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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0-06-05 17:35 (금)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⑧] 경북-나라를 구한 명재상 류성룡(3)
[역사 인물의 탄생지를 가다⑧] 경북-나라를 구한 명재상 류성룡(3)
  • 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 승인 2019.12.07 0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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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뛰어난 정치가이자 훌륭한 재상으로 어려운 시기의 나라를 이끌어 갔던 류성룡은 어떠한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었을까. 한마디로 류성룡의 정 치 철학은 민본사상, 즉 백성이 근본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정치 철학은 다음과 같다.

화합을 중시했던 류성룡의 정치철학

첫째, 나라의 큰일을 결정할 때는 여론을 중요하게 여겼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의견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는 게 합리적이라는 뜻이었다.

임금에게도 여론을 존중하라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으며, 여론을 무시하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만드는 행위라고까지 말했다.

둘째, 합리적인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조직체를 만들면 정 치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오늘날의 정당 정치와 비슷한 형태 로, 지식인들이 무리를 이루어서 서로 상의하고 공정하게 경쟁하면 좋은 정치를 실현할 방법이 나온다고 여겼다.

셋째, 좋은 인재를 선발해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재를 선발하는 기준은 덕망과 능력과 인내심이었다. 이런 인물을 선발해야 나라가 안정되고 발전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류성룡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키우기 위해 세운 하회옥연정사.
류성룡이 학문 연구와 제자를 키우기 위해 세운 하회옥연정사.
류성룡이 부친상을 당하여 귀향한 뒤 지은 하회원 지정사.
류성룡이 부친상을 당하여 귀향한 뒤 지은 하회원 지정사.

넷째, 노비의 신분 향상과 처우 개선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노비를 개인의 소유물로 보지 않고 일반 국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능력 있는 노비는 군사로 선발하고 공을 세우면 벼슬을 주기도 했다.

이전 에도 공을 세운 노비에게 임금의 특명으로 벼슬을 준 일은 있었지만 이를 정책으로 추진한 것은 류성룡이 처음이었다. 이는 당시에는 꽤 진보적 인 정책이었다.

다섯째,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 유지와 기 강 확립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정부와 군대에서의 질서 유지와 기강 확립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야 영이 제대로 서고 맡은 업무와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섯째, 백성을 위한 행정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성의 편의를 추구하고 생활을 안정시켜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믿었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지지를 받는 정책을 펼쳐야 나라가 안정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치 철학을 바탕으로 류성룡은 여러 가지 정책을 마련하고 그 것을 실천했다. 류성룡이 가장 주력한 것은 정부와 지방관청의 위계질서를 바로 세우고 기강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의 지방관리들은 지위를 악용해서 이익을 챙기는 일이 잦았다. 그로 인해 백성들이 관리를 우습게 여기는 일이 많았다.

관리들의 문란한 정치는 경제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끼쳐서 나라의 재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류성룡은 제일 먼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없애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서 나라의 살림이 나아지도록 했다.

임진왜란의 피해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농경지를 늘리고 생산력을 증대하는 시책을 펼쳤다.

농경지를 늘리기 위해서 첫째, 둔전 개발을 장려 했다. 둔전은 군대에서 여 가를 이용해서 농사를 짓는 것을 말한다.

둔전은 멀리서 식량을 운송해 오는 불편함을 줄이고 식량 확보가 용이한 게 장점이다. 임진왜란 당시 요새마다 둔전을 잘 운영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둘째, 황무지를 개간해서 농지를 만들게 했다. 개간에 참여한 사람들에 게는 일정한 보상을 했다. 이 정책은 소작농에 비해 강제성이 적고 조건도 합리적이어서 인기가 좋았다.

셋째, 가축을 기르는 목장을 농경지로 바꾸게 했다. 목장은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을 감독하는 감독관의 횡포가 심했다. 이런 폐단도 없앨 겸 목장을 농경지로 바꾸자 식량 증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넷째, 사찰 등의 생활보장을 위해 지급된 위전을 국가에서 운영하도록 했다. 이 방법도 역시 임진왜란 때 군량미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섯째, 곡물 유통을 원활하게 해서 효율을 높이도록 했다. 곡식과 다른 지역의 생필품을 물물 교환하는 방식으로 물가를 조절해서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나라의 경제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서 류성룡은 상업도 적극 권장했다. 국내 장시의 활성화는 물론이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무역도 장려 했다.

전라도 무안지방에서 처음 시작된 장시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거쳐 경기도까지 퍼져나갔다. 1593년에는 국경지대인 중강진에 공식적인 무역거래소가 설치되어 명나라와의 무역도 이루어졌다.

류성룡이 여러 가지 시책을 펼치면서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 한 것은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평안하고 부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라의 경제가 넉넉해야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강한 군사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류성룡의 꿈은 오로지 ‘부국강병’이었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의미를 일찌감치 깨달은 류성룡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로 지 ‘부국강병’만이 살길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류성룡은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재가 중요하다 고 여겼다. 훌륭한 인재를 적극 발탁해서 그들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한 다고 생각했다.

