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성가 변호사의 와인 제국 건설기(1)

【뉴스퀘스트=이철형(와인나라 대표)】 와인 제국 건설기 1편의 주인공의 부고 기사는 이런 타이틀로 시작된다.

‘애호가 와인 메이커, 와인 분야 거인이 되다! (From dilettante winemaker to a giant in the field)’

그리고 그에 대한 세인들의 한 줄 평은 ‘자수성가한 변호사 출신 와인 제국 건설자’이다.
 
그는 미국에서 대공황기(1929~1940년대까지)시작 즈음(1930년 2월)에 LA에서 태어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금주령(1919~1933, 마지막 해제한 주가 1960년)이 해제되기 시작하는 때(1933년)에 만3살이 된다.

교사인 아버지를 두었으나 공황기이다 보니 아버지가 실직하자 5살에 신문팔이를 하기 시작해서 아동기와 청소년기에는 동네 슈퍼마켓 구석에서 닭과 달걀을 파는 장사를 하는 사업가(?)가 되고 여름철 방학 때는 콜로라도에 있는 할아버지 농장에서 옥수수 밭 농사일과 온갖 허드렛일을 하기도 하고 종마 사업을 하는 삼촌 집에서 말 키우는 일도 하며 당시 최고로 유명한 경주마 대회 참관 기회도 갖는다.

학기 중에는 캔디 제조원, 소다수 판매점 점원, 벌목군, 우체국 임시직원, 소노마 밸리에서 맥주 원료인 호프 수확원 등의 일을 하면서 샌프란시스코의 에이브라함 링컨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리고 UC 버클리 대학 학부에서 인문학과 과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을 법대에 진학하여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는데 그 동안도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두 하역 노동자, 트럭 운전자, 버클리 경찰, 경호원, 앰뷸런스 운전자 등의 일들을 닥치는 대로 했고 1955년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토지 개발과 재산권 전문 변호사업을 개업한다.

1950년대 후반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법무법인을 설립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변호사 협회 창립 멤버가 되고 1970년대에는 법률 활동뿐 아니라 IBM 컴퓨터를 기업에 리스해주는 회사(Decimus)의 창업 멤버 네 명중 한 명이 되기도 할 정도로 다방면에 관심을 갖는 그였다. 
 
법무법인을 운영하던 그는 변호사 일이 지겨웠는 지 아니면 어릴 때부터 늘 여러 직업을 전전했던 것이 무의식 중에 몸에 배서 그런 지 44살이 되던 1974년에 무언가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이때 그가 어릴 때 일했던 할아버지의 농장이 생각나서 그는 그의 부인과 함께 나파 밸리 위쪽에 있는 레이크 카운티(Lake County)의 레이크포트(Lakeport)에 82 에이커(33ha=10만평)의 배와 호두 과수원을 사들인다.

처음에는 휴가 때 이용하는 주말 농장처럼 사용하다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좋은 품질의 포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이 배와 호두 과수원을 갈아엎고는 10대의 두 딸들과 함께 포도나무로 바꾸어 심어 좋은 품질의 포도를 생산하는 포도원을 만들고 이 포도를 외부 와인 회사들에게 판매한다. 포도생산자를 겸업으로 하게 된 것이다.

5~6년 사이에 많은 포도재배자들이 생겨난데다가 1981년 포도가 풍작이 되면서 포도 공급 과잉현상이 생겨 원가도 못 건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그는 차라리 자기가 와인을 만들겠다며 당시에 유명한 양조가 2명을 스카우트하여 1982년부터 와인을 양조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 포도가 아무리 노력해도 발효가 제대로 완료되지 않고 기존의 다른 샤르도네 와인들과는 달리 단맛이 좀 더 나는 화이트 와인이 생산되고 만다.

양조가 2명은 양조 실패(?)로 시장성이 없다고 판단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이런 스타일의 와인이 소비자의 기호에 더 맞을 것이라는 역발상을 하고는 시장에 출시한다.

