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오랑캐와 피로 형제의 의를 맺다니 가당치 않소. 의리와 명분을 저버린 이상, 그들은 사대부가 아니오.”

후금과의 삽혈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홍익한은 분노에 몸서리치며, 해당 동맹에 앞장선 관료들에 대한 파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묘조약의 일환으로 후금은 인조의 아들을 볼모로 내놓으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조선 측은 후금을 속여 왕자 대신 성종의 아들인 운천군(雲川君)의 증손 원창군(原昌君)과 대신들을 인질로 보냈다. 이를 끝으로 양국의 관계가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오랑캐와 피로 맺은 동맹

그러나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과 후금은 크고 작은 문제로 분란을 겪었다.

세폐증액 문제를 비롯하며, 양국 간 무역문제, 후 금인 도망자 송환 문제 등이 불거졌다. 그뿐만 아니라 후금은 말도 안 되는 양의 조공과 세금을 요구했으며, 볼모로 잡혀간 포로의 배상금 지급을 강요했다.

임진왜란으로 국력을 손실하고 채 회복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전투를 치른 조선은 전쟁에 대한 방비도 없이 후금의 요구에 끌려 다니며 10년을 보냈다.

그러나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선 강화 조약에 의거해 명과 변함없는 관계를 유지해왔다. 조정에서는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홍익한은 “조선을 이리 곤궁에 몰아넣은 금 수 같은 오랑캐와는 지금이라도 척화해야 함이 마땅합니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병자호란 당시 윤집·홍익한·오달제 삼학사의 충철을 기록 한 『삼학사전』본문.
병자호란 당시 윤집·홍익한·오달제 삼학사의 충철을 기록 한 『삼학사전』본문.

“10만의 군대를 몰고 들어온다는 것이 농으로 들리시오? 대책을 마련해 야 할 것 아니오. 당장 조선은 병사와 군량이 수세에 몰렸고, 맞서 싸울 병력도 없소. 이대로 눈치만 보다가는 변을 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최명길이 홍익한을 노려보며 말하였다.

“10년 전 조약을 먼저 깬 것은 조선이 아닌 후금입니다. 그간 물자와 인력을 수없이 보냈으나, 오랑캐의 요구는 갈수록 더해지고 있습니다. 10년 이란 세월이 흘렀고 지금 그들의 전력 또한 전과 같지 않습니다.”

김상헌이 홍익한 의견에 말을 보탰다. 홍익한은 “실로 후금은 형제의 관계를 맺었음에도 식량이나 병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조선 민가를 침략해 수탈, 약탈을 일삼지 않았습니까. 오랑캐의 청을 들어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미 조선과 후금과의 관계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은 가운데, 조선 조정은 십 년 전 논쟁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청은 조선이 명에 했던 예의를 갖출 것을 요구하면서 군신 관계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서신을 보내왔다. 또한 황금, 백금 1만 냥과 말 3천 필, 정병 3만을 내놓으라며 조선의 숨통을 옥죄어 왔다.

이에 최명길을 필두로 한 주화파는 “청을 자극하면 국운에 해가 갈 것 이니, 그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그 사이 방비책을 마련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상헌을 비롯한 척화파는 “대명(大明)과의 의리를 저버린 것도 모자라, 오랑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간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수치입니다.”라고 강하게 반발하였다.

홍익한 또한 “홍타이지(청태종)가 보낸 사신의 머리를 베어 명나라에 보내든가, 그것이 싫으면 저의 머리를 베십시오.”라는 극단적인 내용의 상소문을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었다.

홍익한과 뜻을 함께한 척화파 오달제 역시 “대두되는 공론을 두려워하지 말고 대명을 저버리고 화친을 시도하는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라며 척화파와 최명길을 겨냥, 맹비난을 이어갔다.

척화론자들은 성리학에 근거 한 중화주의와 친명배금을 강하게 주장하였고 인조는 더는 중립외교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였다.

더군다나 후금의 태종은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사신으로 보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보냈다.

