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의 비교와 종합

서도소리를 부르는 장면.
서도소리를 부르는 장면.

【뉴스퀘스트=하응백 문화에디터】 서도의 「놀량사거리」와 「경기산타령」에서 맨 먼저 부르는 「놀량」 부분에 이런 가사가 있다.

육구함도(六衢咸道) 대사중로 얼씨구나 절씨구나(경기 놀량)

삼월이라 육구함도 대삼월이라 얼씨구나 절씨구나(서도 놀량)

‘육구함도’는 도대체 무슨 말일까? 국가무형문화재 제 19호 경기산타령 예능보유자였던 이창배는 자신의 저서 『한국가창대계』에서 “옛날 진(秦)의 서울 함양(咸陽)의 거리가 넓어서 여섯 갈래가 된다는 말. 넓은 길을 말함”이라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이후 출간된 여러 책에도 ‘육구함도’의 해석은 이창배의 주석을 따르고 있다. 그다음 ‘대사중로’는 주석이 없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

「경기 산타령」을 부르는 사람이나 「놀량사거리」를 부르는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보아도 속 시원한 대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구태여 끼워 맞춘다면 ‘대사중로’를 ‘대사중로(大寺中路)’로 해석하여 “큰 길, 큰 절 중간 길에서 얼시구나 절씨구나”로 해석하여 “큰 길에서 잘 논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놀량」은 원래 사당패들이 불렀던 노래의 하나이다. 사당패는 조선시대에는 천대받은 예인집단이다.

조선말 1867년 진주목사를 지낸 정현석(鄭顯奭)의 저서 『교방가요』에 보면 “雜(잡요) 山打令(산타령) 遊令(유령) 놀량”을 분류하고 이어 “이것들은 걸사나 사당이 부르는 것이다.

모두 노랫말이 음란하고 비루하다. 지금 거리의 아이들과 종 녀석들까지도 이 노래를 잘 따라 부를 줄 안다”고 하고 있다.

즉 「놀량」은 당시의 기록에 ‘노랫말이 음란하고 비루하다’고 했고 그 담당층이 걸사나 사당인데, ‘육구함도’와 같은 어려운 한문을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부분은 이상준이 편찬한 『조선잡가집(1916)』에는 “육구암사(六九庵寺) 대사뭉구리 얼시구나 절시구나”로 되어 있다.

‘육구암사’는 절 이름이고 ‘대사’는 스님을 높여 부르는 말, ‘뭉구리’는 스님(중)을 놀림조로 부르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앞뒤가 맞아 떨어진다. “어린 낭자 고운 태도 눈에 암암하고 귀에 쟁쟁, 비나이다 비나이다 님 생겨 달라고 비나이다, 삼월이라 육구암사 대사뭉구리 얼씨구나 절씨구나”로 읽으면 연결이 자연스럽다.

“육구암사 대사뭉구리 얼씨구나 절씨구나”는 ‘대사’와 ‘뭉구리’의 결합과 ‘얼씨구나 절씨구나’가 가지는 남녀의 성적 어울림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으로 인해 해학과 풍자의 구절이 된다.

때문에 이 구절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 실제 공연될 때는 청중 쪽에서 웃음이 한바탕 터지는 바로 그러한 대목인 것이다.

때문에 점잖은 사대부였던 정현석이 『교방가요』에서 「산타령」을 ‘음란하고 비루하다’고 했을 가능성이 많다.

현행 노랫말의 ‘육구함도’는 원래 육구암 혹은 육부암을 나타내는 절 이름이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렇다면 ‘육구암’,‘육부암’ ‘육구암사’가 왜 ‘육구함도’로 변했을까?

①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사 법당뒤 칠성단에(강원도 아리랑)

②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유점사 법당뒤 칠성단을(강원도 아리랑)

「강원도 아리랑」의 노랫말 중 일부이다.

①과 ② 중에서 원래의 노랫말은 ② 이다. 그런데 ①로도 많이 부른다. ‘팔만구암자’ 즉 금강산에 암자가 많다는 뜻이 ‘팔만구암사’라는 얼토당토않게 절 이름으로 변한 것이다.

경기 <놀량>의 ‘육구함도 대사중로’도 이런 식으로 와음이 진행되어 전혀 엉뚱한 말이 된 것인데 여기에 이창배는 진지하게 六衢咸道(육구함도)라는 한자음을 집어넣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풀이하였던 것이다.

이창배의 이러한 주석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당시 국악계에서는 아무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까지는 일부 청중들의 한문(漢文) 수용능력이 상당했지만, 20세기 들어서는 한문를 이해하는 청중과의 교호작용이 사라짐으로 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엉뚱한 해석을 하거나, 이창배의 의도적인 노랫말 순화 작업에도 아무런 의문도 제기되지 않은 채 거의 5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나가버린 것이다.

이창배는 국악계에서 노랫말을 수집하고 주석을 다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된 ‘경기 산타령’에서 사당패의 흔적을 지우려는 노력을 했다.

사당패는 천민 집단이었다는 것을 이창배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그 천민 집단의 노래를 전승하여 자신이 문화재가 되었으니, 노랫말에서 순화 작업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 결과 현행 「경기 산타령」은 20세기 초에 연행하던 노랫말에서 상당히 변화되고 말았다. 결국 이런 것은 전통의 개악(改惡)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국악의 노랫말 내용이 비록 비루하거나 음란하다하더라도, 그 원형 자체로 전승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노랫말이 비록 에로틱해서 음란하게 보일지라도 큰 시각에서 보면, 바로 그러한 자유분방함이 하층민의 해학과 풍자이며, 이것이 민중의 생명력과 역동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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