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내 주검을 조선에 닿게 하라!”

간신히 고개를 든 홍익한(洪翼漢)이 군사들을 노려보았다. 모진 고문으로 숨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홍익한의 마지막 전언은 살려달라는 애원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 “….”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마땅히 신하가 죽어야 하거늘. 내 주검을 도륙 해 조선에 닿게 하라.”

“내 주검을 조선에 닿게 하라!”

홍익한의 도발에 오히려 청군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말을 끝마친 홍익한의 입가에 비소(誹笑)가 번졌다. 입안에 스며드는 피를 바닥에 뱉었다. 청군이 고문 강도를 더욱 높였다.

사지가 벌벌 떨리고 가만히 있어도 근육이 제 스스로 움직였다. 홍익한이 이를 악물었다. 그 사이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홍익한의 고개가 자꾸 떨어졌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자, 아내와 자식을 앞세운 지난날과 청나라에서 보낸 세월이 주마등처럼 홍익한의 뇌리를 스쳐갔다.

손발이 포박당한 상황에서 형틀은 점점 그의 몸을 옥죄어 왔다. 모진 고문으로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성한 곳 하나 없었지만, 옛일을 생각하니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홍익한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지난날을 곱씹기 시작하였다.

1586년(선조 19년) 홍익한은 진사 홍이성(洪以成)과 안동 김씨(金琳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좌찬성(左贊成) 홍숙(洪淑), 감사(監司) 홍서주(洪敍疇), 현감(縣監) 홍애(洪磑), 진사(進士) 홍이성(洪以成)은 각각 공의 고조, 증조, 할아버지와 아버지이다.

명문가 집안에서 귀한 자손으로 태어난 홍익한은 일찍부터 총명함을 인정받았다.

홍익한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경계가 없어, 선대가 훈구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파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영의정·좌의정을 지낸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는 주변에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 홍익한의 총기를 극찬하며 그를 문하에 두고 수학시켰다. 또한 ‘후대에 반드시 위인이 될 사람’이라고 단언하였다.

특히 홍익한은 역사서를 공부함에 있어, 충의를 지키고 죽어 간 선인들에 대해 깊은 애정과 존경심을 표했다. 이정구는 또래에 비해 총 명할 뿐만 아니라, 선조에 대한 예를 다하는 홍익한을 보면서 조선의 미래를 보았던 것이다.

홍익한은 1615년(광해군 7년) 조선시대 소과중 하나인 생원시에 합격한 이후, 성균관 생원으로 6년을 공부한 뒤 1621년(광해군 13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불명확한 사유로 이를 취소당하고 만다. 당 시 홍익한 가문인 서인 측과 중앙 집권 세력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 및 인목대비 문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이 같은 시대상황에서 서인 홍익한은 불명확한 이유로 알성시에 급제하고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3년 뒤인 1624년(인조 2년), 홍익한은 정시 문과에 장원해 시대나 권력의 힘도 어진 인재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이후 홍익한은 사서(司書)를 거쳐, 1635년 장령이 되었다.

승문원·성균 관·홍문관 등을 거친 젊은이들로 꾸려진 장령은 임금 앞에서 소신껏 직 언해야 하는 관직으로, 홍익한의 성품에 맞는 관직이었다.

또한 스승 이 정구는 유독 아꼈던 제자 홍익한의 든든한 지원군을 자처하였다. 홍익한은 급제와 동시에 크고 작은 감찰직을 맡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야말로 홍익한 시대의 서막이 열린 듯했다. 그러나 조선을 둘러싼 주변국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으며, 그 어둠은 조선을 집어삼킬 듯이가 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양날의 검, ‘인조반정’ 기회가 위기로…

“실로 통탄할 일이로구나. 오랑캐와 피를 나눠 마시다니!”

서인세력이 혈맹국가로 인정했던 명나라의 국력이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민중봉기가 연달아 일어났고,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며, 오랜 전쟁으로 국운은 쇠락해가고 있었다.

이 틈을 타 여진족(후금)이 명나라를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해지자,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이 누르하치(奴兒哈赤)를 족장으로 추대하고 부족 통합에 나서, 1616년(광해군 8년)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칭하였다.

후금은 남만주를 시작으로 중국 본토를 정벌에 나서 명나라와 충돌을 야기했으며 동시에 조선을 발아래 두려 하였다.

10만 대군을 앞세운 명나라가 후금 토벌에 나서면서 조선에 공동 출병을 요구하였다. 임진왜란을 도운 명에 대해 친명정책을 펼쳐 온 조선이지 만, 국운이 다한 ‘명’과 신흥세력 후금 사이에서 신중한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삼학사를 기린 충남 부여 구룡면 소재 창렬사.
삼학사를 기린 충남 부여 구룡면 소재 창렬사.
삼학사를 기린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소재 헌절사.
삼학사를 기린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소재 헌절사.
삼학사를 기린 경기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소재 홍학사 비각.
삼학사를 기린 경기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소재 홍학사 비각.

