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용의 꼬리를 만진 김씨 부인

1542년(중종 37년) 10월 1일, 출산을 위해서 친정인 경상북도 의성군 사촌리에 와 있던 김씨 부인은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늘에 먹구름 이 가득하고 천둥번개가 몰아치는데 눈앞에서는 커다란 강물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김씨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는데 소용돌이 속에서 이무기 한 마리가 얼굴을 내밀면서 말했다.

“부인, 내 꼬리를 한번 만져주시오. 그럼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소.”

김씨는 몹시 떨렸지만 용기를 내어 이무기의 부탁대로 꼬리를 만져주었다. 그러자 이무기는 온몸에 광채를 띠며 용으로 변하더니 하늘로 올라갔다. 그 광경에 놀라서 잠을 깬 김씨는 해산기를 느끼고 떡두꺼비 같은 아 들을 낳았다.

그리고 꿈에서 본 것처럼 용이 되었다는 뜻의 이름을 지었다. 경상북도 안동 풍산 지방의 유학자 류중영과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류성룡의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이현(而見)이고 호는 서애(西涯)다.

6대조 류종혜가 풍산 읍내에서 하회로 옮겨와 살면서 하회 마을은 풍산 류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류성룡의 할아버지 류공작은 통훈 대부로 간성 군수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 류성룡의 외가도 안동에서 의성으로 이주한 유학자 집안이었다.

류성룡이 살았던 안동 하회 충효당 원경. 보물 제414호.
류성룡이 살았던 안동 하회 충효당 원경. 보물 제414호.

안동 하회마을은 남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휘돌 아 나가는 지역으로 그 풍광이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이 유명했다. 친가와 외가가 모두 명망 있는 재지사족 집안에서 태어난 류성룡은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다.

네 살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한 류성룡은 여덟 살 때『맹자』를 배웠다.『맹자』를 공부하면서 “백이는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귀로는 음탕한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구절을 읽고 감명을 받은 류성룡은 그 이후부터 쓸데없는 말이나 상스러운 소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아홉 살 때『논어』를 배웠으며, 열세 살 때『대학』과『중용』을 공부했다. 한번 배운 것은 뜻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아서

신동 소리를 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다른 것에는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로 지 공부에만 몰두해서 주변 사람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어릴 때 류성룡을 가르친 스승들은 하나같이 “나중에 반드시 큰 학자가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열네 살 때 할아버지가 군수로 있던 강원도 간성에 가서 한동안 공부를 했으며, 열아홉 살 때는 산속에 있는 절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다. 류성룡이 얼마나 공부하는 걸 좋아했는지를 증명하는 일화가 있다.

류성룡이 여덟 살 때였다. 아버지가『맹자』의「등문공편」을 외어보라 고했다. 류성룡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고 그 뜻까지 정확하게 풀이 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더 공부하지 말고 푹 쉬어라.”

공부를 잘한 보상으로 휴식을 허락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린 류성룡은 아버지가 이제 더 이상 글공부를 가르쳐 주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고 상심한 나머지 밥을 굶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는 이렇게 감탄했다.

“성룡의 행동은 어른과 같아서 또래 아이들과 같이 놀 때도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글 읽기를 할 때는 온 마음을 다해서 아버지의 꾸중을 받은 적이 없도다.”

스물한 살이 된 류성룡은 보다 넓고 깊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형 류운룡과 함께 도산서당으로 가서 퇴계의 제자가 되었다. 자신의 문하에서 류성룡이 공부하는 자세를 지켜본 퇴계는 이렇게 말했다.

“성룡은 하늘이 내린 사람으로 훗날 대학자가 될 것이다.” 김성일은 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선생 밑에 오래 있었는데 제자를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오직 류성룡만이 칭송을 받았다.”

류성룡이 퇴계의 문하에 있으면서 집중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것은『근 사록』이었다.『근사록』은 송나라 유학자인 주희와 여조겸이 주돈이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장재의『서명(西銘)』,『정몽(正蒙)』등의 책에서 중요한 문구만을 골라서 편찬한 성리학 해설서로, 진덕수의『심경(心經)』과 쌍벽을 이루는 성리학의 명저였다. 류성룡이 퇴계의 문하에 있으면서『근 사록』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는 것은 이때 이미 성리학의 중심사상을 웬만큼 학습했다는 뜻이다.

퇴계의 문하에 있는 동안 류성룡은 바른 언행과 행실만을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날마다 일정한 시간에 책을 읽고 글씨를 쓰고 문장을 짓는 것에만 몰두하고 다른 일에는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의 이런 규칙적이고 성실한 태도를 보고 퇴계의 제자 장흥효(張興孝)는 이렇게 말했다.