후금의 사신들은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이에 인조는 사 신 접견을 거부했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국호를 ‘청(靑)’으로 고치고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1636년 11월 청나라는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 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홍타이지의 경고는 참혹한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청은 명과의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조선의 변함없는 친명에 불만을 품었다.

또한 청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척화론이 조선 조정 내에서 대두 되는 분위기를 감지하였다.

이에 청은 명과의 전면전을 앞두고, 위협을 사 전에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0만 군사를 몰고 조선을 침략했다.

1936년 12월 2일 청의 선봉 마부태(馬夫太)가 압록강을 건너 의주 임경 업(林慶業)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을 피해 남하하고 있었다.

철갑을 입은 기병(鐵騎: 철기) 청군 기마대의 돌격은 거침이 없었다. 의주를 떠나 서울의 양철평(良鐵坪: 은평구 녹번동 부근)에 도달하는데 수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600킬로미터에 이르는 의주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불과 닷새 만에 주파 한 것이었다. 이어 심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한양 침략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전세가 급격하게 기울자 조정에서는 최명길을 파견해, 적의 진격을 늦추게 하고 왕자와 비빈들을 강화도(江都: 강도)로 피난시켰다.

이후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서울을 떠나 강화도로 몽진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청은 빠른 기세로 남하 해왔고, 조선군 지휘관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거점지가 함락당하는 일 이 연이어 일어났다. 당시 황주의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던 김자점은 12월 6일부터 청군의 침략을 알리는 봉화가 연이어 올랐음에도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는 일대의 실수를 저지른다.

봉화가 피어오른 지 4일 만에 조정에 보고되고 이미 이때는 청군이 평안도까지 점령한 후였다. 수일간 피어오르는 봉화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김자점(金自點)의 실책은 결국 큰 화로 이어졌다.

청의 침략으로 위기에 몰린 인조와 조정 신료들은 궁을 나섰고, 창경궁을 떠난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뱃길이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듣게 된다.

당시 강화도로 가려면 양화진에서 배를 타고 김포까지 가서 강화도로 들어가야 했으나, 유일한 뱃길인 김포나루가 끊긴 것이었다. 이에 인조는 방향을 틀어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조정신료들의 분분한 의견 속에 인조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청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있었다.

청 선봉대는 단기간 내 조선 내륙까지 침투해오자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대의명분을 강조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던 김상헌은 연이은 청의 승전소식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였다.

주화파 최명길은 “후금 군대의 병력이 천만을 넘는데다, 우리 군사는 방비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쐐기를 박았다.

친명을 주장했던 신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고 있었으나, 홍익한을 필두로 한, 윤집, 오달제 등 척화파는 끝내 주화파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 사 이 강화도까지 청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강화에 몸을 숨긴 대군들과 세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부지불식간에 불운의 그림자가 조선을 뒤덮었다.

이 무렵 최명길은 화의를 배척하여 병자호란을 일으킨 원흉으로 홍익한을 지목하며, 청이 오는 길목 중 가장 위험한 평양에 그를 배치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다.

이에 평양 서윤으로 부임하라는 어명을 받은 홍익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화도 교동을 거쳐 20여 일을 달려 평양 보성산에 당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란의 기운을 감지한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고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기근과 추위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홍익한은 이를 목도한 즉시 격문(檄文)을 내걸고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또한 “군법을 위반하였으나, 죄를 뉘우치고 돌아와 과오를 씻으라”고 위무하니, 관군들이 평양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고 을이 점차 안정을 찾아가자 홍익한은 평양 수비 비책을 세웠으며, 관군과 백성을 다독여 평양성을 다스렸다.

수양산에 내린 물이

이제(夷齋)에 원루(寃淚)되어

주야불식하고 여울여울 우는 뜻은

지금에 위국충성을 못내 슬퍼하노라.

평양성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될수록 홍익한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직후 홍익한은 강화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세자와 비빈이 머문 강화도가 함락되자 홍익한의 가족들 또한 위험에 처하였다.

홍익한의 장자(長子) 홍수원이 두 어머니를 모시고 가던 중 적군에게 계모 허씨가 잡히는 사태가 발생한다.

