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완연한 가을 오후의 햇살은 살갑다.

아산 외암마을은 그래도 때가 덜 묻었다.

매표소에는 지루하지 않을 만큼 줄을 섰는데 설화산 등산로 입구를 물으니 입장권 사지 말고 다리 건너 오른쪽으로 들어가라고 한다.

표 값 2000원을 면제해 준 충청도 인심처럼 논둑길 너머 한 눈에 들어오는 설화산은 정겹게 서 있다.

설화산, 인물이 많이 나 문필봉으로 불려

노랗게 익은 가을 논에는 탈곡기 한대가 들녘을 굽어보고 고샅을 걸어가니 장대로 감 따는 아이들, 돌담에 빨간 잎을 늘인 담쟁이도 계절의 주인이다.

산 아래 낮은 들판으로 갈대와 국화, 빨갛게 익은 감이 돌담과 어우러져 한 폭의 정다운 고향마을 그린 듯하다. 10월 3일 가을 햇살은 역시 시골길이 좋다.

탈곡기 너머 설화산.
탈곡기 너머 설화산.

오후 3시 외암골(설화산정상2·외암마을0.9km). 외암마을은 설화산 남서쪽에 기와·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이루어진 아산의 민속마을이다.

10여 분 걸어 정자를 지나고 이곳의 집들은 대체로 규모가 작은 편이다. 산이 편안한데 굳이 살림집이 클 필요가 있겠는가? 오히려 크게 지었다면 주변 풍광과 잘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외암 저수지를 끼고 돌아 갈림길(설화산 정상1.4·오방리0.3km)에서 왼쪽으로 정상을 향해 오른다. 오른쪽으로 가면 오방리다.

캠핑장 지나고 복자기·싸리·신갈·개옻·붉나무……. 단풍잎이 빨갛다. 오후 3시 반에 막걸리병과 양초, 술잔……. 치성 올린 흔적을 보니 발복의 명당이란 말이 실감난다.

이산은 남서쪽으로 무덤이 많다. 배초향, 맥문동이 언뜻언뜻 나타나고 곧이어 능선 갈림길(맹씨행단1.5·초원아파트1.5·광덕산8.5·망경산6.8·외암저수지1.2·설화산0.2km)이다.

일반적인 산행은 외암마을, 중리, 윗산막골 등에서 오를 수 있는 다양한 구간이 있다.

봄까지 눈이 덮인다고 설화산인데 눈 대신 바위만 있다. 정상은 문필봉(文筆峰)으로 불리어 인물이 많이 난다고 알려졌다. 정상을 등지고 북쪽 산 아래 중리에 맹사성 고택이 있는데 그의 어머니는 설화산이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한다.

남서쪽 외암리 앞으로 냇물이 흘러 일곱 명의 정승과 여덟 장군을 일컫는 칠승팔장(七丞八將)이 나올 배산임수(背山臨水) 명산이라 전한다. 냇물을 일부러 마을로 끌어 다시 흘려보내 설화산 화기를 누르려 한 흔적이 역력한데 군데군데 작은 연못이 있다.

오후 3시 45분 해발 441미터 설화산 정상(오봉암1·외양2리(데이콤)1.5·외암저수지1.4·맹씨행단(중리)1.7·초원아파트1.8·광덕산8.7km). 멀리 서쪽 으스름 햇살 아래 노란 들녘이 고즈넉하다.

정상 바위에 태극기 날리고 산 아래 외암마을, 광덕산 능선은 눈앞에 있다. 망경·태화·배방·영인·가야산과 아산만 삽교천 방조제가 흐릿하고 아산·천안시가지가 다가온다. 바위에 잠시 앉아서 물 한 모금 마시니 가슴이 후련하다.

차례로 설화산 오르는 길.
차례로 설화산 오르는 길.
설화산 정상.
설화산 정상.
설화산 아래 펼쳐진 아산 시가지.
설화산 아래 펼쳐진 아산 시가지.

우리는 오봉암 쪽으로 내려선다.

바위와 소나무길이 어우러진 동사면 바윗길. 마치 새의 날개 위를 걷는 듯 하다. 고불고불 억지로 자라는 소나무와 노간주·생강·떡갈나무를 만나는 오후 4시, 고개 숙이며 나무 아래로 지나간다.

산꼭대기는 바위산(骨山), 중턱아래는 흙산(肉山)이다. 똘복숭아 나무를 보며 곧이어 갈림길(윗산막골1.2·설화산0.2km). 개산초·생강·상수리·아까시·비목나무를 뒤로하고 함양박씨묘 지나 10분 내려서니 가을 들녘 볏짚 냄새가 걸음 멈추게 한다.

산 아래 고즈넉이 자리답은 외암마을

빨갛게 핀 여뀌 꽃이 검푸른 들풀과 어울려 환상적인 색깔을 만들어 놓았다.

바람에 나풀나풀 무당 옷처럼 생긴 것이 이렇게 예쁠 수 있을까? 작은 꽃이 줄줄이 엮여서 여뀌, 붉은 꽃의 매운맛이 귀신을 어지럽게 하거나 쫓는다는 역귀(逆鬼)에서 여뀌가 됐다.

잎과 줄기에 매운 맛이 있어 일본에서는 생선요리에, 물에 찧어 놓으면 물고기가 천천히 움직여 잡을 수 있다고 한다. 피를 멈추게 하므로 자궁·치질출혈 등에, 항균작용과 혈압을 내리는 데도 효과가 있다.

여뀌를 더욱 붉게 물들인 서산에 걸린 해, 갈대의 하얀 깃털은 햇살에 살랑거리며 들판을 간지럽힌다. 오후 4시 35분쯤 다시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민속마을에 닿는다. 돌담길 따라 가을볕에 둥근 박이 일품.

정미소에는 쌀을 빻는데 보여주기 위함인지 실제 운영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정겹다. 은행나무 알맹이도 오지게 떨어져 돌담위에 소복이 쌓였다. 그 너머로 단풍잎 걸린 초가집과 곶감 아래 항아리, 가을빛에 그림 그린 듯, 소품을 놓은 듯하다.

차례로 가을 들녘, 오지게 떨어진 은행, 멀리 설화산 아래 외암마을
차례로 가을 들녘, 오지게 떨어진 은행.
차례로 가을 들녘, 오지게 떨어진 은행, 멀리 설화산 아래 외암마을.
멀리 설화산 아래 외암마을.

이곳은 충청도 반가(班家 양반집)의 살림집을 잘 간직하고 있다.

양반집에 소작을 하며 초가집이 붙어살았는지 기와집들과 조화를 이뤘는지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예안 이씨 집성촌으로 실제 수십 세대가 살고 있다.

조선 숙종 때 이간1)이 이곳에서 태어나 설화산 봉우리를 따서 호를 외암(巍巖)이라 했는데, 나중에 외암(外岩)마을이라 불렀다.

다리 건너오는데 개천 아래 바위에 새겨놓은 외암동천(外岩洞天), 동화수석(東華水石) 글자를 보며 지나친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살 만한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도가(道家)의 별유동천(別有洞天)이 아니던가?

천상의 고을, 물과 바위에 흘러드는 국화꽃잎……. 외암마을 주변 도로마다 가을빛 쐬러 나온 차들이 많이 밀리는데 길옆으로 보이는 설화산은 날아가는 새의 뒷모습을 닮았다. 통신 안테나 위로 날아오르는 형국이다.

(다음 회에 계속)

글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주석>

1) 이간(李柬) : 1677(숙종)~1727년(영조) 회덕현감·경연관 등을 지낸 문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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