“타고난 기품이 맑고 자질이 순수한 사람이다. 학문에는 근원이 있고 성리학의 큰 줄기를 꿰고 있다. 덕망은 높고 업적은 무성하므로 성리학의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류성룡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예(禮)의 본질과 의의, 내용의 옳고 그름 등을 탐구하는 예학은 유학의 한 분야로 성리학과도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류성룡은 학문을 하는 이라면 인간의 기본 도리인 예를 알아야 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훗날 벼슬길에 올라 업무를 수행할 때도 몸에 밴 예법으로 잘 나타났다.

성리학과 예학 등 유학의 기본학문 외에도 류성룡은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군사학, 의학, 지리학 등은 전문가 못지않은 수준의 지식을 쌓았다.

군사학에서는 군대를 잘 통솔하려면 기강 확립이 가장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군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아울러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기와 식량 등 군수품을 잘 보급해야 한다는 것도 깨우쳤다.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 자신이 병을 자주 앓았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병을 고치기 위해서 공부한 것을 나중에는 병으로 고통 받는 주 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나누었다.『의학입문(醫學入門)』중에서 침구에 관한 내용만을 발췌해서『침구요결(鍼灸要訣)』을 저술했던 것이다.

류성룡은 농업에도 조예가 깊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피폐해지자 농토 개간 및 식량 증산에 대한 연구를 해서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나라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임진왜란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는 춘추관을 제일 먼저 설립하자고 주장했다.

지리학도 중요하게 여겨서「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도록 했다. 류성룡의 주도로 제작된「동국지도」는 행정과 국방 분야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이밖에도 신라시대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을 비롯해서 편찬 당시까지 500여 명에 달하는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 4,302편을 수록한『동문선 (東文選)』을 높이 평가하는 등 전통 시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처럼 다 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은 훗날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란에 빠진 나라를 총체적으로 잘 관리하여 슬기롭게 극복해낼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앙정계로 나아가다

열일곱 살 되던 해, 류성룡은 전주 이씨와 혼인을 했다.

처가는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의 후손 집안이었다. 스물두 살 때 초시에 합격하고 이듬 해 생원회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스물네 살 때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를 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했다. 과거에 합격한 후 첫 벼슬로 외교문서를 관리하던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예문관 검열 및 춘추 관 기사관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 전적을 거쳐 스물여덟 살에 공조좌랑 이 되었다.

류성룡이 이처럼 빠르게 승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문의 배경과 퇴계의 제자라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인품과 학식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류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뛰어난 업무능력과 합리적인 행동거지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서른 살 때 병조좌랑이 되었고 서른두 살 때 이조 좌랑에 이르렀다.

그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시묘살이를 위해 3년 동안 관직을 떠났다. 삼년상을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사간원은 임금에 대한 간쟁과 논박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사헌부와 함께 대간(臺諫)이라 고 불렀으며 홍문관, 사헌부와 함께 삼사(三司)라고 했고 형조, 사헌부와 함께 삼성(三省)이라고도 했다.

이듬해 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문한 처리 및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기관인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그 무렵 인종(仁宗)의 비였던 인성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의 상복문제가 논의되었다. 대신들이 격론을 주고받던 차에 예법에 밝은 류성룡이 나서서 승중복의 관례에 따라서 임금은 상복을 3년간 입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류성룡 종가의 문적인 『난후잡록』.
류성룡 종가의 문적인 『난후잡록』.
『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
『류성룡비망기입대통력』

그 무렵 조정은 훈구파가 물러나고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급격한 개혁을 주장하는 신진세력인 동인과 이에 반대하는 선배세력인 서인으로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학문적 입장에서 보면 동인은 퇴계와 조식의 문인들이 중심이었고 서인은 이이와 성혼의 문인들이 중심 이었다.

류성룡은 학문적으로는 동인의 입장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당쟁을 경계하고 화합을 추구했다. 그러나 워낙 거센 당쟁의 소용돌이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자 류성룡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 하회마을로 돌아와 버렸다.

하지만 칩거는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임금의 부름을 받아 서른여덟 살이 되던 해 홍문관 직제학으로 임 명되었다.

이 무렵 류성룡은 경연에 참석하여 임금에게 자신의 견해를 자주 밝혔는데, 김우옹과 의견이 비슷해서 함께 진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의 인연으로 1599년 한성부좌윤으로 있던 김우옹은 모함에 빠진 류성룡을 위해 항소를 하여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했다. 김우옹은 퇴계와 조식

