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청의 굴욕적인 항복요구를 수용한 대가로 인조는 친명배금을 주장하던 삼학사(三學士), 곧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김상헌(金尙憲)뿐만 아니라, 대신의 자녀들과 관리 등을 포함한 조선인 197명을 청에 넘겨주어야 했다.

이 중에는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둘째 아 들 봉림대군(鳳林大君: 훗날의 효종9) 그리고 셋째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도 포함되어 있었다.

죽음 같은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겨울바람은 매서웠고, 청나라는 멀기만 했다.

아무리 걸어도 좀처럼 심양은 나타나지 않았다. 홍익한은 점점 더 지쳐갔고, 발걸음을 뗄 때마다 무릎이 꺾였다.

포승줄이 닿는 부분의 옷감은 헤지고 찢어진 살에서 피가 배어나왔다. 어린아이와 여자들은 추위와 배고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쓰러졌고 청의 군사들은 그들을 마구 밟았다. 일어서지 못하는 이들은 그대로 버리고 갔다.

발길 닿는 곳곳, 눈에 묻힌 시체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짚신은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얼고 녹기를 반복한 발가락은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홍익한은 청군의 매질을 오롯이 당해냈다.

드디어 심양 시내를 감싸고 흐르는 혼하(渾河)에 당도 했다. 이미 청나라 대신들이 나와 대기하고 있었고, 조선에서 혼하까지 볼모를 압송해 온 청군들은 인질을 인계하고 흩어졌다.

홍익한을 비롯한 인질들은 나루터에서 9리를 걸어 남탑(南塔) 부근에 이르렀고 대남변문(大南邊門)을 거쳐 외 성(外城)에 입성했다. 드디어 외성을 지나 내성 대남문(大南門) 안에 있던 관소(館所)에 도착하였다.

관소 안에는 이들이 머물 인질관이 마련돼 있었다. 300명을 수용할 수 있던 고려관(인질관)은 사실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끝까지 척화론을 주장하였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은 그곳에서 5 일 동안 어두운 곳에 갇힌 채,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문을 열고 들이닥친 청군들이 홍익한을 밖으로 끌어낸 뒤 꿇어앉히려 했으나 그가 있는 힘껏 버티고 서 있었다. 이에 청군이 홍익한의 오금을 걷어찼다. 주저앉듯 무릎을 꿇게 된 홍익한은 손을 들어 해를 가렸다. 심양에 온 이후 처음 보는 햇빛이었다.

“고개를 들라. 황제의 명으로 물으니, 신중하게 답하거라.” 용골대가 홍익한을 내려다보면서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척화를 주장한 이가 너뿐만 아닐 터, 어찌 너만 압송되었느냐?”

“오랑캐들이 조선에 당도 했을 때, 상소문을 올려 네놈의 머리를 베어 청으로 돌려보내자고 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용골대가 달려들어 홍익한의 머리채를 잡아 쥐었다. 홍익한이 검붉은 피가 섞인 침을 홍타이지 발밑에 뱉었다. 용골대가 칼을 빼 들고 홍익한에 다가가자, 홍타이지가 이를 만류하고는 자리를 떴다.

“네놈들이 황제 폐하께 한 짓은 죽어 마땅하나, 지금이라도 훼절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명이 있었다.”

“금수 같은 놈들.”

“마지막 기회다. 훼절하겠느냐?”

“짐승 같은 오랑캐와 피를 나누어 마신 것도 원통해 피를 갈고 싶거늘. 훼절이라.”

“더 할 말이 없느냐?”

용골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홍익한을 끌고 나온 청군들이 그의 사지를 비틀기 시작하였다. 홍익한은 고통에 몸부림치다가도 용골대와 눈 이 마주치면 눈알을 부라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홍익한이 간신히 고개를 들어 용골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였다.

“네놈의 사신이 왔을 때, 가죽을 벗겨 네 우두머리 면전에 보내야 하는데, 그것이 원통하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청태종은 홍익한을 다시 감옥에 가둘 것을 명했다.

양지 언덕 여린 풀들 새싹 터지듯 돋으니, 
외딴섬이나 새장에 갇힌 신세 마음 슬퍼지네. 
우리 풍속의 답청놀이는 바랄 수 없고,
지난날 궁중의 곡수유상하던 일 꿈속에서 보는구나.
밤바람이 바위를 뒤흔드니 음산이 움직거리고, 
잦아드는 봄물에 눈이 내려 월굴이 열리는구나. 
굶주리고 목마른 속에 겨우 실낱 같은 목숨 부지하니,
평생 오늘 같이 뺨에 눈물 적시려나).
- 심양 감옥에서 답청일에 회포를 읊다

청태종은 홍익한을 회유하기 위해 그를 별관에 가두고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연회를 열었다.

