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한국지역인문자원연구소】 (앞에서 계속)

장계향은 타고난 천성이 정이 많아 불우한 이웃을 돕지 않고 못 배기는 성격인데다, 성인의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했으므로 이웃사랑 애민정신이 몸에 배여 있었다. 그것은 그가 쓴 시「학발」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이웃사랑 애민정신이 몸에 밴 여인

장계향이 사는 아랫마을에, 지난해 시집을 온 열 여섯 새댁과 스무 살 신랑이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노파는 딸만 여섯을 낳고 마 흔 후반에 어렵게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그 귀한 아들이 그만 군역에 걸려 징집되고 말았다.

노파는 어렵게 얻은 외동아들이 군에 불려가자 식 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다.

소식을 들은 장계향은 약간의 양식과 떡을 준비해서 노파의 집을 찾았다. 떡을 내놓아 노파를 위로 했고, 그 집의 농사와 살림을 거들어주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초서로 시를 지었다.

백발의 할머니 몸져누웠네(鶴髮臥病)

아들은 떠나 만 리 밖에 있고(行子萬里)

만 리 밖으로 떠난 아들(行子萬里)

어느 달에 돌아올꼬(曷月歸矣)

백발의 할머니는 몸져누웠고(鶴髮抱病)

서산의 해는 급히 진다(西山日迫)

손 모아 하늘에 빌고 또 비는데(祝手于天) 하

늘은 어찌하여 아무 대답 없나(天何漠漠)

백발의 할머니 병을 무릅쓰고(鶴髮扶病)

혹은 일어서고 혹은 기는데(或起或陪)

지금 더욱 이러한데(今尙如斯)

의지할 곳 끊어져 어찌할까나(絶据何若)

장계향의 박애정신이 잘 드러나는 시이다. 학문을 익히는 것으로 끝내 지 않고 실천하는 모범을 보였던 것이다.

장계향은 결혼 후 시아버지와 의논하여 걸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비들을 데리고 길쌈을 크게 벌여 옷감을 생산했다고 한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시아버지 이함(李涵)은 재력이 제법 되는 중소지주였던 것 같다. 굶주린 이웃들에게 양식을 나누었으므로 시댁에는 걸인과 배고픈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줄을 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왜적의 노략질로 양식이 남지 않아 굶어죽은 시체가 즐비하자 사재를 털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장계향은 그런 집안의 며느리가 됐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걸인들을 본 장계향은 시댁에 놀고 있는 손, 즉 한가한 노비들을 떠올렸고, 그 손을 놀리지 않고 활용하면 헐벗은 걸인들에게 옷을 만들어 입힐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아버지에게 노비의 손을 빌려달라고 청한 것이다. 원래 가진 자가 베푸는 것을 당연시 여겼던 이함은 그 계획에 흔쾌히 찬성하고 적극 도왔다.

장계향과 시아버지의 손발이 척척 맞아서 길쌈으로 많은 옷감을 생산할 수 있었고, 그 옷감으로 옷을 만들어 걸인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장계향은 또 남몰래 의약을 공부해서 걸인들을 치료하기도 했고, 혼자 사는 노인들을 돌봤으며, 늙은 노비가 병을 앓자 그들의 생활을 살피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사과하며 직접 치료를 해주기도 했다. 아들 이현일은 선행을 베푸는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두들마을 안내도와 석계 이시명이 네 아들과 은거생황을 하던 두들마을 내 석천서당.
두들마을 안내도와 석계 이시명이 네 아들과 은거생황을 하던 두들마을 내 석천서당.
두들마을 안내도와 석계 이시명이 네 아들과 은거생황을 하던 두들마을 내 석천서당.
두들마을 안내도와 석계 이시명이 네 아들과 은거생황을 하던 두들마을 내 석천서당.

어린 여종을 돌봐 주기를 마치 자기의 딸처럼 해서 그들에게 질병이 생기게 되면 반드시 그들을 위해 음식을 먹여주고 간호하여 온전히 편 안함을 얻도록 했다. (…)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이 있으면 불쌍히 여겨 구휼하고 도와주기를, 마치 남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근심처럼 여기 고는, 자신의 가난과 곤궁을 핑계로 못 본 척 하는 일 없었다.