의 학통을 두루 이어받은 선비로, 퇴계의 문인들과도 교우가 두터웠다. 선 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서 붕당정치의 폐해가 심해지자 김우옹은 류성룡 등과 함께 동인과 서인 간의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마흔 살이 된 류성룡은 홍문관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부제학이 되었다.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동료들과 함께 나라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국가 지도층이 각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첫째, 임금이 성실하게 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랫사람이 하는 바른말을 듣기 꺼려하면 안 됩니다. 둘째, 임금과 왕실에 관한 일이어도 잘못이 있으면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언로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기강이 섭니다. 셋째, 조정이 바로 서려면 부당한 인사가 없어야 합니다. 부당한 인사는 부정부패의 원인이 됩니다. 넷째, 예의를 잃고 염치만 앞세워서 자신의 이익을 좇는 풍조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군신은 오로지 백성의 이익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섯째, 방납 (防納: 하급관리가 공물 납부를 대행하면서 이익을 취하던 일)의 폐단을 막아 서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줘야 합니다. 백성이 편안해야 나라가 편안합니다. 여섯째, 학교를 많이 세워서 학문을 숭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를 이끌어갈 선비들의 기풍이 바로 섭니다.”

마흔두 살이 되던 해 왕족인 경안령 이요가 “류성룡, 이발, 김응남 등이 동인의 우두머리 행세를 하며 권력을 함부로 행사하니 이를 막아야 합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음모와 모략이 횡행하는 정국에 환멸을 느낀 류성룡은 다시 관직을 떠나 하회마을로 내려왔다. 고향에 칩거한 채 후학

양성과 학문 연마에 몰두하는 한편, 조정에서 불러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함경도 관찰사로 임명하는 등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며 불렀으나 일체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수 년 동안 계속된 부름을 거절하는 것에 부담을 느낀 류성룡은 마흔 일곱 살 되던 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전까지는 주로 실무를 진행하고 책임지는 자리였지만 이제부터는 실무를 기획하고 평가하는 자리였다. 직책이 높아질수록 류성룡의 머릿속에는 갈수록 심해지는 붕당정치를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 한다는 고민도 더욱 깊어졌다.

1589년(선조 22년), 류성룡은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연이어 지냈다. 그 해 10월에는 기축사화(己丑士禍)가 일어나서 조정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정여립이 반란을 꾀한다는 고변으로 시작된 기축사화는 1591년까지 3년 동안 수많은 동인세력을 희생시켰다.

1570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 수찬 등을 지낸 정여립은 서 인인 이이, 성혼 등과 가까웠다. 이이는 여러 차례 그를 천거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동인과 가까워진 정여립은 공개적으로 이이와 성혼을 비판했다. 이로 인해 서인들의 탄핵을 받은 정여립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전주로 내려갔다.

고향에 서실을 짓고 강론을 하면서 대동계 (大同契)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의 요청으로 대동계 원들과 함께 전라도 도서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1589년, 황해감사 한준,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은 정여립이 대동계를 중심으로 반란을 꾸미고 있다고 고변했다.

체포령이 내려지자 정여립은 갑자기 죽고 말았다. 관군을 추격해오자 자결한 것이라고 했지만, 서인의 음모로 살해되었다는 얘기도 떠돌았다.

서인은 정여립 모반사건을 정적이었던 동인을 몰아내는 빌미로 삼았다. 서인 정철의 주도로 수많은 동인이 탄압을 받았다. 정여립 모반사건과 관련된 국문은 3년 가까이 계속되었으며, 그동안 동인 천여 명이 화를 입었다. 마침내 동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호남 출신은 관직에 등용되는 걸 제한받기도 했다.

1591년 서인세력은 류성룡도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몰아갔다.

그러나 서인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걸 경계한 선조는 오히려 류성룡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류성룡은 정부요직인 우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하게 되었지만 실권은 서인이 쥐고 있었으므로 정국 운영에 크게 기여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서인의 대표 격인 좌의정 정철이 세자 책봉 문제를 거론하다가 강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동인은 다시 세력을 회복하였고 류성룡은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된 동인은 정철의 처벌문제를 두고 퇴계 계열의 온건파와 조식 계열의 강경파가 대립했다. 류성룡은 온건파에 서서 정철을 가볍게 처벌하자는 의견을 내세웠다. 동인과 서인이 대립할 때도 양대 세력을 조정하기 위해 애를 썼던 류성룡의 성품으로써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양대 세력은 끝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온건파는 남인 (南人)으로 강경파는 북인(北人)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일부 학자들은 정여립이 실제로 모반을 했다는 확실한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서인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은 당시부터 제 기되었다.

정여립이 만든 대동계는 비밀조직이 아니었으며 관의 요청으로 왜구 토벌에도 나섰던 공개조직이었다. 게다가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동 인이 모반을 꾀할 이유도 없었다는 게 이러한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었다.

광해군 때 북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자 기축사화 때 희생된 사람들의 복 권을 추진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기축사화는 계속 모반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기축사화는 당쟁을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고 그것이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한 주된 원인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서애 유성룡의 생각과 삶』,「한국민족문화대백과」,「네이버캐스트」

·사진 제공_ 안동시청,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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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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