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초 아래 문인과 다동
【뉴스퀘스트=최혜인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파초 잎에 무언가를 쓰는 고사(高士)와 그 옆에서 먹을 준비하는 동자. 시상(詩想)이 떠오른 듯 급히 뒤에 있는 파초 잎 하나를 따다가 써내려 간다.
배경을 간소하게 한 것은 고사의 행위를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두 인물 뒤로는 거대한 암석과 책상이 있는데, 서책들과 주병(酒甁)이 놓여있고, 옆에는 풍로 위에 찻물이 끓고 있는 탕관이 있다.
차향이 가득 퍼진 은거지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이재관(李在寬, 1783~1849)의 〈파초제시도(芭蕉題詩圖)〉이다. 그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지 못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화원(畵員)이 되었고 벼슬도 지낸 인물이다.
오래 전부터 파초 잎, 단풍 잎, 오동 잎 등 식물의 잎에 시를 쓰는 엽상제시(葉上題詩)는 운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중에서 파초는 잎이 크고 아름답다고 여겨져서 예부터 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원림을 가꿀 때 자주 선택되어졌다.
조선 초기 문신인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 쓴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은 꽃과 나무들의 종류와 재배방법, 활용방법 뿐만 아니라 9품으로 나누어 평하고, 그 의미, 상징성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파초는 초왕(草王)·녹천암(綠天菴) 등 이라 칭하며 그 고귀한 모습에 2품으로 올렸다.
당나라 유명한 시인 위응물(韋應物, 737~804)은 “… 종일 서재에서 할 일도 없어서 파초 잎 위에 홀로 시를 적네.(… 盡日高齋無一事 芭蕉葉上獨題詩)”라며 파초 잎에 시를 짓는 한가로운 생활을 읊었다.
이재관의 그림들 가운데 파초를 제재로 사용한 작품들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파초하선인도(芭焦下仙人圖)〉도 파초가 등장하는 그림이다.
〈파초제시도〉와 달리 세로가 긴 작품이지만, 파초 잎 위에 글을 쓰는 고사와 먹을 가는 동자, 그 주변으로 커다란 암석과 파초, 여러 기물들이 올라간 탁자를 구성한 모습은 두 작품 모두 유사하다.
그러나 〈파초제시도〉에만 차를 준비하는 도구인 탕관과 풍로가 등장한다. 찻물을 끓이는 탕관과 풍로는 한가로운 일상에 운치를 더해주는 소재로 그려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 문인 이덕무의「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라는 글을 살펴보도록 하자.
… 오른편에는 일제히 꽃봉오리를 터뜨린 매화가 보이고, 왼편에는 차 끓는 소리가 들리는데, 송풍회우가 일어난다. … 4~5월경, 동산에 숲이 우거지고 과일이 열리기 시작하고 새들이 지저귀면 부드럽고 푸른 파초 잎새를 따서 미원장(米元章) 의 《아집도서첩(雅集圖序帖)》을 모방, 왕마힐(王摩詰)의 「망천절구(輞川絶句)」 옆 줄에 써놓으면 글 배우는 동자가 가지고 싶어 할 것이다. …
선귤당(蟬橘堂)은 이덕무의 호이자, 그가 거처한 곳이다.
그곳에 있으면서 찻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매화를 감상하고, 아름답게 자란 파초 잎에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를 적으며 여유로움과 자신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일상이다.
그 모습은 마치 〈파초제시도〉와 같아 보인다. 우리는 그림과 글을 통해서 조선 후기 문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삶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한편 이 그림에서 다동의 행동은 다른 차 그림에서와 달리 풍로 앞에 앉아 있지 않고 고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찻물을 끓이면서 먹을 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일 다동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참고문헌]
한국고전종합DB
黃鳳池 輯, 기태완 譯, 『唐詩畫譜』, 보고사, 2015
이인숙, 「파초의 문화적 의미망들」,『大東漢文學』제32호, 대동한문학회,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