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설악산은 한가위 때부터 눈이 내려 하지 무렵 녹는다고 설산(雪山)·설뫼(雪嶽)·설봉산(雪峰山)·설화산(雪華山) 등으로 부르며 신성시했다.

속초·양양·인제·고성에 걸쳐 있으며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린다. 백두대간 한계령·공룡능선·미시령을 중심으로 서쪽 인제 지역을 내설악, 동쪽 속초를 외설악, 오색지구를 남설악이라 한다.

내설악은 완만한 내륙으로 땅이 두터워 숲이 무성하고 해양성 기후인 외설악은 경사가 급하지만 경관이 뛰어나 탐방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내설악에는 신라고찰 백담사, 지네가 줄을 갉아 먹는 것도 모르고 바위벽에 매달려 석이버섯을 따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목숨을 구한 대승청년의 전설을 간직한 대승폭포가 있다.

대승·와룡·유달·쌍폭포와 수렴동·가야동·구곡담 계곡, 동쪽의 외설악에는 울산바위·권금성·금강굴과 비룡·토왕성폭포·귀면암·와선대·비선대가 있는 천불동 계곡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내설악, 신라고찰 백담사와 기암괴석 천불동

신라시대 권·김 두 장수가 쌓았다는 권금성(權金城), 70년대 초 개통된 외설악 케이블카로 만추(晩秋)를 즐기던 설악파크의 추억은 잊지 못한다.

신흥사로 가는 길은 온통 노란단풍들이 축복처럼 내렸으니 그때도 이런 계절이었다. 안개바람에 추워서 정신없이 대청봉에 잠깐 섰다 내려간다. 손이 얼고 춥다. 10시 15분, 중청대피소에 사람들이 바람과 추위를 피하려 몰려 있다.

10시 20분 한계령 갈림길(한계령7.4·대청봉0.6·소청봉0.1km) 근처에는 분비나무들이 자란다. 귀때기청봉 쪽을 바라보니 정말 귀때기가 시리다. 분비나무는 구상나무보다 잎이 길고 빗살처럼 수평으로 펴져서 전나무 잎과 비슷하다.

암수 한 나무로 5월에 꽃 피고, 하늘 보며 9월에 열매가 익는다.

열매는 일시에 떨어져 장엄하게 일생을 마무리한다. 나무 모양이 아름다워 크리스마스 장식용으로 쓴다. 해발 1천 미터 넘는 설악산, 태백산, 지리산 등 높고 추운 곳에서 잘 자라는데 온난화로 위협받고 있다.

구상나무와 분비나무는 형제간으로 솔방울이 익어 벌어지는 하나하나 조각을 실편이라 하는데 끝에 뾰족한 돌기가 나오고 그 사이마다 씨앗이 들어 있다. 구상나무는 열매돌기가 처음부터 아래로 젖혀지지만 분비나무는 다 익어야 처진다.

소청대피소.
소청대피소.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산, 멀리 오른쪽 울산바위.
소청대피소에서 바라본 설악산, 멀리 오른쪽 울산바위.

10분 더 내려가 봉정암 갈림길(봉정암1.1·소청대피소0.4·대청봉1.2·중청대피소0.6·희운각대피소1.3km), 왼쪽으로 간다.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울산바위가 하얀 모습을 드러내고 구름이 몰려다니면서 산 아래 첩첩바위를 가렸다, 보였다 한다. 10시 40분 소청대피소에 닿으니 울산바위는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조물주가 강원도 땅에 금강산 1만2000 봉우리를 만들고자 천하명산들에게 명을 내렸다. 전국의 수많은 산들이 기회를 놓칠세라 모여들었는데, 둘레 4km 되는 거대한 울산바위도 고향을 떠나 금강산으로 가다 워낙 몸집이 커 다음날 금강산에 도착한다.

이미 1만2천봉이 정해져서 돌아가면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외설악 중턱에 눌러 앉고 말았다. 울산(蔚山)에서 와서 울산바위라 하지만 울타리처럼 생겼다는 이야기가 사실적이다.

울산바위 아래 펼쳐지는 운해의 장관

잠시 발아래 구름 걷히고 난간에 서서 한참 바라본다.

운해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풍경은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1)의 진수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울산바위 아래로 내려가면 세 조사가 의상·원효에게 계승한 계조암(繼祖庵), 앞에는 한 사람이나 열 사람이 밀어도 같이 흔들리는 흔들바위, 신흥사(神興寺)로 이어진다.

수년 전 여름에 왔던 신흥사 구간은 왼쪽으로 천불동계곡을 거쳐 신선이 누운 와선대(臥仙臺), 하늘로 날아간 비선대(飛仙臺), 원효대사가 있었던 금강굴 쪽으로 올랐다.

비선대서부터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는데 귀면암·음양·오련·천당폭포를 지나면 대청봉에 닿을 수 있다.

대피소 안에 잠깐 들러 밥 한 덩어리로 점심을 먹곤 11시 15분 출발한다. 20분 후에 봉정암(鳳頂庵)이다.

공양시간이라 사람들이 줄을 섰다. 미역국을 주는데 친구는 기다리자 하고 나는 그냥 가자고 재촉한다.

비는 추적추적 산사의 단풍잎을 떨구고 11시 50분에 진눈깨비가 내린다. 이 산에서 첫눈을 보다니 감동이 아닐 수 없다.

봉정암은 제일 높은 곳(1244m)에 있는 암자로 선덕여왕 때 지었다. 신흥사의 말사, 백담사 부속암자이며 불교 순례지로 유명하다. 어느 곳이나 그렇듯 이름 그대로 봉황의 산세다.

봉정암.
봉정암.
설악산 구곡담 계곡 단풍길.
설악산 구곡담 계곡 단풍길.

쌍용·용아폭포, 선녀탕이 있는 구곡담 계곡길 두고 정오 무렵 봉정암에서 오세암 가는 길, 빗물에 단풍은 흘러 다니고 산길 오르내리며 바위길 미끄러지고 쉬운 길이 아니다.

참회나무 깍지는 벌써 입을 다 열어젖혔다. 젖은 등산화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걸으니 한결 나은데, 배낭 속에 항상 넣어 다닌 덕분이다.

자리 대신 바닥에 깔개로 쓸 수 있고, 비 오는 날 젖은 옷이나 물건들은 신문지와 같이 말아두면 배낭 속의 물기도 없앨 수 있다.

하염없이 내리는 가을비가 좋다. 12시 30분, 귀신 나온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훠이!”

앞서 가던 일행이 길모퉁이 움푹 팬 고목나무 속에 숨어서 갑자기 나타나 놀라게 한다.

“자빠질 뻔했다.”

“아이고 바보야.”

이파리는 까치박달나무인데 이렇게 오래됐나?

200년 이상은 된 것 같다. 잠시 비는 긋고 바람도 덜하다. 층층·당단풍·신갈·복자기·피나무 숲을 지나 다시 빨간 단풍 비를 맞으며 걸어간다. 켜켜이 쌓인 나뭇잎, 온 산 가득한 숲의 향기는 신선의 나라에 온 듯……. 걱정 내려놓고 길을 걷는 이 순간이 최고의 행복이다.

(다음 회에 계속)

글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주석>

1) 속세에 물든 인간이 살지 않은 이상향(당나라 시인 이백의 산중문답 시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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