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10월 9일 한글날, 금·토·일 연휴라 그런지 영동고속도로 정체가 심하다.

새말 나들목 나갔다 국도로, 둔내로 진부 나들목으로 다시 들어와서 강릉휴게소에 쉬어가려니 날은 벌써 어둡다.

가을 어둠은 왠지 가슴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다. 정오 무렵 대구를 출발해서 양양 나들목으로 빠져나왔으니 6시간 반가량 걸린 셈이다.

라디오에서는 한글날이라 박물관 유물 같은 “시나브로”를 말하는데 요즘엔 잘 쓰지도, 알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가을산마다 붉어지는 걸 어쩌랴? 시나브로 단풍이 든다.

관동팔경 낙산사 의상대를 지나

속초 대포항으로 가려다 낙산 해수욕장 입구에서 차가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다.

극심한 정체로 포기하고 낙산해수욕장으로 들어갔다. 불야성 이룬 해변을 몇 차례 돌다 저녁 7시 넘어 간신히 방을 잡았는데 7만 원이다.

그것도 현찰로 받는다. 10만 원, 15만 원을 줘도 방이 없으니 그나마 싼 가격이다.

고마운 건 식당에서 바가지 쓰지 말라고 일러준다. 늦은 시간에 물곰 식당을 찾아 겨우 저녁을 해결했다. 물곰을 동해에선 곰·물곰·곰치, 남해안은 미거지·물미거지, 서해에서는 잠뱅이·물잠뱅이로 부른다. 공통적으로 물메기라 한다.

8시 반 넘어 밤 파도 하얗게 이는 낙산사(洛山寺)1) 의상대에 서서 건너편 홍련암(紅蓮庵)을 바라본다. 이곳은 동해 해맞이 명소로 관동팔경(關東八景)2)의 하나다.

가까운 옛날 밀월여행 왔던 일이 그립다. 어둠 속의 관음보살상을 보면서 걷는데 밤 9시 넘으면 출입금지다.

남해 보리암, 여수 향일암, 양양 홍련암을 가리켜 3대 해수도량(海水道場)이라 일컫는다. 파도가 철썩이며 바위에 부딪쳐서 흩날리는 물방울들, 얼굴을 때리는 물보라다.

비릿한 바다냄새를 이끌고 여관으로 들어오니 커튼 색깔, 베갯잇도 70년대 무늬인데 깔끔하고 단정해서 좋다. 글라스의 맥주 거품이 부드러워선지 오늘 밤은 집 떠나왔어도 정겹다.

오색2리 주차장에는 벌써 겨울비 내리고 춥다.

다섯 빛깔 꽃이 피는 나무가 있대서 오색인데 아침 7시다. 길옆으로 오색이 아니라 일곱 색, 여덟 색 찬란한 상가, 숙박시설이 줄을 섰다.

10분 더 걸어 양양·속초 버스 종점. 대청봉이 가장 가까운 남설악탐방지원센터 앞에서 비옷을 입고 배낭을 새로 멘다. 올라가는 길은 대체로 경사가 급한 편이나 정상까지 가장 짧은 구간이다. 물푸레·생강·신갈·쪽동백나무를 만난다.

7시 20분, 대청봉까지 4.8킬로미터 거리다. 산뽕·조릿대·산목련·당단풍나무를 따라 지금부터 가파른 돌계단. 나무 이파리들은 벌써 붉게 물든다.

나의 청춘도 단풍처럼 물드는가? 반바지 차림 파란 눈의 외국인은 춥지도 않은지 씩씩하게 오른다. 젊음이 좋은데 어느새 늙어가지만 한때 나도 펄펄 날았다. 비는 내려도 땀이 뚝뚝 흐른다.

설악산 대청봉.
설악산 대청봉.

우리나라 최초의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

7시 45분, 해발 710미터 지점(대청봉4·오색1km), 바람이 불어 발밑으로 단풍잎 먼저 지나간다. 바람이 거센 오래된 소나무지대에 서니 한계령 쪽으로 비바람이 부옇다.

