물148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윤두서 '심득경 초상', 1710년, 비단에 채색, 160.3cm×77cm, 보물1488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사대부 문인 화가인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그린 심득경(沈得經, 1673~1710)의 전신 초상화이다.

그림 속의 심득경은 얼굴을 오른쪽으로 향하고 등받이가 없는 사각형의 의자에 앉아 있는데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평상시에 즐겨 쓰던 동파관(東坡冠)을 쓰고, 옅은 회색의 도포를 입었으며, 녹색의 세조대로 허리를 묶었다. 그가 쓰고 있는 관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인 소동파가 썼던 관이라고 해서 동파관이라고 불렸는데, 내관과 외관이 겹쳐 있는 이중 형태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심득경은 두 손을 소매에 넣은 공수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가죽으로 만든 녹색의 태사혜(太史鞋)를 신고 있다. 신발 뒤축에 ‘태사문(太史文)’이라는 당초문 형태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태사혜는 조선 시대 사대부가 평상복을 입을 때 신었던 신발이다.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유복(儒服) 차림의 문인 초상화들과 이 초상화를 비교해 보면 풍부해진 옷 주름의 표현이나 음영 처리 면에서 이 초상화의 사실감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윤두서는 심득경의 얼굴 윤곽, 입 주변의 팔자주름, 눈 주위는 굵고 부드러운 선으로 그린 반면 수염과 눈썹은 세필로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그런데 이 초상화는 심득경이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고 그가 죽은 뒤 화가가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화상하며 그린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림 속 심득경의 표정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아련하고 시선 역시 초점을 잃은 듯 공허해 보이지만 심득경이란 사람이 지니고 있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전달되고 있다.

비단 세 폭을 이어 붙여 만든 화폭 상단에 ‘정재처사심공진(定齋處士沈公眞)’이라는 표제가 적혀있고 좌우로 찬시가 적혀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명필로 이름난 이서(李漵, 1662~1723)가 짓고 윤두서가 쓴 찬문이 적혀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형골은 준수하고 기질은 맑다.

심신은 순수하고 옥과 얼음처럼 깨끗하다.

인자하고 겸손하며 공정하고 정직하다.

얼굴은 반듯하며 길쭉하고 낯빛은 발고 깨끗하다.

눈은 맑고 귀는 단정하며 입술은 붉고 치아는 고르다.

귀는 시원스럽고 귀밑털은 성글며 눈썹은 단정하고 수염은 맑다.

그 거동은 단정하고 공순하며 목소리는 맑고 깨끗하다.

초상이 엄연하여 마치 살아 있는 듯

그를 보고 있는 듯 하고 그 목소리 듣고 있는 듯하다.

아 그대 모습 아니면 누가 그대의 덕(德)과 성(誠)을 알 수 있으리오?

여흥 이서가 찬문을 짓고 윤두서가 글을 쓰다.

왼쪽 상단에는 이서가 쓴 찬시가 적혀있다.

마음은 물에 비친 달, 그 덕은 옥이요 얼음이다.

질문도 잘했고 열심히 실천했으며 깨달은 것은 확실히 지켰다.

그대를 잃은 것은 우리 도의 끝이로다.

(찬문은 모두 조선미,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 돌베개, 2009, 244쪽에서 인용.)

그림 하단 오른쪽에 1710년 11월, 심득경이 세상을 떠나고 4개월 뒤에 윤두서가 이 초상화를 그렸다는 내용이 적혀있어 이 초상화가 심득경 사후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윤두서는 인물화에 능통했던 사대부 문인 화가로 자신의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 유명하다. 그의 그림 실력은 친한 벗인 심득경을 묘사한 초상화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이서가 찬문에서 쓴 것처럼, 반듯하고 길쭉한 얼굴, 밝고 깨끗한 낯빛, 맑은 눈, 붉은 입술, 성근 귀밑 털, 단정한 수염 등 얼굴 모양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 심득경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였다.

백남주 큐레이터
백남주 큐레이터

조선 후기의 문인인 남태응(南泰鷹, 1687~1740)이 쓴 조선의 화가 및 서화 비평서인 『청죽화사』에는 이 초상화와 관련해서, “심득경이 죽은 후 윤두서가 그를 생각하며 초상을 그렸는데, 터럭 하나 틀리지 않았고, 초상화를 심득경의 집에 보내 벽에 걸었더니 마치 죽은 이가 되살아 온 것 같았다고 온 집안이 놀라서 울었다” 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심득경은 본관이 청송이며, 호는 정재처사(定齋處士)로, 숙종 19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했다는 기록 외엔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아 관직에도 나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른여덟이라는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참고문헌】

남태응의 <청죽화사>의 해제·번역·원문(유홍준, 화인열전1, 역사비평사, 2001)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후기의 초상화(이태호, 마로니에북스, 2016)

한국의 초상화-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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