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퀘스트=김재준 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성주산을 찾아 아침 9시경 대전에서 출발했으니 1시간 30분정도 걸렸다.

부여·백제휴게소에 잠시 들른 것 말고는 서부여 나들목으로 바로 나왔다. 사방의 산들은 아침 안개를 뒤집어쓰고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다.

잘 드러내지 않지만 속 깊은 충청도. 부여군 외산면 아미산 마을이 고즈넉해서 잠시 차를 세우고 사진 한 장 찍는다.

아늑한 산마을 도로에 차도 잘 다니지 않는 10시 30분, 보령 성주면사무소 근처에 성주사 터(聖住寺址). 성주산으로 들어가기 전 들판에 폐사지가 있는데 동서 200·남북으로 100m쯤 되는 큰 규모다.

1월 10일 겨울날은 흐릴 뿐 견딜만한 날씨다.

백제 병사의 원혼을 달래려 지은 절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백제 선종사찰인 성주사는 598년 세워진 오합사(烏合寺)가 전신인데 고구려 전쟁에서 죽은 원혼들을 달래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660년 백제 멸망 후 호국 사찰로 이름값을 한 것이다. 후에 통일신라 태종무열왕의 차남인 김인문의 원찰(願刹)1)이 되었고, 그 후손들이 강릉의 호족이었는데 무염(無染)이 있었다.

20대에 당나라 유학을 하고 돌아와 불탄 오합사를 새로 지어 40년간 선문을 일으키니 사람들은 성인으로 받들었다.

이 무렵부터 성주사로 불렸고, 수많은 문하생으로 쌀뜨물이 성주천을 따라 길게 흘러 큰 절이었다고 알려졌다.

성주사 터, 탑비·석불·석등·석탑·받침돌이 보인다.
성주사 터, 탑비·석불·석등·석탑·받침돌이 보인다.
성주사 터, 탑비·석불·석등·석탑·받침돌이 보인다.
성주사 터, 탑비·석불·석등·석탑·받침돌이 보인다.

성주사지 한쪽에 낭혜화상(朗慧和尙) 무염의 검은 탑비(塔碑)가 있다.

승려의 유골을 부도에 안치하는데 부도는 승탑(僧塔)이라 하고, 탑비는 부도와 함께 조성되는 승려의 일생을 적은 비석이다. 무염의 생애와 산문개창 과정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고 행적은 최치원이 지었다 한다.

초기 통일신라는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의 화엄종이 왕권과 밀착돼 있었지만 하대에는 선종이 유행한다. 어려운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참선을 통해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不立文字 見性成佛)는 것이다.

당나라 말기 선종의 영향도 컸지만 지방 호족이나 농민들이 등장하면서 통일된 사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달마를 잇는 선문이 서라벌이 아닌 지방의 각지에 들어선 것.

도의가 개창한 가지산문(장흥 보림사), 홍척의 실상산문(남원 실상사), 혜철의 동리산문(곡성 태안사), 현욱의 봉림산문(창원 봉림사), 도윤의 사자산문(영월 흥녕사), 범일의 사굴산문(강릉 굴산사), 도헌의 희양산문(문경 봉암사), 이엄의 수미산문(해주 광조사), 무염의 성주산문(보령 성주사)이 구산이다.

이 지역에서 나오는 검은 돌을 남포오석이라 불리는데 신라 때부터 고급비석과 벼루용으로 유명했다.

중국에서도 최고로 쳤다. 검은 돌에 글자를 새기면 (刻字) 파여진 속이 하예서 조선시대 왕릉의 비석과 최근에는 대통령묘비로 썼다.

성주사지 무염의 탑비도 남포오석이다. 진성여왕 이래 천 년이 흘렀어도 매끄럽고 글씨가 뚜렷해서 금방 만든 것으로 착각할 만큼 질이 좋다. 보령이 남포현이었으니 지금은 보령오석이다. 오합사의 이름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백운사 스님은 길손 위해 목탁소리 들려주고

11시경 먹방 삼거리 오른쪽으로 걸어간다. 이름이 재밌다.

“먹방이 뭐지?”

“먹는 방송.”

굽이굽이 검은 바위 개울 따라 가는데 포장길은 얼어버려 신발이 미끄럽다. 심연동 가는 길, 간이 버스정류장에 닿으니 백운사 입구 장군봉 이정표가 나오고 왼쪽으로 오른다. 바로가면 성주산 자연휴양림이다.

먹방 삼거리.
먹방 삼거리.
먹방 삼거리.
먹방 삼거리.

백운사(白雲寺), 흰구름 속의 절이라 인적 없는 조그만 암자라고 해야 맞겠지.

무염당(無染堂) 왼쪽으로 등산길 따라 오르는데 잔설이 소나무에 쌓여 있다. 정상까지 2.2킬로미터. 흐린 날씨에 몸은 으스스, 해는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건너 산에 눈바람 날린다. 인기척이 없다 싶더니 나그네 온 지 어떻게 알았는지 목탁소리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들 위한 목탁소린데 어떻게 합장 아니 할 것인가? 소나무 장작을 패려고 켜놨는지 송진 냄새가 좋다.

산을 오르면서 “채굴탄광 지반침하 조심” 안내판은 탄광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상수리나무 가지에 겨울바람이 세차게 인다.

어느덧 정오 무렵, 능선 북쪽에서 바람 불어오고 눈이 쌓여 있는데, 이정표가 없어 왼쪽으로 갔다 다시 오른쪽으로 오른다. 지금부터 햇살 눈부시는 능선길 산행이다.

백운사와 성주산 소나무
백운사.
백운사와 성주산 소나무
성주산 소나무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모자는 굴참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임도 접경지역으로 들어서자 소나무재선충병 방제작업 흔적이 보인다.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듯 재선충은 솔수염하늘소와 공모해 여기까지 침략했구나. 소나무, 굴참나무가 엉켜진 바윗길로 오르는데 자갈 섞인 바위 덩어리들이 퍼석퍼석하다.

“누가 산에 콘크리트를 쏟아 부었나?”

“…….”

“진안 마이산 가봤잖아.”

“역암.”

“이 근처에 기름 나올지도 몰라.”

역암(礫岩), 자갈들로 뭉쳐져 생긴 것이다. 퇴적암층에 흔히 나타나는데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장하는 저류암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음 회에 계속)

글 김재준(시인·전 경북산림환경연구원장)

<주석>

1) 죽은 이의 명복이나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절. 주로 왕족들이 지었다. 감은사가 대표다. 원당(願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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