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임진왜란 초기에 남쪽을 지키던 대부분의 장수와 병사들은 일찌감치 피난을 가버렸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데다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을 당 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갈수록 전세가 불리해졌고 민심도 흉흉해졌다. 선조가 중국으로 망명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렇게 되면 조선은 일본의 손아귀에 완전히 넘어가고 마는 것이었다.

죽기를 각오하고 왜적과 싸우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극적인 반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의병들의 궐기였다. 경상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이들은 오로지 내 가족과 내 삶의 터전을 왜적으로부터 지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때문에 사기가 드높았고 죽기 살기로 싸워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의병을 일어나게 하고 그 의병들을 잘 조직해서 전세를 유리하게 이끄는 계기를 마련한 데에는 김성일의 공이 컸다.

처음에는 관군과 의병 사이에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병은 급조된 조직이라서 규율이 형편없었고 무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관군은 의병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의병은 의병대로 전 쟁 초기에 백성을 버리고 피난 가기에 바빴던 관군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서로 무시하고 불신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가 생겼다. 김성일은 관군과 의병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불화를 해소하는데 앞장섰다.

임진왜란 최고의 의병장으로 꼽히는 곽재우(郭再祐)는 전쟁 초기부터 맹활약을 했다.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의병을 먹이는 등 오로지 왜적을 물리치는 일에만 몰두할 뿐 아무런 사심이 없었다.

그런데 곽재우가 많은 공을 세우고 백성들이 “홍의장군!”이라고 부르며 인기가 높아지자 그를 시 기하고 경계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곽재우를 도적이라고 모함하는 소문 까지 돌자 경상감사 김수는 곽재우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사태에 크게 실망한 곽재우는 의병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은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김성일이 곽재우를 달래는 글을 써서 격려 했다.

“나라가 위중한 시기에 어찌 소인배들의 말장난에 흔들린단 말이오. 처음 그대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났을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시오. 그대가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용맹하게 싸워서 큰 공을 세운 사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온 백성이 알고 있소이다.”

아울러 김수에게는 곽재우의 공을 인정하고 오해를 풀라고 했다. 김성일의 중재로 곽재우와 김수는 화해하고 힘을 합쳐서 왜적을 물리치기로 다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곽재우는 김성일을 높이 추켜세우며 존경의 뜻을 표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킨 김성일은 진주로 갔다. 진주는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군사적 요충지였다. 김성일이 진주성에 도착했을 때 성안은 텅 비어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지리산으로 피난 가 있던 진 주목서 이경과 판관 김시민이 달려왔다. 그런데 얼마 뒤 이경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김성일은 김시민과 함께 병사들을 모아서 성을 정비하고 적을 방어할 태세를 갖추었다.

“진주는 호남으로 가는 길목이다.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이 무너지고, 호남이 무너지면 조선이 무너진다. 결국 우리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두 죽는다는 각오로 싸워서 기필코 적을 막 아야 한다.”

김성일은 그렇게 군사들을 독려하며 사기를 높였다. 1592년 10월, 3만 여 명의 왜군이 호남으로 진격하기 위해서 진주성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맞선 3800여 명의 조선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6일 밤낮 동안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마침내 왜군이 패퇴했다. 10배나 많은 적을 물리 친 것이었다.

진주성의 전투는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역사에 당당히 기록되었다. 진주성에서의 큰 승리로 인해 조선은 호남을 지킬 수 있었고 이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은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이 거느리는 수군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김성일은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진주를 잘 지키고 있었다. 이 두 사람 때문에 적은 호남으로 들어갈 수가 없자 금산을 거쳐서 호서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 역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이순신과 김성일이 바다와 진주를 잘 지킨 덕분에 군량을 제때에 댈 수 있었고 난리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

김성일의 활약으로 경상우도의 방어가 튼튼해지자 왜적은 경상좌도를 침공했다. 경상좌도가 왜적에게 유린당하자 조정에서는 김성일을 경상좌도관찰사 겸 순찰사로 임명했다. 그러자 경상우도의 백성들이 김성일을 경상우도에 있게 해달라고 탄원을 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김성일로 하여 금 경상우도에 그대로 있게 했다. 당시 김성일의 활약상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건만…

1593년, 해가 바뀌어도 조선 땅은 여전히 왜적과의 싸움에 휘말려 있었다.

오랜 전투로 백성들은 서서히 지쳐갔고 먹을 것이 부족해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김성일은 식량과 약품 등 필요한 물자를 보내달라고 조정에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난리의 와중인지라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자 김성일은 곡기를 끊고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하기로 했다. 보좌하는 장수들이 건강을 생각해서 식사를 하시라고 여러 번 권했으나 듣지 않았다.

