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관세 등 통상현안과 방위비 분담금 등 한미 협상 지렛대...농민 달래기 과제

WTO 개도국유지 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이 지난 18일 청와대 분수광장 앞에서 WTO 개도국 포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전국농민회총연합]
WTO 개도국유지 관철을 위한 농민공동행동이 지난 18일 청와대 분수광장 앞에서 WTO 개도국 포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전국농민회총연맹]

【뉴스퀘스트=최석영 기자】 우리 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개도국) 지위 포기를 선언했다.

지금까지는 농업과 기후변화 부문에서 개도국 지위를 주장해 왔지만 이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모든 분야에 대해 개방하겠다는 의미다. 

다만 농업 부문에서 장기적인 타격이 우려되지만 이를 보완할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어 정부의 세밀한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5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우리 경제의 위상과 대내외 여건, 경제적 영향을 두루 고려해 개도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며 "농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정책·재정지원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 트럼프의 압박에 굴복?

한국은 1995년 WTO 출범 당시 농업과 기후변화 분야에서 개도국 지위를 선택했다. 당시는 회원국의 선언만으로 개도국 지위 선택이 가능한 점을 활용한 셈이다.

경쟁력이 부족한 우리 농업의 현실을 고려할 때 외국 농산물이 개방될 경우 큰 타격이 우려됐기 때문이다.

이에 그동안 높은 관세 부과와 보조금 지급 등으로 우리 농업을 지켜왔으며, 회원국들과의 협상에서도 관세 인하 폭과 시기 조정 등 상대적으로 느슨한 규제를 적용받아 왔다.

이번에 우리정부가 개도국 지위를 포기한 배경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이 작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월 트위터를 통해 "WTO 개도국이 불공평한 이득을 얻고 있다“며 미 무역대표부(USTR)에 향후 90일 내 WTO 개도국 기준을 바꿔 개도국 지위를 넘어선 국가가 특혜를 누리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국을 겨냥한 것이었지만 한국도 거론됐다.

트럼프는 OECD 가입국이면서 주요 20개국(G20) 회원이고, 세계은행에서 분류한 고소득 국가인 동시에 세계 상품무역에서 비중이 0.5% 이상 되는 국가가 WTO 개도국에 포함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이들 기준에 모두 부합한다.
트럼프가 지목한 국가 중 싱가포르와 브라질은 개도국 지위를 포기했고 중국은 거부하고 있다.

[사진=기획재정부]
[사진=기획재정부]

◇ 미국과의 협상대응 카드

정부의 이번 결정은 트럼프 정부의 통상 압박과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에 대응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우리가 개도국 지위를 고집할 경우 미중 무역분쟁이 격랑에서 자칫 중국처럼 미국의 대응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관세 등을 포함한 통상 문제와 내년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을 고려해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다른 현안에서 협상 분위기를 우호적적으로 조성하겠다는 의도다.

개도국 지위를 포기하더라도 당분간 관련 혜택을 유지 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

이와 관련 홍 부총리는 "개도국 지위 포기가 아니라 미래 협상에 한해 특혜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라며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에 따라 결정한 현재 농산물 관세율이나 농업보조금총액(AMS)은 새 농업협상이 타결되고, 각국이 이행계획서를 제출·검증한 뒤 국내 비준 등 절차를 마무리할 때까지 유지된다"고 말했다.

특히 "가까운 장래에 WTO 농업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우리 농민들의 반발을 고려한 말이다.

실제 농업분야를 포함한 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은 회원국별 입장 차이로 10여년 넘게 중단된 상태다. 정부로서는 개도국 지위 졸업을 선언해도 선언적 의미 외에 불이익은 없는 셈이다.

◇ 농민단체 등 거센 반발

농민 단체 등은 이번 개도국 지위 포기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WTO 출범당시 우리는 농산물 무역적자수지 악화, 농업기반시설 낙후 및 낮은 국제 경쟁력, 농가소득저하 및 농산물 가격의 높은 변동성 등을 이유로 농업분야 개도국지위를 선택했다"며 "지난 20여 년 동안 한국농업은 1995년 당시 문제점을 하나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농업·농촌·농민의 현실은 더욱 악화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의 개도국지위 포기압박은 사실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며 "한미 FTA 재협상에서 보듯이 미국은 한국의 농산물 시장 개방을 더욱 노골적으로 요구할 때 정부는 이를 거부할 명분을 잃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도 농민단체는 서울 외교부 청사 앞에서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다.

농민단체의 주요 요구 사항은 ▲공익형 직불제 도입 ▲농업 예산 확대(전체 예산의 4%) ▲농가 소득 보장 ▲농산물 가격 안정 대책 ▲통상ㆍ식량 주권 실현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민·관 합동 특별위원회 구성 등이다.

이에 정부는 개도국 포기와 상관없이 쌀 등 일부 농산물에는 예외적인 보호조치를 추진할 방침이다.

수입 쌀에 대한 513% 관세도 유지하고 보조금 역시 WTO에서 허용하는 품목 불특정 최소허용 보조 등을 활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농업 보조금을 가격을 지지하는 형태로 직접 주는 방식(현 직불금) 대신 가격과 직접 연계하지 않는 방식으로 바꾸면 지금보다도 지원을 더 늘릴 수 있다"며 "통상 후진국은 직접 가격을 보조하지만 선진국들은 간접 지원하는 형태이며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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