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신作, '권기수 초상', 1919년, 비단에 채색, 83.5cm×62.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채용신作, '권기수 초상', 1919년, 비단에 채색, 83.5cm×62.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이 그림은 1919년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이 그린 권기수(權沂洙)의 63세 때 초상화다.

초상화 오른쪽 상단에 “정삼품통정대부 중추원의관 송계 권기수 육십삼세상(正三品通政大夫 中樞院議官 松溪 權沂洙 六十三歲像)”이라 적혀 있고, 왼쪽 상부에는 을미년(1919년)에 채용신이 그렸다는 글귀가 적혀있다.

초상화의 주인공인 권기수는 화려한 문양이 있는 옥색 전복 위로 딸기술이 달린 붉은색 세조대를 매고, 복숭아 모양의 홍색 단추를 달고 있는데, 이로 보아 그가 옷치장에 신경을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

권기수는 고종 때 대원군이 주도한 사회 개혁에 따라 양태가 작아진 갓을 쓰고 있지만, 갓끈은 옥으로 만들어 매우 화려하다.

양손은 소매 밖으로 내놓고 부채와 안경을 쥐고 있는데, 부채도 매듭에 금니를 칠한 붉은 술에 밀화장식을 매단 것이고, 안경테 역시 대모로 만들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의 신분은 문인이지만, 주인공 권기수의 모습은 선비보다는 만석꾼의 행색에 가깝게 보인다.

1918년 채용신이 그린 다른 초상화인 <곽동원 초상>과 비교해보면, 복식이나 들고 있는 장신구가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는데, 곽동원은 당시 만경일대의 대 지주였다.

채용신作, '곽동원 초상', 1918년, 비단에 먹과 옅은 채색, 99.5cm×54cm, 개인 소장.
채용신作, '곽동원 초상', 1918년, 비단에 먹과 옅은 채색, 99.5cm×54cm, 개인 소장.

권기수의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채용신이 주로 사용했던 독특한 선의 사용과 음영처리 때문에 주인공 얼굴표정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얼굴의 윤곽선과 이목구비는 짙은 색 선으로 그리고, 얼굴의 볼록한 곳은 밝게, 움푹 들어간 곳은 잔 붓질을 이용하여 상대적으로 어둡게 처리하여 입체감을 살렸다.

눈동자의 수정체는 옅은 회색으로, 동공은 검은색으로 칠했고, 흰자위 부분에 붉은색을 칠해 생생한 눈빛을 표현하였다.

수염은 얼굴색을 칠하고 그 위에 흰색과 검은색의 안료를 사용하여 그렸으며, 꽉 다문 입술은 윤곽선을 짙게 그린 후 안쪽으로 붉은 색을 옅게 칠했다.

입고 있는 흰색 두루마기는 윤곽선을 그리고 선 주변으로 음영을 표시하여 옷 주름의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바닥의 화문석은 무늬를 세밀하게 묘사하였고, 배경은 어둡게 채색하여 깊이 있는 공간을 표현하였다.

이 초상화를 그린 채용신은 무관 출신으로 고종의 어진 제작과 선대왕들의 어진 이모에 참여하며 어진화사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는 전문적인 직업 화가로 활동했던 우리나라 근대 초상화가의 선구자였다.

문헌 기록이나 남아있는 작품들로 추산해 볼 때, 채용신은 누구보다 많은 초상화를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 시대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사진술이나 서양화법 등 신문물의 수용에도 적극적인 면을 보여, 근대 초상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또한 채용신은 초상화 제작과 유통 측면에서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06년 관직을 떠나 낙향한 채용신은 전라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직업 화가의 길을 걸었는데, 1920년대에 전문 공방인 채석강도화소를 세우고 가족과 함께 운영하면서, 상업적인 초상화의 주문 제작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가 만들고 사용했던 초상화 주문 제작 방식에 대해서는 변종필의 경희대 대학원 박사논문인 「채용신의 초상화 연구」(경희대 대학원 박사논문, 2012)에서 자세히 알 수 있다.

변종필은 1940년경에 배포한 채석강도화소의 광고지 ‘초상주문안(肖像注文案)’ 등의 분석을 통해 이러한 내용을 상세히 밝혀냈다.(이하는 위 논문의 해당 내용을 요약 정리함.)

이 광고지에는 채석강도화소의 위치와 어진 화가였던 채용신의 화려한 경력 및 초상화 주문 제작 시 지불해야 하는 요금의 유형과 내용이 상세히 나열되어 있다.

이를테면 남조복제(男朝服製) 입상·여화관(女花冠) 입상·남학창의(男鶴昌衣) 입상·남양복(男洋服) 입상·여양복(女洋服) 입상은 100원이며, 남전복(男典服) 입상은 90원, 남평상복(男平常服) 입상 및 여평상복(女平常服) 입상은 각90원, 남양복 반신상 및 여양복 반신상은 각 80원으로 초상화 제작비용을 명시하였다.

주문안 뒷면에는 초상화 제작 방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거기에는 채용신이 나이가 구순이 되어 안력은 여전히 좋으나, 기력이 떨어져 초상화를 그리기 위한 여행이 어려우니, 사진을 통해 초상화를 그린다는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그 중 중요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사진이 있으면 본인(채용신)의 비(費)로 송부하되 그 의양(衣樣), 입좌상, 소착관물(所着冠物)을 명기하십시오.

- 사진을 갖고 있지 못할 때에는 본인이 사진사를 보내어 찍어 오겠습니다.

- 사진으로 초상을 회화한다고 한 즉 그 실형과 다를까 의심하실지 모르나, 오류의 염려는 전혀 하실 필요가 없으며, 혹시 실형과 닮지 않을 적에는 그 책임을 본인이 지겠습니다.

주문안 내용을 살펴보면 초상화의 종류에 따라 세분화된 요금제를 채택하고 있고, 사진을 기본으로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사진이 없으면 사진사를 보내 사진을 찍어 오겠다고 한 항목이다.

이것은 사진관을 운영한 적이 있던 아들과 며느리의 전문성을 살린 부분으로 보인다. 이렇게 채용신은 적극적으로 사진을 활용해서 초상화를 제작했지만, 초상 사진과는 다른 초상화의 특징과 장점을 모두 화폭에 담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사진의 사실성과 화가의 개성을 모두 살린 초상화 구현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참고문헌】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후기의 초상화(이태호, 마로니에북스, 2016)

채용신의 초상화 연구(변종필, 경희대 대학원 박사논문, 2012)

한국의 초상화, 형과 영의 예술(조선미, 돌베개,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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