간간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아침 햇살은 비와 섞여 내린다. 단당풍·산동백·산머루들이 어울려 고운 단풍을 만들었는데 벌써 70퍼센트 정도 물들었다.

8시에 발아래 오색마을이 보이는 화장실(오색1.7·대청봉3.3km). 다시 내리는 빗줄기는 불타는 단풍잎을 끈다.

까치박달·고로쇠·복자기나무…….

비는 잠깐 멎고 참회나무는 붉은 깍지를 벌리고 웃는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의 대명사, 복자기나무는 단풍 중에서 으뜸이다. 이파리가 마치 불타는 것 같아 일본에서는 귀신의 눈병을 고칠 만큼 아름다워 귀신안약나무(鬼目藥)라 부른다.

중부이북 산속에 잘 자라고 암수나무 따로지만 한 그루인 것도 있다. 프로펠러 같은 날개가 빙글빙글 먼 곳까지 날아간다.

개박달, 나도박달이라 해서 박달나무처럼 단단하여 수레바퀴로 썼기 때문에 우근자(牛筋子)라 했다. 무늬가 좋아 가구재로,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도 귀하게 쓴다.

탄닌·수액·당분을 얻을 수 있고, 봄에 노란 꽃이 피며 가을에 물든 잎은 단풍의 여왕이다. 붉은 립스틱점쟁이에게 홀린 듯 빛깔이 곱고 황홀해서 발을 옮기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점쟁이를 뜻하는 “복(卜)자기”가 됐던가?

오래된 전나무 지나 까치박달나무 군락지인데 아침 햇살에 붉은색 단풍 든 물이 뚝뚝 흐른다.

쓰러진 나무를 그대로 활용한 계단을 밟고 물 흐르는 작은 계곡 올라갈수록 까치박달 나뭇잎 노랗게 색깔이 진해진다. 8시 30분, 철다리 아래에서 물 한 잔 마시고 물통을 채운다.

9시경 북풍한설 몰아쳐 춥고, 손 시리고, 무릎이 아파서 보호대를 몇 번씩 손질한다. 정상까지 1킬로미터 남짓. 20분 더 올라 사스래·전나무지대에 닿는다. 길옆에서 바람을 피하며 달걀, 사과 한 입으로 숨을 고른다.

10시에 1,708미터, 봉우리가 푸르게 보인다는 설악산 대청봉(大靑峰)이다. 과거에는 제단을 만들어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표지석만 남아있다. 양양·인제·속초가 맞닿아 있는데 오색에서 거의 3시간 걸렸다. 한라산(1,950미터), 지리산(1,915미터)에 이은 세 번째 높은 산. 백두대간 중심지로 북쪽은 향로봉·금강산, 남쪽은 점봉산·오대산과 마주한다.

대청봉 남쪽에 한계령, 북쪽에 마등령·미시령 고개가 있다. 찬바람이 몰아쳐서 땅에 붙은 북방계 고산식물 눈잣·눈주목나무들이 무리지어 자란다.

이밖에 벚·개박달·신갈·굴참·떡갈·눈측백·소나무와 만병초·금강초롱 등 희귀식물, 사향노루·산양·곰·하늘다람쥐·여우·수달 등이 어울려 산다.

1970년 국립공원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1982년 유네스코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날씨가 좋았으면 푸른 동해를 볼 수 있을 것인데 아쉽지만 비바람과 안개에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다.

(다음 회에 계속)

글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주석>

1) 관세음보살이 머문다는 낙산에 있는 절. 원래 오봉산이었으나 문무왕 때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고 낙산(관음보살이 있는 곳)이라 했다. 6·25전쟁과 2005년 동해안 산불로 불탔으나 다시 지었다.

2) 청간정, 총석정, 삼일포, 낙산사, 경포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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