그리고는 그 해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맏딸과 함께 새로운 트렌드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인 뉴욕으로 날아가 유명한 레스토랑과 와인 소매점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한 잔씩 시음을 시키고 나서 무명의 자신의 와인을 병당 5달러인데 몇 박스를 살거냐고 물어보며 판매를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하여 첫날 100케이스를 판매하는 성과를 얻는다. 당시 미국 와인 시장은 해외산 고가 명품시장과 자국산 저가 데일리 시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여기에 소매가 15~20달러짜리 프리미엄 시장이라는 신규 틈새 시장을 만들며 블루 오션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자국 생산 무명의 와인으로. 

이 와인은 출시 다음 년도인 1983년에 전미 와인 경진대회에서 미국와인 최초로 플래티넘 상을 거머쥔다.

그가 이 와인을 만들 때 목표는 명품 부르고뉴 와인의 맛과 향을 가진 그러면서도 가격대는 소비자들이 구매할만한 합리적인 가격대의 샤르도네 와인을 생산하는 것이었는데 양조 실패(?)로 그것과 아주 유사하게, 근사한 오크향이 나면서 과일향과 아로마는 오히려 부르고뉴 와인보다 더 풍부하고 단맛은 약간 좀더 있는 스타일의 와인을 만든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것이, ‘말로는 드라이한 와인을 찾지만 실제로는 단맛이 있는 와인을 찾는다’는 진부한 와인업계의 말을 입증이나 하듯 소비자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것이다.

즉 이것은 당시 미국 와인 시장이 급격히 커지기 시작하는 초입이어서 ‘명품 부르고뉴 스타일의 와인이면서 가격은 착한 와인’을 찾던 소비자들의 소소한 허영심(?)을 충족시켜주었기에 당시의 소비 패턴과 시기적으로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당시에 프랑스에서도, 신맛을 더 내기 위해 완숙하기 전에 미리 수확하여 와인을 만들던 전통 양조 스타일을 지양하고 완숙한 포도로 과일향과 꽃향이 풍부한 와인을 만드는 양조 스타일이 권장되던 시기였는데 지구 반대편의 그는 그 사실을 몰랐음에도 실패(?)한 양조 덕분에 본의 아니게 그런 스타일의 와인을 만든 셈이니 운도 따른 셈이다.

여기에 당시 레이건 대통령(1911~2004 : 대통령재임기간 1981~1989)의 부인인 낸시 레이건 여사도 이 와인의 열렬한 팬이 되는 운까지 따랐다.
 
이 와인을 양조하면서 그는 본업인 변호사업을 멀리하면서 점점 와인사업에 빠져들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부인은 이혼을 선언한다.

잘나가는 변호사업을 그만두고 포도 농사와 양조라는 막노동도 불사해야 하는 일에 미친 듯이 열정을 불태우며 빠져드는 남편이 싫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그녀가 와인사업이 그에게는 (변호사 일도 마찬가지였지만) 마치 정부(情婦)와 같았다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을까? 그는 이혼을 하면서 전부인이 소유한 와이너리 소유권을 전부 사들인다.

그리고는 1984년부터 동업 관계에 있던 여성 변호사와 1986년 재혼을 하고 1987년부터는 아예 와인업에 올인한다.

재혼한 부인은 1992년까지 변호사업을 계속하면서도 남편의 와인 사업을 음으로 양으로 돕다가 그녀도 1995년부터는 변호사업을 접고 와인사업에 올인하게 된다.

그녀는 1980년 경쟁사의 보조 변호사로 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는데 1984년부터 법무법인에서 동업을 할 때만 해도 그가 와인사업을 취미로 한다고 생각했지 거기에 올인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드디어 2000년에 포브스지에 미국 부자 서열 218위로 등재되면서 와인이 아니라 부자로서 더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 때까지 그는 변호사 경력으로 캘리포니아 변호사 협회 창립 멤버이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와인 사교계에도 잘 나타나지 않아 와인업계는 물론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이었기에 더욱 주목을 끌었다.
 
2000년에 그의 나이가 70이 되면서 그는 와인업도 실증이 났는지 은퇴를 꿈꾸었으나 벌려 놓은 와인 사업이 너무 방대해져서 뜻대로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올인하면 미친 듯이 모든 것에 전력투구하며 진두지휘하여, 스스로는 물론 조직원들까지도 숨막히게 할 정도로 너무 소소한 것까지도 신경쓰는 그가 걱정이 되어 취미생활로 여행을 하든 뭐든 다른 일을 해보라고 권하는 부인의 조언을 듣고 그는 어릴 적 경험을 살려 경마와 종마 사업을 하기로 한다.