몰래 남에게 음식물을 보내주고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니 이웃의 늙은이와 마을의 할미들이 모두가 그녀의 은덕에 감동하여 오래 살고 복 받기를 빌었고, 죽어서도 반드시 은덕에 보답하겠다고 축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1641년은 극심한 흉년으로 모두가 굶주렸다. 역질과 기근으로 모두가 허덕이자 장계향은 칡과 도토리 등산에서 나는 식재료로 약과 음식을 만들어 빈민을 구휼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에 불이 나서 전소됐고, 출가했던 두 딸이 친정을 방문했다가 급병을 얻어 죽는 불행을 겪었지만 장계향은 내 불행보다 남의 불행을 먼저 보살피며 헌신했다.

1671년은 장계향의 나이 일흔네 살이 되는 해였다.

그해 100만 명 이상 이 굶어죽는 대흉년이 들었다. 굶주린 많은 기민들이 가족을 거느리고 장계향의 집을 찾아와 자신들을 노비로 받아줄 것을 청했다.

살림에 여유가 없어서 장계향으로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일단은 그들을 다 받아들이고 도토리와 솔잎, 무와 쑥, 죽은 산짐승의 뼈와 엄나무, 복숭아나무의 진과 살구 씨 등 식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어서 먹여 살렸다.

남는 것은 굶주린 이웃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이듬해 흉년이 해소되자 노비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을 모두 놓아 주었다.

그 외에도 숱한 선행일화를 남겼다. 이렇듯 장계향의 일생은 선행 그 자체였다. 베풀 것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를지언정 있는 것을 숨기고 굶주린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지는 않는 진정한 여중군자였다.

장계향의 삶

장계향이 살았던 시기는 선조임금 연간에서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때까지였다.

태어나던 1598년은 7년 동안 이어진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이고,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해이기도 했다. 이때는 선조임금 31년이 긴 하지만 실질적 국정은 광해군이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계향의 미래 남편이 되는 이시명이 장흥효가 운영하는 경당서당에 머물며 학문을 연구한 1616년은 광해군 8년으로, 이이첨과 정인홍, 홍여순, 허균, 기자헌 등의 대북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특히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써 남명학파인데, 남명의 문묘종사를 추진하며 퇴계학을 폄훼하고 퇴계학 파 숙청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때문에 류성룡과 정경세를 비롯해 많은 퇴계학파 사류가 탄압을 받고 조정에서 축출됐다. 따라서 퇴계학파는 관계에 거의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정치환경이었다.

이시명은 장흥효 문하에서 수학하고 1612년(광해군 4년) 사마시에 합격 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정통 퇴계학파였다.

그가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시 절은 정권을 잡은 정인홍 중심의 대북파가 퇴계학파를 한창 탄압하고 있을 때였다. 가까이에서 그것을 지켜본 이시명은 정치에 염증을 느껴 과거를 단념했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맏형 이시청이 과거보기를 소망했으므로 1616년 형을 모시고 한양으로 올라가 알성시를 보았다. 결과는 낙방이었다.

대북이 여전히 퇴계학파를 배척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한 결과였다. 이시명은 형 이시청과 함께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원래 건강하지 못했던 형 이시청이 안동 부근에서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이시명의 본관은 재령(載寧)이고, 자는 회숙(晦叔)이며, 호는 석계(石溪)이다. 아버지는 현감 이함이다. 학행으로 강릉참봉에 제수되기도 했으나 부 임하지 않았다.

장계향은 열아홉에 이시명과 혼인했다.

아버지 장흥효의 뜻이었다. 장흥효가 전부인과 2년 전 사별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사는 제자 이시명에게 무남독녀 외동딸을 보낸 것은 그만큼 이시명의 인품이 훌륭하고 학자로서의 자질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이시명에게는 이때 사별한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이상일(딸이 하나 더 있었다는 설도 있다)이 있었다. 이상일의 생모는 임진왜란 의병장이며 예문관검열을 지낸 광산 김씨 김해의 딸 김사안이었다.