“백성들이 저 지경인데 내 어찌 밥이 들어가겠는가. 억지로 쑤셔 넣어도 목구멍에서 도로 올라오는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돌림병까지 돌아서 곳곳에 환자가 발생했다. 김성일은 일일이 환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병세를 살폈다. 그 모습을 본 보좌관들이 다시 나섰다.

“몸도 허약하신데 이렇게 다니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큰일입니다. 제발 업무는 방에서만 보십시오.”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이 정한 것인데 내가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보좌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성일은 어려운 백성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주변의 우려대로 돌림병에 전염되었다. 워낙 허약해진 몸이어서 이내 자리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보좌관들이 여러 가지 약을 지어 왔으나 김성일은 그것도 모두 물리쳤다.

김성일이 지어 후진 양성에 힘쓴 석문정의 전경과 주변 풍경.
김성일이 지어 후진 양성에 힘쓴 석문정의 전경과 주변 풍경.
김성일이 지어 후진 양성에 힘쓴 석문정의 전경과 주변 풍경.
김성일이 지어 후진 양성에 힘쓴 석문정의 전경과 주변 풍경.

“내 병은 내가 안다. 오래전부터 깊어진 병이므로 약도 듣지 않을 것이다. 쓸데없는 수고할 것 없다.”

어쩌면 김성일은 자신의 최후를 미리부터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차하게 생명을 부지하다가 전란이 끝난 후에 다시 논란에 휘말리느니, 차라리 이쯤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자 신의 실수에 대한 속죄이며 스스로에 대한 명예회복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해 4월 29일, 김성일은 진주성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류성룡은 크게 탄식했다.

“아! 김성일의 불행은 경상우도의 불행이로구나. 이 막중한 시기에 이토 록 막중한 인물을 데려가다니. 이것이 운명이란 말인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란 말인가.”

전란 중이라서 지리산 기슭에 임시로 매장을 했다가 그해 12월 경북 안동의 와룡면 서지동으로 옮겨서 안장을 했다. 시신을 모시려고 구덩이를 파는데 북처럼 생긴 커다란 돌이 나왔다. 퇴계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 했던 정구가 쓴 글을 그 돌에 새겨서 김성일의 묘방석으로 삼았다. 그 내 용은 이러했다.

“사순의 이름은 성일이고 문소 김씨이다. 무술년에 태어나 계사년에 세상을 떠났다. 무진년에 문과, 임진년에 경상감사가 되었다. 일본 사 행 길에서 정직하여 흔들리지 않아 우리 임금의 위엄이 오랑캐 나라에 퍼졌고 병란에 초유의 대명을 받고 도민을 지성으로 감동시켜서 영 남지방의 적을 막았다. 충성은 사직을 지켰고 이름은 역사에 갈이 남으리라. 퇴계 선생 문하에서 심학의 깊은 내용을 들었으니 그 덕행과 훈업은 오래도록 빛날 것이다.”

의성 김씨의 내력

김성일은 1538년(중종 33년)에 아버지 김진과 어머니 여흥(驪興) 민씨 사 이에서 태어났다. 김성일이 태어난 무렵은 조선왕조가 전반기에서 후반기로 넘어가는 때였다.

정치적으로는 정파 간의 대립으로 갈등과 혼란이 지 속되고 있던 시기였다.

김성일의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사순(士純)이며 호는 학봉(鶴峰)이다. 의성 김씨의 시조는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 석이다.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의 딸과 결혼 했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김석이다. 김석은 왕건의 외손자인 것이다.

김석은 지금의 경북 의성군 일대의 땅을 봉토로 받으면서 의성군(義城 君)으로 봉해졌다. 김석의 자손들이 대대로 의성에 살게 되면서 본관을 의성으로 삼았다.

그 후 김성일의 7대조 김거두가 안동에 들어와 살기 시 작했다. 김거두는 안동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김방경, 권한공 등의 집안과 혼인을 하면서 재지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김거두의 증손자 김한계는 문종 때문과에 급제하여 단종 때 집현전 학사와 부지승무원 원사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세조가 정권을 잡자 안동으로 낙향했다.

김한계의 아들인 김만근이 안동 임하현의 갑부였던 오계 동의 사위가 되면서 임하현 천전(川前: 내앞)마을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것을 계기로 의성 김씨 내앞파가 생겼으며, 김만근의 손자이자 김성일의 아버지인 김진이 내앞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호를 따서 청계대조(淸溪大祖)라고 불리는 김진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어지는 의성 김씨 내앞파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졌다. 김성일은 훗날 자신에게 인간적,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두 사람을 꼽았다. 그중 한 사람은 스승인 퇴계 이황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바로 아버지 김진이었다.

