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소리를 부르는 장면.
서도소리를 부르는 장면.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김동인의 소설에 「배따라기」(1921)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한 사내의 기구한 운명담을 듣게 된다.

그 사내는 잘 생긴 동생과 아내와 함께 사는 데, 동생과 아내의 사이를 의심하게 된다. 어느 날 사내가 장에서 돌아오니 아내의 옷매무새가 풀어져 있고, 동생과 아내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그들의 당황하는 모습에 형은 아내와 동생 간의 간통을 확신하게 된다. 사실은 아내와 동생이 집안에 들어온 쥐를 잡다가 그런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다. 남편의 의심에 아내는 분결에 자살하고 다음 날 시체가 바다에 떠오른다.

이 사건 후 동생은 집을 나가 뱃사람이 되어 행방이 묘연하다. 수십 년이 흐른 후 형은 동생을 찾았지만 동생은 ‘다 운명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또 떠나간다.

한 형제의 운명적 비극을 다룬 내용의 소설 「배따라기」는 무당의 굿에서 착상한 소설임이 분명하다. 제목도 그렇거니와 소설 「배따라기」의 앞부분에는 당시 무당의 굿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다. 소설 「배따라기」에 실려 있는 노랫말은 다음과 같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산천후토 일월성신 하나님전 비나이다

실낱같은 우리 목숨 살려 달라 비나이다

에에야 어그여 지여

(중략)

강변에 나왔다가 나를 보더니만, 혼비백산하여 꿈인지 생시인지, 생신지 꿈인지,

와륵 달려들어 섬섬옥수로 붙여잡고 호천망극 하는 말이,

"하늘로서 떨어지며 땅으로서 솟아났다 바람결에 묻어 오고 구름길에 쌔여 왔다."

이리저리 붙들고 울음 울 제, 인리 제인이며 일가 친척이 모두 모여……

(중략)

밥을 빌어서 죽을 쑬지라도 제발 덕분에 뱃놈 노릇은 하지 마라

에에야 어그여 지여……

이 노랫말은 당시 김동인이 보았던 굿에서 따왔을 가능성이 크지만, 한편으로 이 굿 속에서의 노래는 서도 좌창으로도 전해진다.

물론 현재 전하는 서도 좌창 <배따라기>의 노랫말은 김동인의 소설 속의 노랫말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 전체적인 의미 구조는 흡사하다.

때문에 김동인의 소설로 보아서도 서도 좌창 <배따라기>는 무가(巫歌)에서 유래한 것이 확실하다. 다른 서도좌창이 한문투의 원전(原典)에서 발전한 수심가 계열의 노래라면, <배따라기>는 기층 민중 사이에서 행해졌던 굿에서 발전한 노래인 것이다.

즉 <배다라기>는 분류상 서도좌창이지만, 다른 서도좌창과는 발생계통이 다르다는 뜻이다.

<배따라기>는 원래 ‘배 떠나가기’에서 음이 변한 것이다. 현재 서도좌창으로 부르는 <배따라기>는 평안도 영유지방(지금의 평원군)에서 뱃사람의 무사를 기원하는 굿에서 시작되었다.

가령 1910년대 발간된 여러 가사집을 보면 <배따라기>는 다양한 이본이 존재한다. 위의 김동인 소설의 「배따라기」에서 받는 소리는 ‘에에야 어그여 지여’인데 현재의 받는 소리는 ‘에- 지화자자 좋다’이다.

노랫말로 본다면 <배따라기>는 서도소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배따라기>가 중요한 이유는 첫째, 민중들의 굿에서 발전하여 노랫말 내용이 극적인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발전하면 남도의 판소리나 연희극 형식으로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많은 뱃노래의 원형이 보인다는 점이다. 전국의 뱃노래는 지역적 특성보다는 뱃노래 자체의 특성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즉 경상도에서부터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뱃노래가 그 곡조가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은 바다를 통한 뱃사람들의 소통과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이므로 자연스런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내륙의 소리가 교통의 단절에 의해 고립적으로 발전하여 이질성이 두드러진다면 뱃노래 계열은 반대로 동질성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소리의 난이도나 기교가 서도좌창 중에서도 최정상에 있다는 점이다.

즉 <배따라기>는 자연스럽게 민중들의 풍어제와 같은 굿에서 시작하여 고급한 서도소리로 발전하였지만, 판소리와 같이 식자층의 지지를 받지 못해 화려하게 개화하지 못한, 때문에 더 발전시킬 소지가 있는 우리의 소리다.

현행 <배따리기>의 노랫말을 보면 뱃사람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다가 배가 암초에 부딪혀 난파하여,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운 좋게 영좌(선장)과 화장아이(배에서 밥 짓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와 장손 아비는 살아남아 3년 만에 집에 돌아온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배따라기> 시작 부분이 소리하는 사람마다 또는 책마다 조금씩 가사가 다르다.

윤회윤색은 다 지나가고(김정연, 『서도소리대전집』)

이내 춘색(春色)은 다 지나가고(이창배, 『한국가창대계』)

윤하윤색(潤夏潤色)은 다 지나가고(박기종, 『서도소리가사집』)

윤하윤삭(閏夏閏朔)은 다 지나가고(최창호, 『민요따라 삼천리』)

이렇게 여러 버전이 있기에 정작 노래하는 사람들도 무엇이 옳은지 헷갈리게 마련이다.

그 다음 가사는 ‘황국단풍이 다시 돌아오누나’이다. 즉 ‘가을이 다시 돌아 왔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앞의 내용은 ‘여름이 지나가고’의 뜻이 되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이내 춘색’은 ‘봄이 가고 가을이 왔다’는 뜻이 되므로 아닌 듯하다. ‘윤하윤색’은 한자의 어법상 맞지 않다. 억지로 해석하면 ‘빛나는 여름과 빛나는 색’이라고 해서 뜻은 통하지만, ‘윤색(潤色)’은 고쳐 다듬는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달이 낀 여름’이라는 뜻의 ‘윤하윤삭(閏夏閏朔)’이 내용상으로는 가장 어울리는 말이 된다.

특히 <배따라기>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잘 일어나는 일이 아닌 특수한 상황이기에 일반적인 평달이 아니라 윤달이 낀 특수한 달을 앞머리에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면 ‘윤하윤삭(閏夏閏朔)’이 더욱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윤하윤삭으로 표기된 가사는 북한의 평양출판사에서 1995년에 간행한 책에서 나온 것이며, 최창호는 북한의 학자이다.

<배따라기>가 원래 북한 지역의 노래이기에 이러한 주장은 조금 더 설득력을 얻는다고 할 것이다. 때문에 앞으로 <배따라기>를 부르는 소리꾼들은 ‘윤하윤삭’으로 불렀으면 한다.

대부분의 소리꾼들은 스승이 가르쳐 준대로 그대로 외어 부르지만, 잘못된 가사는 고쳐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부분 가사는 “윤달이 낀 여름은 다 지나가고 가을이 다시 돌아왔다”는 뜻이 된다.

서도좌창 <배따라기>는 수심가조로 끝내기에 서도좌창으로 분류되지만 굿에서 나와 좌창으로 발전한 이색적인 소리이며, <잦은 배따라기> 등의 민요로도 발전한 아주 특이한 소리이다.

또한 <배따라기>는 소리의 난해도가 높기도 하고, 서사구조가 포함되어 있는 것임으로 해서 앞으로 창극이나 기타 창작극으로 발전시킬 소지가 다분하다고 하겠다.

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이면서 평양 출신인 김동인이 굿 <배따리기>를 보고, 소설 「배따라기」를 창작한 것도 바로 <배따라기>가 가진 서사구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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