붕당 간 대립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지지기반이 약해, 정사를 뜻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이에 1613년 광해군은 왕권의 잠재적 위험요소인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면서 왕권을 공고히 해나갔다.

대외적으로는 명나라와 후금, 그 어느 쪽에도 치중하지 않는 중립외교로 양국과 평화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세력의 불만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고 결국, 반정으로 이어졌다.

이에 앞서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로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들이 힘을 합쳐, 1623년 반정을 일으킨다.

반정의 결과로 북인에게 밀려났던 서인이 다시 조정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홍익한 또한 조정의 요직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권력을 잡은 서인은 앞선 세대인 광해군과 북인이 명분을 상실한 정치를 시행하였다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특히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우고, 오랫동안 친교를 다져왔던 명나라와의 의리를 버리고 오랑캐인 청을 떠받드는 금수(禽獸) 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힐난하였다.

특히 홍익한은 “오랑캐가 대체 무엇이기에, 중화질서를 이렇게 더럽히고 주변국을 곤궁하게 하는가. 저 하늘이 수백 년 지켜온 의관문물을 오랑캐가 더럽혔다. 오랑캐는 즉시 처결해 저잣거리에 목을 걸어야 한다.”며 북 인이 지지하던 후금에 대해 적대심을 드러냈다.

홍익한을 비롯한 조정신료들이 후금에 대한 적대감을 가진 데에는 시 대적인 배경이 크게 작용하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서인은 광해군 당시 대외정책 부정의 일환으로 후금과 관계를 끊다시피 하였다.

이들은 임진왜란에 큰 도움을 준 명나라를 배신하고, 근본도 없는 오랑캐를 섬기는 일은 사대부 도리에 어긋나는 일임을 주장했다. 이는 후금의 심기를 건드렸으며, 조선 침략의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 후금은 명나라에 이어 친명배금(親明排金政策) 조짐을 보이는 조선과 외교적 마찰이 일자, 후방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칼을 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안팎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조정대신들은 명분과 국운을 사이에 두고 날 선 대립을 이어갔다.

청나라의 위협이 현실이 되자 조정은 명분을 버리고 화친을 택해야 한 다고 주장하는 주화론(主和論)과 명분을 중시하는 척화론(斥和論)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주화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최명길(崔鳴吉)이었다.

“조선의 국운이 회복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또다시 전쟁을 한다면, 회 복이 불가능하옵니다.”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의견에 김상헌(金尙憲)은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로 맞이한 새 시대였습니다. 사대부에게 대의명분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라며 목소리를 냈다.

또한 척화론자 홍익한은 “더욱이 일시적인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의리와 명분을 저버리고 화친을 택한다면 이는 금수나 다름없습니다.”라며 김상헌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1627년 1월 아민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 등 조선인을 앞세워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략하고 용천, 선천을 거쳐 청천강을 건넜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였다. 인조는 무관 장만(張晩)을 도체찰사로 임명해 배수진을 치고, 요새에 장수들을 파견하고 근군(勤軍)을 모집하였다.

그 사이 후금군은 안주성을 점령하고, 평양을 거쳐 황주까지 진출하였다. 평산에 포진했던 장만은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조선의 전세가 순식간에 기울자 김상용(金尙容)은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어 서울에 남았다.

조정 신료들은 청군 기마대에 맞서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을 청군 진격로 주변의 산성으로 들여보내 방어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조선에서는 장만을 도원수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결국 개성까지 밀려갔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황주까지 점령한 후금은 전투에 참가했던 부장의 유해를 보내며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天啓)’를 쓰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또한 왕자를 인질로 보낼 것 등의 여러 가지 교섭 조건을 걸어왔다. 이에 조선은 철군과, 다시는 후금군이 압록강을 넘지 말 것을 요구하는 등 10가지의 항복 조건을 내걸었다.

조선과 후금의 협상이 마무리되자, 양국은 서로를 형제국으로 인정하는 정묘조약을 맺었다. 조선이 후금을 형님의 나라로 모시는 조약이었다.

이어 조선은 기마민족인 여진족의 전통의식이자, 짐승의 피를 마시고 입가에 바르는 ‘삽혈동맹’을 이행한 후 후금과 ‘형제의 의’를 맺었다.

해당 조 약을 기점으로 조정의 분위기는 화친으로 기울었고, 홍익한을 비롯한 척화파 관료들은 ‘오랑캐와 피로 맺은 동맹’에 대해 원통함을 드러냈다. 사신으로 명에 당도 했던 홍익한은 후금과의 삽혈동맹 소식을 뒤늦게 접한 직 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분통함에 가슴을 내리쳤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웹사이트「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논문 및 학술자료: 임기중 편저『花浦先生朝天航海錄』. 이영춘,「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파 견된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기록(記錄)과 외교 활동」,『조선시대사학보 59』, 조선시대사학 회, 2011.

·사진 제공_ 봉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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