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초 아래 문인과 다동

이재관作 '파초하선인도', 지본담채, 139.4x66.7cm, 국립중앙박물관.
이재관作 '파초하선인도', 지본담채, 139.4x66.7cm, 국립중앙박물관.

【뉴스퀘스트=최혜인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연구원】 파초 잎에 무언가를 쓰는 고사(高士)와 그 옆에서 먹을 준비하는 동자. 시상(詩想)이 떠오른 듯 급히 뒤에 있는 파초 잎 하나를 따다가 써내려 간다.

배경을 간소하게 한 것은 고사의 행위를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두 인물 뒤로는 거대한 암석과 책상이 있는데, 서책들과 주병(酒甁)이 놓여있고, 옆에는 풍로 위에 찻물이 끓고 있는 탕관이 있다.

차향이 가득 퍼진 은거지의 모습이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이재관(李在寬, 1783~1849)의 〈파초제시도(芭蕉題詩圖)〉이다. 그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지 못했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화원(畵員)이 되었고 벼슬도 지낸 인물이다.

오래 전부터 파초 잎, 단풍 잎, 오동 잎 등 식물의 잎에 시를 쓰는 엽상제시(葉上題詩)는 운치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중에서 파초는 잎이 크고 아름답다고 여겨져서 예부터 문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원림을 가꿀 때 자주 선택되어졌다.

조선 초기 문신인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이 쓴 원예서 『양화소록(養花小錄)』은 꽃과 나무들의 종류와 재배방법, 활용방법 뿐만 아니라 9품으로 나누어 평하고, 그 의미, 상징성을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파초는 초왕(草王)·녹천암(綠天菴) 등 이라 칭하며 그 고귀한 모습에 2품으로 올렸다.

당나라 유명한 시인 위응물(韋應物, 737~804)은 “… 종일 서재에서 할 일도 없어서 파초 잎 위에 홀로 시를 적네.(… 盡日高齋無一事 芭蕉葉上獨題詩)”라며 파초 잎에 시를 짓는 한가로운 생활을 읊었다.

이재관의 그림들 가운데 파초를 제재로 사용한 작품들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파초하선인도(芭焦下仙人圖)〉도 파초가 등장하는 그림이다.

〈파초제시도〉와 달리 세로가 긴 작품이지만, 파초 잎 위에 글을 쓰는 고사와 먹을 가는 동자, 그 주변으로 커다란 암석과 파초, 여러 기물들이 올라간 탁자를 구성한 모습은 두 작품 모두 유사하다.

그러나 〈파초제시도〉에만 차를 준비하는 도구인 탕관과 풍로가 등장한다. 찻물을 끓이는 탕관과 풍로는 한가로운 일상에 운치를 더해주는 소재로 그려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조선 후기 문인 이덕무의「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라는 글을 살펴보도록 하자.

… 오른편에는 일제히 꽃봉오리를 터뜨린 매화가 보이고, 왼편에는 차 끓는 소리가 들리는데, 송풍회우가 일어난다. … 4~5월경, 동산에 숲이 우거지고 과일이 열리기 시작하고 새들이 지저귀면 부드럽고 푸른 파초 잎새를 따서 미원장(米元章) 의 《아집도서첩(雅集圖序帖)》을 모방, 왕마힐(王摩詰)의 「망천절구(輞川絶句)」 옆 줄에 써놓으면 글 배우는 동자가 가지고 싶어 할 것이다. …

최혜인 연구원.
최혜인 연구원.

선귤당(蟬橘堂)은 이덕무의 호이자, 그가 거처한 곳이다.

그곳에 있으면서 찻물 끓는 소리를 들으며 매화를 감상하고, 아름답게 자란 파초 잎에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를 적으며 여유로움과 자신만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일상이다.

그 모습은 마치 〈파초제시도〉와 같아 보인다. 우리는 그림과 글을 통해서 조선 후기 문인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삶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한편 이 그림에서 다동의 행동은 다른 차 그림에서와 달리 풍로 앞에 앉아 있지 않고 고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자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찻물을 끓이면서 먹을 갈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일 다동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참고문헌]

한국고전종합DB

黃鳳池 輯, 기태완 譯, 『唐詩畫譜』, 보고사, 2015

이인숙, 「파초의 문화적 의미망들」,『大東漢文學』제32호, 대동한문학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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