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마시고 발을 씻으며 근심을 털어내다

심사정作 '탁족시명도', 18세기, 지본담채, 24.0X61.5cm, 간송미술관.
심사정作 '탁족시명도', 18세기, 지본담채, 24.0X61.5cm, 간송미술관.

【뉴스퀘스트=함은혜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조선 후기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이 그린 선면화 <탁족시명도(濯足試茗圖)>는 홀로 탁족(濯足)하는 고사와 그 옆에서 차를 달이는 다동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중심주제인 ‘탁족’은 관폭(觀瀑), 조어(釣魚), 어부(漁夫), 기려(騎驢) 등의 주제와 함께 특히 조선 중기 소경산수인물화에서 주로 볼 수 있다.

탁족도는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고사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 장면에 내포된 ‘은일’의 의미로 인해 문인들이 애호하였다.

조선 초기의 문인 이승소(李承召, 1422-1484)의 문집에 탁족도에 부친 제화시가 있다.

“푸른 대나무 푸른 소나무에 초가 한 채

백년의 심사를 창랑에 기탁하려네.

한가롭게 와서 이끼 낀 바위에서 발을 씻으며

고개 돌려 보니 풍진 세상 저 멀리 아득하구나.”

‘푸른 대나무 푸른 소나무에 초가 한 채’라는 첫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대나무와 소나무는 은일 장소로써의 청정한 자연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발을 씻으며 고개 돌려 보니 풍진 세상 저 멀리 아득하구나’라는 구절을 보면, 탁족을 통해 속세에서 벗어나 은일하고자 했던 뜻을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탁족은 단순히 흐르는 물에 발을 씻거나 담그는 행위가 아니라 “탁영탁족(濯纓濯足)”의 의미를 나타내고자 했다.

창랑의 물이 맑거든 그 물로 나의 갓끈을 씻는 것이 좋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거기에 나의 발을 씻는 것이 좋으리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이 구절은 굴원(屈原)의 어부사(漁夫辭)에서 시작된 <유자가(儒子歌)> 혹은 <창랑가(滄浪歌)>라고 불리는 노래이다.

『맹자(孟子)』「이루장구(離婁章句)」상(上)에서는 이 노래를 인용하면서 “얘들아 저 노래 소리를 들어 보아라. 맑으면 갓끈을 담그고 흐리면 발을 담그는 것이니 스스로 그런 것을 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흐린 물에 발을 담그고 맑은 물에 갓끈을 담그게 되는 것이 그 자체의 청탁(淸濁)에 따른 것으로 모든 잘못의 원인을 그 자체 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모든 일은 자기 처신하기에 달렸으므로 각자의 수신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탁영탁족”의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어부가 굴원에게 권하는 “탁영탁족”의 의미는 시대의 정세에 따라서 처세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창랑의 물이 맑다는 것은 도가 행해지는 좋은 세상을 뜻하는 것이고, 갓끈을 씻는다는 것은 의관을 갖추어 조정에 나아간다는 뜻이다.

창랑의 물이 흐리다는 것은 도가 없는 혼란한 세상을 뜻하며, 발을 씻는다는 것은 속세에서 벗어나 산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어부사」에서의 탁족은 속세를 떠난 은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탁족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선비들의 실제 생활에서 행해지기도 했지만, 회화 작품에서는 주로 ‘난세(亂世)를 피하기 위해’ 탈속한 고사들임과 동시에 그들의 은일과 수신의 의미로 그려진 것이 많다.

심사정作 '탁족시명도' 다동부분 확대.
심사정作 '탁족시명도' 다동부분 확대.

이 <탁족시명도> 역시 그 중 하나로써, 화면 우측에 앙상한 두 그루의 나무 아래에 갓을 쓴 한 고사가 물가에 앉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고사는 차를 달이고 있는 다동 쪽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는데, 이를 가만히 살펴보면, 앞서 언급한 조선 초기의 문인인 이승소의 탁족도 제화시가 떠오른다.

<탁족시명도>에는 한 고사의 고개를 돌린 시선 끝에 차를 준비하는 다동의 모습이 있다. 이 다동은 탁족하는 고사 옆에 앉아 다완을 준비해두고, 풍로에 불을 지피며 고사와 눈을 마주치고 있다.

혼란한 세상을 피해 유유자적하는 고사와 내면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정신음료인 차와의 결합은 탁족이 가진 의미인 탈속과 은일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므로 <탁족시명도>에 당시의 보편적인 주제였던 탁족과 ‘차를 준비하는 다동’이 함께 등장한다는 점을 통해 탁족의 의미를 돋보이게 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현존하는 탁족도로는 조선 중기 이경윤의 전칭작인 《산수인물화첩》의 <고사탁족도>와 <고사탁족도>가 있는데, 이 두 작품 모두 차를 준비하는 장면이 없다. 그런데 16세기에 탁족하는 고사와 함께 차를 달이는 장면이 그려졌던 것을 알 수 있는 제화시가 있다.

창랑에서 발을 씻노라니

강가의 더운 여름이 시원하구나.

시동이 먼저 사정을 헤아리고

뒤에 앉아 차를 끓이네.

濯足俯滄浪, 江干朱夏凉, 侍兒先解事, 背坐具茶湯.

위의 내용은 조선 중기 문인인 황혁(黃赫, 1551~1612)의 글로, 8폭 병풍을 감상한 후 지은 제화시 중 제4폭에 관한 내용이다. 1폭부터 8폭까지의 그림의 구성이 은거와 관련한 고사(故事)의 전형적 병풍으로 보인다.

위의 4폭의 제화시 내용 중 ‘시동이 먼저 사정을 헤아리고(侍兒先解事)’라는 부분은 다동이 복잡한 주인공의 심리상태를 알아차리고, 이를 해소시켜 주고자 ‘뒤에 앉아 차를 끓인(背坐具茶湯)’ 것으로 해석된다.

함은혜 연구원
함은혜 연구원

그의 제화시는 조선 중기의 은일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그림들 속에 차를 마시고 준비하는 장면이 함께 그려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18세기 전반 심사정의 선면화 <탁족시명도>에까지 그 보편성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무더운 여름에 계곡으로 피서하는 지금의 우리들도 사실은 휴가를 명분으로 지치고 복잡한 세상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현대판 탁족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원한 계곡에서 발을 담그며 차 한 잔 즐기는 탁족을 통해 진정한 여유를 만끽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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