그 사이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불던 겨울이 물러나고 봄이 왔다. 홍익한은 더욱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꿈속에서나마 그리 운 고향과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발 딛고 선 곳이 청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불현듯 눈물 흘리곤 했다. 그런 홍익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청은 다양한 회유책을 썼으나, 홍익한은 청이 내놓은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청군들이 억지로 쑤셔 넣으면 그들 얼굴에 음식을 뱉어버렸다.

과거 명나라 충신이었던 이들을 아군으로 만들었던 청태종은 홍익한의 훼절을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랐다.

홍익한만 돌아서면 청으로 압송돼 온 척화파 세력이 청나라 사람으로 변절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홍익한은 완고했다.

홍타이지가 회유하면 할수록 그는 더욱 강경한 입장을 고 수했다. 지속된 청태종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홍익한은 붓을 들고 다음과 같은 글을 써내려갔다.

“조선이 명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청의 태종을 황제라 칭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맹약을 어겼다면 이는 패악한 형제고, 황제라 칭했다면 이는 하늘 아래 두 명의 천자(天子)가 있는 것이다. 어찌 한 집안에 패악한 형제가 있을 수 있으며, 두 천자가 공존할 수 있는가. 명분과 충을 중시하는 사대부의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상소를 올려 신료들을 분열케 하고 나라의 패망을 초래하였으니, 내 주검이 도륙당한다 할지라도 달게 받겠다. 속히 나를 죽여, 혼이라도 조선에 닿게 하라.”

죽음으로 지킨 충정과 절개

홍익한의 상소는 청태종에게 닿았다. 볼모로 압송된 처지였지만 거듭된 태종의 회유책에도 홍익한은 선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청태종에 호통을 치고 자신의 뜻을 주장해, 그들을 당황케 했다. 뿐만 아니라, 청의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끝까지 친명배금의 원칙을 고수하고, 대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홍익한은 청태종의 면전에 대고 “천조(天朝: 명나라)를 배반한 오랑캐 놈이 어찌 황제가 된단 말인가. 동물의 우두머리라면 모를까.”라고 비아냥거렸다. 격노한 태종이 벌떡 일어나자 군졸들이 달려와 홍익한을 끌어냈다.

“조선으로 돌아가기 좋은 날이구나.”

홍익한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청나라 사람들 사이에 간간 이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후금과 맞선 지난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홍익한이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군졸 하나가 홍익한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발소리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홍익한의 옅은 미소 위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짧은 단말마 뒤에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1637년 3월, 홍익한은 심학사 가운데서 가장 먼저 살해당했다. 홍익한의 살해 이후 예부 건물에 갇혀 있던 오달제와 윤집은 4월에 대서변문(大西邊門) 밖에서 참수 당하였다.

홍익한이 죽은 후 조선에서는 그가 평소에 타던 안마와 의금(衣衾)만을 수습해 경기도 평택 서쪽 경정리에 장사지냈다.

반면 최명길과 김상헌은 북관(北館)에 체류하다 1643년 4월 석방되어 조선으로 돌아왔다. 홍익한과 함께 청에 압송되어 온 소현세자 일행은 1645년 2월 18일 한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홍익한이 심양에서 머문 기간은 두 달 남짓이지만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보낸 기간은 1637년부 터 1645년까지 총 8년의 세월이었다.

홍익한의 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302 소재.
홍익한의 묘.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 302 소재.

조선으로 돌아온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인조는 왕권 강 화 차원에서 세손(世孫: 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청나라에서 태어난 현종(顯宗)은 아버지인 효종이 죽자 왕 위에 올랐다. 이에 현종은 홍익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에게 벼슬과 함께 경제적 지원을 내렸다.

1653년 도승지가 추증되고, 1686년 이조판서와 충정(忠正)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 뒤 1705년 영의정이 추증 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경기도 평택시 팽성면 본정리로 이장하였다.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강화의 충렬사(忠烈祠),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부안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영천의 장암서 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 평양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화포집(花浦集)』·『북행록(北行錄)』·『서정록(西征錄)』이 있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웹사이트「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선비」,
논문 및 학술자료: 임기중 편저『花浦先生朝天航海錄』. 이영춘,「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파 견된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기록(記錄)과 외교 활동」,『조선시대사학보 59』, 조선시대사학 회, 2011.

·사진 제공_ 봉화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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