총 2억 달러 가량이 투자되었다고 추정되는 이 사업에서 그는 초기 3년은 사기를 당하기도 했지만(이것도 결국은 변호사답게 원금을 회수했다.) 결국은 지금까지도 미국 경마사상 최대 상금 수령이라는 기록을 남기며 이 분야에서도 대성공을 이룬다. 그리고 그는 2011년 3년간의 암투병 생활 끝에 세상과 이별을 한다.

하지만 죽기 직전까지도 그는 사업의 열정을 버리지 않고 포도원이 바라다보이는, 1995년부터 살던 저택에 살며 와인 사업에 조언을 하고 죽기 1주일 전에 조차 새로운 말을 구매할 정도로 평소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다. 

그의 사망 당시 자녀들은 전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56세 제니, 54세 로라와 재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25세 케이티, 23세 줄리아, 22세 크리스 등 5명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 경영 사업이 680여년간 이어진 이탈리아의 안티노리 가문처럼 후대에도 이어지기를 바랐기에 재혼한 부인을 포함한 6명 및 사위들이 공동 소유주가 되는 와인 회사를 2명의 신탁인에게 회사 자산 관리를 맡긴다.

가족 중 한두 명의 욕심으로 인해 회사가 해체되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각자에게도 적절한 회사의 지분을 배분하고, 각자에게 독립적이지만 마케팅은 공동으로 하는 와이너리와 농장들을 상속해주어 향후 있을 분쟁과 갈등의 소지를 없앴다. 그의 와인 제국이 지속되고 확장될 터전까지 닦아 놓았던 것이다.
 
과연 이 와인 제국 개국의 초대 황제는 누구일까?

창업주 제스 잭슨.
창업주 제스 잭슨.

그리고 이 와인은 무엇일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스 스톤스트리트 잭슨 주니어(Jess Stonestreet Jackson Jr.(1930~2011)다. 그는 오늘날 ‘미국 프리미엄 와인의 대부’로 불리운다.

이 와인 제국은 켄달잭슨(Kendall Jackson)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여 지금은 이 브랜드를 포함하여 35개의 브랜드와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칠레,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5개국에 걸쳐 와이너리를 가진 잭슨패밀리와인즈(Jackson Family Wines)가되었다.

이 와인 제국 건설의 초석이 된 와인은 켄달잭슨 빈트너스 리저브 샤르도네이고 두번째로 주춧돌이 된 와인은 카멜로드 샤르도네와 카멜로드 피노누아이다.

이 두 브랜드는 2011년 잭슨 사망 당시 이 회사의 연간 5백만 케이스 총 생산량 중 약 4백만 케이스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회사 와인의 중심축이자 효자 브랜드다. 

켄달잭슨 빈트너스 리저브는 오바마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그의 와인 리스트의 필수 아이템이었고 레이디 가가가 대기실에서 반드시 한 잔하고 공연 무대에 오른다는 와인이 되었다.

켄달잭슨 빈트너스 리저스 샤르도네 (Kendall Jackson Vintner's Reserve Chardonnay)
켄달잭슨 빈트너스 리저스 샤르도네 (Kendall Jackson Vintner's Reserve Chardonnay)

지금까지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스테디 베스트 셀러 와인라는 전설의 와인이 되었다.

이 가문의 첫 딸과 이 회사의 부회장이기도 한 사위(Don Hartford)가 소유한 하트포드 와이너리가 생산한 부띠끄 와인인 하트포드 파 코스트 피노 누아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 방미시에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찬주이기도 하다.

이 스토리에 등장하는 첫부인은 제인 켄달(Jane Kendall)이고 그래서 켄달 잭슨이라는 브랜드가 탄생했다. 재혼한 부인은 바바라 방케(Barbara Banke)이고 그녀는 현재 이 회사의 회장이자 제국의 계승자로 2대 황제인 셈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이 회사의 제국 건설의 기초가 되었고 앞으로 가훈이 될 기본 정신과 제국 건설 못지 않게 중요한 2대 황제의 업적과 경영 스타일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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