장계향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이문열의 장편소설 『선택』, 1997년 민음사 간.
장계향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이문열의 장편소설 『선택』, 1997년 민음사 간.

장계향이 처음 시집을 갔을 때 이상일은 일곱 살이었다.

겨울이어서 장계향은 이상일을 업어서 마을 훈장에게 데려다주고 업어 서 데려왔다. 이시명의 전부인이 낳은 아이를 정성스럽게 돌봤으므로 사람들은 장계향이 계모인 줄 몰랐다고 한다.

장계향은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1남을 합쳐 7남 2녀를 양육했다. 친정아버지가 남기고 간 이복동생 장철견까지 데려다 키웠으므로 모두 합 하면 그녀가 키운 아이는 열 명이었다.

그녀의 아들이 모두 훌륭한 선비로 자랐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칠현자(七賢子)라고 했다. 그중 이 현일은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벼슬에 나아가 크게 이름을 떨쳤다.

1623년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하여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이로써 이이첨과 정인홍의 대북이 밀려나고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

남편 이시명은 이제 세상이 바뀌었으므로 퇴계학파에 대한 탄압도 끝났다 생각하고 다시 과거를 준비했고, 향시 별과에 응시해 수석을 차지했다.

장계향의 나이 서른다섯인 1632년 6월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영해 북쪽 한밭골에 장사지냈다. 이듬해 2월엔 친정아버지 장흥효도 세상을 떠났다.

이보다 앞서 장계향은 무남독녀 외동딸인 자신이 시집을 가게 되고 친정어머니도 돌아가시자 혼자 계시는 친정아버지를 걱정해 재혼을 권했다.

그래서 친정아버지는 안동 권씨와 재혼하고 3남 1녀를 두었다. 그런데 이 제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계모와 배다른 친정동생들이 의지할 곳이 없자 장계향은 그들을 모두 데려다가 집을 지어 살게 했다.

장남 장철견이 이때 겨우 여덟 살이었는데, 그 아이는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 직접 키우고 공부시켰다. 덕분에 장흥효는 대가 끊이지 않았다.

장계향의 남편 이시명은 아버지 삼년상이 끝나자 과거를 준비하러 상경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병이 깊어져 급히 돌아와야 했다.

그러던 중 병자 호란이 일어났다.

장계향은 여자의 몸임에도 의병을 일으킬 것을 주장했다. 이시명도 최명길 등이 주장한 화의론에 극구 반대하며 유생들과 함께 척화소를 올렸다.

결국 굴욕적인 화의가 이루어지자 절망한 이시명은과 거를 아주 포기했고, 세상과의 연을 끊고 아버지 묘소가 있는 한밭골로 이사했다.

강흡과 홍석, 홍우정, 심장세 등 많은 선비들이 이때 벼슬을 포기하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장계향의 나이 마흔한 살인 1638년에는 아들 이휘일이 박늑의 딸 무안 박씨와 혼인하는 경사가 있었다. 그러나 남편 이시명이 경상도관찰사의 모함으로 체포돼 한양으로 압송됐다.

무고임이 밝혀져 풀려나기는 했지 만 이시명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세상과 담을 더욱 두텁게 쌓았다.

1640년 이시명은 더 깊은 산골인 영양 석보촌으로 이사했다. 1653년에는 다시 영양 수비로 이사했고, 그곳에 영산서당을 열고 학동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672년에는 아들 이휘일이 쉰세 살로 세상을 마감했다.

이휘일은 외할아버지 장흥효의 학문을 전수하고 저곡에 살며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존재선생으로 불리며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학행으로 천거돼 참 봉에 제수됐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장계향의 막내아들 이운일도 죽었고, 이현일의 부인 무안 박씨도 죽었다. 이현일은 당시의 어머니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다.

선친(이시명)의 둘째 아들 휘일이 부인(장계향)에게는 큰아들인 데다 행실이 어질어서 부인이 특히 사랑하였고, 딸 둘과 막내 운일도 모두 평생 염려하였는데, 모두 불행히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인이 필시 슬픔으로 몸을 해칠 것이라고 하였으나, 감정을 단

속하고 슬픔을 억제하여 지나치게 상하는데 에는 이르지 않고서 말하기를, “나는 애통하고 절박하다 하여 부모님이 남겨 주신 몸을 해치지 않는다.” 하였다.