김진은 1525년 사마시에 급제한 다음 성균관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성균관은 과거를 준비하는 교육기관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얼마 뒤 김진은 돌연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당을 세우고 집안 자손들과 동네 아이들을 모아 교육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김진이 과거를 포기하고 처사(處士)의 삶을 선택한 것은 당파 싸움을 일삼는 중앙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의 사연에 대해서는 전설과도 같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김진이 서울로 가기 위해 문경새재를 넘다가 고개 마루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한 백발노인이 고개를 올라오더니 김진의 곁에 앉았다. 김진이 어른에 대한 예의로 인사를 하자 노인이 물었다.

“댁은 어디로 가는 길이오?”

김성일 종가의 고문서 중 일부인 임금의 교서와 분재기.
김성일 종가의 고문서 중 일부인 임금의 교서와 분재기.
김성일 종가의 고문서 중 일부인 임금의 교서와 분재기.
김성일 종가의 고문서 중 일부인 임금의 교서와 분재기.

“서울로 갑니다.”

“서울은 웬일로 가시오?”

잠시 머뭇거리던 김진이 말했다. “과거공부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노인은 김진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신수를 보아하니 살아서 참판 벼슬을 하는 것보다 돌아가서 증 판서를 하는 게 더 낫겠는데?”

증 판서를 한다는 것은 자식이 잘되어서 부모에게 높은 벼슬을 내린다는 뜻이다. 훗날 김진은 김성일을 포함하여 다섯 형제를 모두 과거에 합 격 시키는 등 자식을 훌륭하게 키웠으므로 그 노인의 말대로 된 셈이다.

어려운 이에게 정을 베풀던 아이

김진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가장 강조한 것은 유학의 실천윤리였다.

아침저녁으로 부모님께 문안인사 올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상례는 반드시『주자가례』를 참고하도록 했다.

『주자가례』는 중국 송나라의 주자가 관혼상제를 포함하여 가정에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자세하게 수록한 책으로, 왕족과 사대부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잘 정리해 놓았다.

김성일은 여섯 살 때 아버지에게서『효경(孝經)』을 배웠다. 그 영향 때문인지 어려운 사람을 보면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 남달랐다. 거지를 보 면 집의 쌀을 퍼다 줄 정도였다. 머리도 총명하고 성격도 침착했다.

아이 들과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서 놀다가 한 아이가 떨어졌는데 다른 아이 들은 모두 놀라서 달아났지만 김성일은 침착하게 아이에게 다가가서 상태를 살피고 어른을 불러서 도움을 요청했다.

어느 여름날, 아버지가 낮잠을 주무시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아버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김성일이 개구리 한 마리를 잡아다가 구렁이 곁에 놓았다. 그러자 구렁이는 개구리를 잡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김성일은 어렸을 때부터 태도가 꿋꿋했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뜻이 맞지 않으면 그만두고 말았지 적당히 타협하거나 구차하게 매달리는 일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 김진은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나중에 커서도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하루는 아버지가 벌을 주기 위해서 “매를 구해 오라”고 시켰다. 그랬더니 김성일은 굵고 단단한 매를 구해서 가져왔다. 아버지가 “왜 이런 것을 가져왔느냐?”라고 물었더니 김성일은 이렇게 대답했다.

“가는 매로 맞으면 아프지 않습니다. 아프지 않으면 벌이 되지 않습니다.”

김성일이 열일곱 살 때 서른세 살이던 형 김극일이 홍원고을의 원님이 되어 부임하게 되자 따라갔다. 어느 날 관아에 불이 나서 사람들은 불을 끄기에 바빴는데 김성일은 책 상자와 전패를 옮기고 있었다.

전패는 각 고을의 객사에 ‘전(殿)’자를 새겨 놓은 나무판으로, 임금을 상징하는 것이 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모든 관원이 그 앞에 모여 절하며 충성을 다짐했다. 때문에 이를 훼손하거나 분실하면 큰 불충이 되는 것이었다.

불이 나서 다들 정신이 없는 상황인데 김성일이 그 전패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은 것이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형 김극일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반드시 학문으로 성공하고 또한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훌륭한 선비가 될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 참고자료

『학봉 김성일의 생각과 삶』,「한국민족문화대백과」,「국역 국조인물고」

·사진 제공_ 안동시청, 사단법인 학봉선생기념사업회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