타고난 신분에 의해서 장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 만 있다면 신분에 관계없이 등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졌다.

인재 등용의 모든 권한은 최종적으로 임금에게 있었다. 때문에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는 임금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임금에게 인재 등용에 관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첫째, 임금부터 성실하게 덕을 쌓아야 합니다. 신하들의 바른말 듣기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정한 인사가 가능합니다. 둘째, 왕실, 즉 외척에 의존하는 인사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이 아니라 인연으로 인사를 채용하면 반드시 문제사 생깁니다. 셋째, 능력 있는 인재는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공정한 여론에 따라서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기강이 잡히고 계통이 섭니다. 넷째, 인재를 채용하고 파직할 때는 여론과 시험 성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붕당 세력이 자기 당파의 인물을 뽑으려고 하면 임금 이 나서서 막아야 합니다.”

류성룡의 의견을 받아든 선조는 비변사로 하여금 인재 등용 원칙을 세우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대원칙이 정해졌다.

첫째,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둘째, 특정 문벌이 나 사회적 지위 또는 명망을 기준으로 하지 말고, 가난하고 천한 가문이 라도 능력이 있으면 뽑아야 한다.

셋째, 서자, 노비, 승려 등 신분을 가리 지 말고 재주 있고 유능한 사람이면 뽑아야 한다.

류성룡이 임금에게 조언한 인재 등용 원칙은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돌이켜봐도 무척 합리적이다.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의 소 유자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다시, 초야로 돌아가다

임진왜란이 어느 정도 극복되어가는 시점에 이르자 다시 당쟁이 시작 되었다.

공이 많은 사람은 시기도 많이 받는 법. 난국을 잘 이끌어서 전 란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한 류성룡에게 모함이 집중되었다.

그 무렵 명나라에서 파견된 정웅태가 조선의 대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명나라 황제에게 조선을 비방하는 글을 올린 일이 있었다.

“조선은『해동기략(海東紀略)』이라는 책에 일본의 연호는 크게 쓰고 중국의 연호는 작게 써서 중국을 무시했습니다. 이번에도 중국을 치려 고 왜적을 끌어들여 중국황제를 배반했습니다.”

이 글을 본 명나라 황제가 노발대발하자 선조는 너무나 어이가 없고 분해서 며칠 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류성룡은 임금을 위로하면서 정 사에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 이때 사헌부 지평으로 있던 북인의 영수 이 이첨이 류성룡을 탄핵했다.

“정웅태의 글에 대해 변호하는 일로 명나라 천자에게 사신을 보내기로 했는데 류성룡은 사신으로 가기를 자청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오명을 씻는 일처럼 중하고 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지체하고 소홀 히 하는 류성룡의 죄는 너무나 큽니다.”

이어 사간원 정언 문홍도까지 나서서 류성룡을 규탄했다.

“소신이 영남에 있으면서 류성룡이 간사하고 시기하며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임금께서는 고립되어 있어서 그의 죄악을 듣지 못하시므로 초야에 있는 저는 항상 분개했습니다.”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는 『선조수정실록』에 잘 기록 되어 있다.

“류성룡은 신임이 두터워서 여러 해 동안 나라 일을 맡아왔기에 소인배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들은 류성룡이 사신 가기를 자청하지 않은 것을 죄로 삼더니 이윽고 근거 없는 말과 이치에 맞지 않는 비난을 제멋대로 지어냈다.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의 신하들 가운데 어찌 한두 명의 지식인이 없었겠는가마는 소인배들의 유혹과 위협을 받아 서 헐뜯고 배척했으니 더욱 애석하다.”

거듭되는 비방과 모략에 환멸을 느낀 류성룡은 낙향하기로 결심했다. 1598년(선조 31년) 2월부터 임금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며 사직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번번이 거절했다.

“나라가 어렵고 위태로운데 재상으로서 어찌 가볍게 물러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비방하는 말이 있더라도 더욱 나라 일에 힘을 다해야 할 것이며 지나친 염려를 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다. 나의 지극한 뜻을 살펴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류성룡에 대한 임금의 신임이 만만치 않자 북인은 총공세에 나섰다.

사헌부에 소속된 정창연, 송일, 유몽인 등이 집단으로 나서서 류성룡의 파직을 거듭 주장했다. 홍문관 수찬으로 옮긴 이이첨까지 다시 나서자 선조는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해 11월 쉰일곱 살의 류성룡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하회마을로 돌아가는 몸이 되었다. 정적을 몰아낸 북 인은 기뻐했지만,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으로 향하는 류성룡의 마음은 너무나 편안했다.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병산서원. 한국 건축사의 중요 유적이다. 사적 제260호.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병산서원. 한국 건축사의 중요 유적이다. 사적 제260호.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병산서원. 한국 건축사의 중요 유적이다. 사적 제260호.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병산서원. 한국 건축사의 중요 유적이다. 사적 제260호.