눈물이 마를 날 없는 중에 남편 이시명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안동 도솔원으로 이사했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을 때 이시명은 향년 여든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 3년 후 아들 이현일이 천거로 장악원주부에 제수돼 첫 벼슬길에 올랐다.

장계향이 이현일을 가졌을 때였다. 온 집안 가득 오색 상서로운 기운이 서리며 소강절(邵康節: 소옹)이라고도 하고 사마온공(司馬溫公: 속수선생 사 마광)이라고도 하는 대인이 문 앞에 와 있는 꿈을 꾸었다. 또 어떤 사람은 안고 있던 토끼를 건네며 ‘하늘에 사는 토끼’라고 말했다. 그 태몽을 꾸고 이현일이 태어났다.

이현일은 외할아버지 장흥효에게서 학문을 전수받고 초야에 묻혀 학문 만 연구했다.

그러다가 2차 예송인 갑인예송 후 남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학행으로 천거돼 사직서참봉에 제수됐다. 그러나 이현일은 아버지 상을 당해 여묘살이 중이었으므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상기가 끝났을 때 장악원주부에 제수되자 부임했고,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업, 이조참의, 국자좨주 등을 역임하고 1690년(숙종 16년) 이조참판에 제수됐다. 이현일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상소했지만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수차례 상소를 하고서야 어렵게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대사헌에 제수됐다. 이현일은 수차례 사양했고, 임금이 사관을 보내 어명을 전달하고 데려오게 했을 때도 가지 않았다. 그 후로도 임금의 소환이 계속되자 마지못해 대사헌에 부임했다.

그러나 송시열을 공격했다가 오랫동안 유배생활을 한 조사기가 선왕을 모욕한 죄로 다시 잡혀오자 그를 용서해야 한다고 청했다가 탄핵받고 함경도 홍원현에 유배됐고, 종성과 호남 광양, 갈은리 등으로 이배되며 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1699년 (숙종 25년)에야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안동 임하현에 살며 후학을 양성하여 ‘퇴계 이황에서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갈암이 현일로 이어지는 갈암학통을 형성했다.

이현일이 벼슬을 살러 한양으로 올라간 후 장계향은 장자 이상일을 따 라 영해 벽수촌으로 이사했다.

1677년 장계향이 여든 살로 병이 들자 이 상일은 어머니를 모시고 영양 석보 두들마을로 돌아왔다.

이듬해 이상일 이 예순여덟 살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1680년 7월 7일 장계향도 여든셋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소소함을 읊다(蕭蕭吟)」

창 밖의 비는 소소하고(窓外雨蕭蕭)

자연이 내는 퉁소소리는 쓸쓸함을 담았네(蕭簫聲自然)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노라면(我聞自然聲)

내 마음 또한 자연이 되네(我心亦自然)

장계향은 소소함을 사랑한 자연인이었다. 자연의 구성원으로써 자연에 해 되지 않고 자연의 하나로 살다가 간, 작은 몸으로 큰 그림자를 남긴 여중군자였다.

참고자료

『갈암집』(이현일 저, 홍기은 역, 한국고전DB),「사람이 되라, 손자에게 보낸 퇴계의 편지」(장윤수, 대구교육대학교),「성인을 꿈꾼 조선시대 여성철학자 장계향」(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여중 군자 장계향과 운악 이함의 사회적 실천」(장윤수, 대구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음식디미 방』에 수록된 부식류의 식재료와 조리법 고찰」(김업식, 안양과학대학 호텔조리영양학부 교수. 고 희철, CJ식품연구소 선임연구원),「장계향의『음식디미방』과 유교여성 살림철학」(이난수, 사단법인 선비정신과 풍류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정부인 안동장씨 이름‘장계향’, 이렇게 찾았다」(배영 동,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사진 제공_ 영양군청, 안동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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