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앞에서 계속)

산중 연못에 비치는 하늘이 거울처럼 맑다.

빨강·노랑·파랑, 온갖 색깔 나뭇잎 둥둥 떠다닌다. 물속을 한참 바라보니 파란 하늘에 나무들 깊게 빠져 있다.

오후 1시, 단풍은 절정인데 비바람에 그만 다 떨어진다. 노린재·생강나무도 단풍 들고 깊은 산속에 있어서 그런지 엄나무 잎이 크다. 20여 분 지나 산마루 돌 위에 앉아 쉰다. 이렇게 붉을 수 있을까?

삐죽삐죽 기암괴석의 외설악에 비해 내설악은 운치 있고, 깊고 단풍도 내공이 있다. 설악산 단풍은 역시 최고다. 숲은 낮인데도 어둡다.

산중 연못에 비치는 하늘.
산중 연못에 비치는 하늘.

오세암에 남은 김시습, 한용운의 자취

선덕여왕 시절 암자를 짓고 관음암이라 했는데 인조 때부터 오세암(五歲庵)으로 고쳐 불렀다.

벌써 오후 2시. 고아가 된 조카를 절에서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겨울 준비로 스님은 길을 떠난다.

산중에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아이를 위해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 법당의 관세음보살이 어머니처럼 보살펴 줄 것이라며 떠났다.

양양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폭설이 쏟아져 하염없이 애태우다 이듬해 눈이 녹자 돌아올 수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는데 법당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아 다섯 살 동자가 살아났다고 해서 오세암으로 불렀다. 김시습, 한용운이 머물렀다.

오세암.
오세암과 단풍길.
단풍길.
오세암과 단풍길.

비는 더 많이 내리고 기와지붕 추녀 아래 빗물소리 더욱 세차다.

볼펜 잉크도 다 떨어져 더 기록할 수 없다. 사진기도 저장 공간이 없다. 이 산중에서 어쩌랴. 볼펜 한 개 얻으려 안내 창구로 가니 사탕과 손목에 차는 염주까지 준다. 사인펜밖에 없다는데 빗물에 번져 글자가 흘러내린다.

어떻게 아이가 굶어죽지 않았을까? 어머니를 보기 위해 동자는 순수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한 나머지 관음보살 따라 성불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하는데 봉정암에서 미역국 안 먹고 왔다고 아직도 투덜댄다.

“미역국 못 먹었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

“마음을 다하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

오세암 동자전(童子殿)에 합장을 하니 단풍에 섞여 붉은 비가 더 많이 내린다. 등산객 숙박시설인 보현·문수동이라 적힌 건물을 뒤로하고 2시경 비를 맞으며 백담사를 향해 걷는다. 여기서 마등령까지 1.4킬로미터 거리인데 까치박달·참회나무가 많다.

영시암,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 절

1시간가량 걸어서 현판의 글자체가 특이한 영시암(永矢庵)이다.

영원을 향해 날아간 화살이라 영원히 널리 베풀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선 숙종 무렵 당파싸움으로 조정에선 사람들이 죽고 세상이 어수선하자 유학자 김창흡이 시위를 떠난 화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를 새겨 영원히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살겠다며 지은 암자라 한다.

영시암.
영시암.

마루에 앉은 스님을 보니 영락없이 오래전 돌아가신 어른의 모습이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았다. 환생한 것일까?

영시암 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건너 산에는 연기처럼 안개가 피어오르고 텃밭의 푸성귀를 때리는 빗소리 세차게 들린다.

속세에 찌든 찌꺼기도 빗물 되어 씻기니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탐방객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아래쪽엔 취사장과 숙소까지 마련되어 있다.

더 머물고 싶지만 3시 10분경 일어서니 백담사까지 3.5km가량 남았다. 백담계곡 30여 분 더 내려가는데 숲은 붉은색 등불을 켰다.

갑자기 단풍이 환하다.

가래·쪽동백·생강·참회·산뽕·서어·엄·전나무들이 형형색색(形形色色)이지만 서로 화음을 맞추듯 잘 섞여서 곱다. 유네스코생물권보전지역탑에 도착하니 오후 4시다.

“목적지에 다 올수록 잘 걷네?”

“이를 악물고 간다.”

잠시 차 한 잔 마실 시간 지나 물이 맑고 돌과 바위가 어우러진 수렴동 계곡, 수렴(水簾)은 바위 속에서 밖으로 보면 내리는 물줄기가 대나무 발처럼 드리워졌으니 도를 닦기는 천혜의 조건이리라. 어떻게 이런 무협지 분위기 같은 이름을 붙였을까?

어디선가 협객들이 날아와 물살을 박차고 갈 것 같은데 대청봉에서 시작된 물길이 백 번째 못을 지나는 자리에 지었다는 백담사(百潭寺)에 닿는다.

진덕여왕 때 세워져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여기서 만들어졌고 대통령이 머물면서 유명해졌다.

다리 위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30분 후에 버스가 출발한대서 경내와 만해 기념관, 조선 불교 부흥의 상징 보우(普雨) 시비를 둘러보지만 벌써 1시간 지났다. 백담사에서 용대리 가는 차비 한 사람 2300원, 오후 5시에 겨우 버스를 타고 용대리로 간다.

사연 많은 백담사. 애환 서린 한계령

용대리는 대관령 일대와 황태(黃太) 덕장1)으로 유명하다. 원래 원산 앞바다에서 명태가 많이 잡혔는데 6·25전쟁 후 실향민들이 황태를 시작하면서 생겼다.