하회마을로 돌아온 류성룡은 노모를 모시고 부용대를 산책하거나 조상들의 묘소를 두루 참배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서울에서 쌓인 때를 벗는 시간을 어느 정도 보낸 류성룡은 관직에 있는 동안 소홀히 했던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그 무렵 류성룡이 제자에게 했던 말을 보면 그가 얼마나 학문에 목말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마음을 다스리고 성격과 감정을 기르는 학문에 종사한다면 세상의 어수선한 일들이 나의 마음을 더럽히지 못할 것이며 늙는 것도 모르 게 된다. 나는 평생토록 이 뜻을 알기는 했지만 마음에 있는 둥 마는 둥 하는 바람에 지금은 머리에 백발만 가득할 뿐이다.”

류성룡은 하회마을 서북쪽 낙동강 건너 광덕리 소나무 숲 근처에 있는 옥연서당에 주로 기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손님을 맞이 했다.

아울러 저술활동에도 매진해서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이 무렵 류성룡이 저술한 서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징비록(懲毖 錄)』이다.

『징비록』은 7년여에 걸쳐 조선을 괴롭혔던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기록한 책으로, 제목의 ‘징비’는 『시경(詩經)』소비편(小毖篇)의 ‘예기 징이비역환(豫其懲而毖役患)’, 즉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징비록』의 첫 머리에서 류성룡은 “수많은 백성을 희생시키고 온 국토를 참혹한 소용돌이로 몰아갔던 전란을 회고하면서,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조정의 실책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한다.”고 적었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되었다는 점에서『징비록』은 우리나라 기록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책이다. 16권 7책으로 이루어졌으며 1969년 11월 7일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류성룡이 하회마을에서 학자로써의 삶을 만끽하며 조용히 지내고 동 안 그의 누명은 벗겨지고 오해도 풀렸다. 선조는 호성공신 칭호를 내리면 서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렀다. 그러나 류성룡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 리며 극구 사양했다.

“임금의 은혜를 입어 부르심을 받았으니 너무나 감격하고 황공하옵니다. 곧장 몸을 일으켜 길을 나서야 마땅하나 불행히도 지난 7월부터 종기가 생겨서 매일 뜸질해도 낫지 않고 화독까지 생겼습니다. 이 런 판국에 천리 길을 가는 것은 백 가지 계책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대신이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관직을 문란하게 하고 국정을 그르친 죄는 크나 공은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공신 칭호를 내려 나라에 수치가 되게 하시니 부끄럽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의 간절한 뜻을 살피시어 공신에서 제 이름을 삭제하시 고 분수에 맞게 편안히 살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뒤에도 선조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리면서 류성룡을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하회마을에 은거한 채 그토록 원하던 학자의 삶을 살았다.

1606년, 류성룡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그해 12월 금계의 선산에 임시로 매장했던 누이의 시신을 광주 신양리로 옮기고 돌아온 이후로 더욱 나빠졌다.

이듬해 들어서는 하루가 다르게 기력이 악화되자 많은 사람들 이 걱정하며 병문안을 왔다. 그러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쇠약 해진 류성룡은 글을 남겼다.

“제가 지금 병이 들었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고 나날이 악화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어진 친구들이 연이어 문병 온다는 말을 듣습니다. 인정으로는 마땅히 일어나 일일이 맞이한 후에 죽어야 하겠지만 기력이 없어서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 지경이오니 여러분께서 양해해주 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그렇게 문병 오는 이를 사양하는 글을 쓴 다음, 임금에게 보내는 마지 막 상소를 썼다.

“제가 병이 들어 정신이 어둡고 아득한지라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란이 조금 잠잠해지기 했지만 아직 걱정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임금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길게 생각하시어 덕을 닦고 정치를 바로 세우십시오. 근본을 확립하고 공평하게 듣고 잘 살피 시면 신하들이 다 이해하고 따를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을 잘 보살피시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정책을 밝게 하십시오.”

자손들에게 주는 유언도 글로 남겼다.

“너희들은 늘 착한 일만 생각하고 그것을 힘써 실천하면 가문을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죽거든 장례는 간소하게 할 것이며 남에게 요청해서 비석 같은 것은 세우지 말고 만장도 최소한만 쓰도록 해라. 가업을 지키려면 스스로 체통을 세워야 하므로 문란함이 없어야 한다. 정성과 효도와 화목은 가업을 이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장례와 제사는 정성과 공경이 제일 중요하니 너무 풍성하게 하지는 마라.”

그해 5월 6일 류성룡은 눈을 감았다. 세상에 태어난 지 예순여섯 해 되 던 때였다. 류성룡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사대부들은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살던 집터에 분향소를 만들어놓고 조문을 했다.

일반 백성들도 흰옷과 흰 두건으로 상복차림을 하고 찾아와 조문하는 이가 많았다.『선조실록』은 “어진 정승을 잃으니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구나.”하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조정에서는 3일 동 안 조회를 정지하고 시장도 3일 동안 철시를 하는 등 온 나라가 애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먼 길을 떠나는 류성룡을 조용히 배웅했다.

참고자료

『서애 유성룡의 생각과 삶』,「한국민족문화대백과」,「네이버캐스트」

·사진 제공_ 안동시청,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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