홍수원의 강한 항의에 적군이 칼끝을 허씨에 겨누었다. 홍수원이 이를 막는 과정에서 칼에 맞아 죽게 되었고, 아들을 앞세운 허씨 부인 또한 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편을 잃은 홍수원의 처도 혀를 물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다. 이에 국가와 가족을 걱정하는 홍익한의 애틋한 정은 식구들에게 닿을 수 없었다.

또한 이를 강화도를 떠난 홍익한은 가족의 운명을 모른 채, 고국의 앞날을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곤 하였다.

청의 대노,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다

정묘호란을 겪은 청은 강화로 가는 뱃길을 막고,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남한산성 당도와 동시에 인조는 청의 군사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이에 앞서 척화를 주장했던 신료들이 순절 혹은 자결하였다.

의정부 우의정 김상용은 성남문루에 올라가 화약을 몸에 차고 불 속에 뛰어들었으며, 예조판서 김상헌은 여러 날 음식을 끊고 있다가 스스로 목을 매었으나, 신료에 의해 구조되었다.

남한산성에서 강화도까지 함락되어 세손, 비빈들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인조는 결국 마지막 선택을하게 되었다.

인조는 최명길, 이영달을 파견하여 국서를 청나라 진영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지시하였다.

“청나라 사신의 목을 베고 명과 의리를 지키자고 주장했던 이가 누굽니까. 척화로 인해 국운은 기울었고 수세에 몰렸습니다. 전하 주동자인 홍익한을 청나라로 압송해야 합니다.”

화친에 앞장섰던 최명길은 홍익한을 포로로 보낼 것을 주장하였다. “이미 형세가 기울었으니, 자결함이 나을 듯하나,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는 인조의 숨통을 옥죄며 채근하였다. 남한산성 고립 33일째 되던 날, 최명길은 인조를 청에 넘겨주지 않기 위해 화친을 약속하는 서신을 썼다.

이를 알게 된 김상헌은 대노하며 서지를 찢어버렸다. 척화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최명길이 청에 답서를 보냈으나, 청은 끈질기게 인조가 성 밖으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다.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세워진 홍익한의 충렬각과 충렬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세워진 홍익한의 충렬각과 충렬비.

남한산성 고립 42일째,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그곳에 머물던 봉림대군, 빈, 재신들이 청의 포로가 되었다.

비보를 접한 인조는 곤룡포를 벗고 청나라 관리들이 입던 것과 동일한 남색 옷을 입었다. 백마를 타고 시종 50 여 명을 거느리고 세자와 함께 성을 나선 인조는 삼전도에 세워진 청태종 황제단을 향해 갔다.

인조는 청태종에 세 번 절하고 땅에 아홉 번 머리를 박는 치욕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항복의 예를 표하였다.

이를 지 켜보던 조정 신료들의 곡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졌다. 끊이지 않는 신하들의 곡소리와 울음소리를 뒤로 하고 인조는 창경궁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청은 세자와 척화를 주장했던 조정신료를 볼모로 보냄으로써, 조선의 항복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홍익한, 윤집, 오달제 삼학사가 오랑 캐 진영으로 떠나게 되었다. 삼학사가 오랑캐 진영으로 떠나는 날이 밝았다.

“조선을 위해서라면 이 모진 목숨 몇 백 번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홍익한이 인조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만세를 누리소서.”

“오랑캐 손에 죽느니, 자결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으로 남았습니다. 국운을 위해 목숨 바치는 일에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오달제가 도리어 인조를 위로하였다.

“죄 없는 그대들을 심양으로 보낼 생각을 하니, 내 천추의 한이 되는구나. 이날까지 국운을 걱정하는 그대들의 충절을 내 잊지 않고 조선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겠네. 그대들의 가족은 내가 성심껏 돌볼 테니….”

인조가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에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오열하였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웹사이트「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논문 및 학술자료: 임기중 편저『花浦先生朝天航海錄』. 이영춘,「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파 견된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기록(記錄)과 외교 활동」,『조선시대사학보 59』, 조선시대사학회, 2011.

·사진 제공_ 봉화군청

저작권자 © 뉴스퀘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