황태는 살이 노란 명태로 노랑태라고도 부른다. 덕장에서 바로 얼어야 부드럽고 맛이 좋은데, 설악산 계곡 바람이 불어 천혜의 조건이다.

동해안에서 온 명태들이 영하 10도 아래서 정초부터 3개월 정도 얼고 녹으며 황태가 된다. 해독, 노폐물 제거에 좋아 7~80년대 연탄가스 중독에 특효약처럼,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으로 많이 끓여 먹었다.

용대리(龍垈里)는 용의 터, 황태머리가 용처럼 생겼으니 조상들은 땅 이름 하나도 예사로 짓지 않았다.

“용대리에서 지금은 황태리가 됐어.”

“이런 날 연탄불에 황태를 구워 한 잔 들이키면 좋겠다.”

“또 술타령.”

덜컹덜컹 비포장 도로 따라 20여 분 달려 도착하니 세찬 빗줄기가 반겨 준다.

백담사와 계곡을 흐르는 물길.
백담사와 계곡을 흐르는 물길.
백담사와 계곡을 흐르는 물길.
백담사와 계곡을 흐르는 물길.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늘어선 가게마다 하나둘 불이 켜진다.

오색 가는 승용차나 택시를 타려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며 서로 흥정을 하는데, 우리도 2만 원에 동승을 했다. 5시 30분, 아침에 차를 두고 온 오색으로 출발한다.

어두운 길을 달리는데 서울·인제 쪽 교차로 부근에는 차가 많이 밀린다. 발굽의 지명이라서 차가 몰려든 것 아닌가?

인제(麟蹄)는 전설의 동물 기린(麒麟)의 발굽 모양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슴이 백년 묵으면 기린이 되므로 나도 백년까지 살면 산신령이 될 것이라 하니 웃는다.

얼추 50대 중반쯤 돼보였다.

운전대를 잡고 달리면서 시간만 나면 이곳에 온다고 설악산 예찬을 한다. 백담사 사찰체험(템플스테이) 왔는데 1인당 1박3식, 5만원이면 4인 가족 독방도 가능하다고 일러준다.

옆에 앉은 부인은 맞장구치듯 주변 맛집까지 알려주며 양양의 단양면옥이나, 강릉 사천 물 횟집이 좋다고 한다. 초면에 이렇게 차편도 해결하고 식당까지 소개받았으니 나는 사람 복이 많다. 그래서 돈을 남기는 것은 하수요, 업적을 남기는 것이 중수, 사람을 남기는 것이 고수2)라 하였다.

한계령(寒溪嶺) 고갯마루 구불구불 돌아간다. 한계령(1004m)은 인제와 양양 경계 고개 마루로 영동·영서의 분수령이다. 옛날에 오색령이라 했다.

대청봉과 남쪽 점봉산을 잇는 능선으로 산마루가 움푹 들어간 말안장 안부(鞍部)다. 도둑이 많아 고개를 넘지 말라고 길목에 금표를 새겼는데 양양 쪽 한계령 길에 금표교가 있다.

1968년 군부대가 인제 북면 한계리에서 공사를 시작하며 지금의 한계령으로 불렸다. 80년대 대중가요 한계령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산업화 시대, 숨 가쁘게 달려온 사람들의 힘들었던 삶을 잘 나타낸 시적인 노래라고 생각한다. 가끔 산에 올라 대금으로 이 노래를 불면 분위기는 일품이다. 한계령을 지나고 저녁 6시 20분 오색에 도착하니 어둡고 춥다.

“체력도 한계다.”

차 안의 난방 버튼을 눌렀지만 예열이 안 돼 찬바람이 나온다.

1시간가량 달려 강릉 사천 바닷가 물 횟집이다. 문 닫을 시간인데도 생선회, 동해안 특유의 꽁치젓갈, 미역국에 국수까지 내어준다. 여기는 횟감이 떨어지면 일찍 문을 닫는다.

“드디어 미역국을 먹게 되는군.”

“봉정암에서 미역국 못 먹었다고 투덜거리더니 소원성취 했네.”

대답 대신 슬그머니 국수를 말아 건넨다. 배도 고팠지만 주인은 친절하고 음식도 정갈했다. 다시 오고 싶은 곳.

8시에 영동고속도로 횡계 나들목까지 갔다가 차 밀려서 다시 동해안 7번 국도를 타고 내려왔다. 밤 11시경 죽변 별서(別墅)3)에 도착해서 잠을 잔다.

<탐방길>

● 정상까지 5킬로미터, 3시간 정도

※ 전체 11시간 20분(오색 → 대청봉 → 봉정암 → 오세암 → 백담사 → 용대리 → 오색)

오색 → (45분)해발710 지점 → (15분)화장실 → (30분)철다리(물 있음) → (1시간 30분)대청봉 → (20분)한계령 갈림길 → (20분)소청대피소 → (55분*점심 35분 포함)봉정암 → (2시간 25분)오세암 → (1시간)영시암 → (1시간)유네스코 기념탑 → (10분)백담사 → (1시간 20분 *백담사에서 버스 기다리던 1시간 포함)용대리 → (50분)오색

* 빗길 보통으로 걸은 시간(기상·인원수·현지여건 등에 따라 다름).

<주석>

1) 물고기 따위를 말리려 덕(막대기를 나뭇가지에 얹은 시렁)을 매어 놓은 곳.

2)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일본 식민정치가 1857~1929).

3) 농장이나 들 근처에 한적하게 지은 집.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지음.

글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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