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作 '미인도', 19세기 초반, 비단에 채색, 114.2cm×45.7cm, 간송미술관 소장.
신윤복作 '미인도', 19세기 초반, 비단에 채색, 114.2cm×45.7cm, 간송미술관 소장.

【뉴스퀘스트=백남주 큐레이터】 <미인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인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813 이후)이 그린 인물화다.

얹은 머리를 곱게 올린 자그마한 얼굴의 아름다운 여인이 다소곳하게 서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여인은 반듯하고 환한 이마에 초승달 같은 눈썹, 작고 쌍꺼풀이 없는 눈매, 단정하고 예쁘장한 코와 앵두를 닮은 살짝 다문 입술을 가지고 있다.

입고 있는 짧은 회장저고리는 몸에 꼭 맞고 푸른 색 치마는 풍성하게 그려졌다. 주인공 여인은 고름에 매단 삼작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옷고름을 살짝 만지고 있는데, 말 대신 손짓으로 마음을 전하는 듯이 보인다.

작가인 혜원 신윤복은 조선 시대 어느 화가보다 색을 선택하고 활용하는 감각이 탁월하였다. 전체적으로는 은은한 색조를 사용하면서, 군데군데 과감한 색을 포인트로 사용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미인도> 역시 색의 강약과 대비를 절묘하게 사용하였는데, 회장저고리의 깃과 고름, 곁마기는 진한 자주색으로 그렸고, 소매의 끝동은 푸른색 치마와 같은 계열의 옥색으로 표현하여 자칫 지루해 질 수 있는 화면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한 올 한 올 정성들여 그린 검은색 머리카락은 풍성하게 표현되었고, 머리에 맨 자주색 댕기 덕에 머리카락의 사실성이 강조되었다.

또 삼작노리개의 푸른색 술은 곁마기에서 빠져나와 허리띠 위로 드리워진 붉은색 속고름과 대비를 이루며 균형미를 보인다.

조선 시대 초기에 제작된 부인의 초상 이후 여인을 단독 모델로 하여 인물화를 그린 것은 신윤복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작품은 후대에 제작된 미인도의 본보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맵시 있는 옷차림이나 남다른 자태로 보아 여염집의 규수는 아닌 듯하고, 아마도 당대 최고의 기녀가 모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가슴 속 깊은 곳에 서린 봄볕 같은 정, 붓끝으로 능히 그 마음을 전하도다 盤薄胸中萬化春, 筆端能與傳神)”

라고 제시가 씌어있다.

한편 이 작품을 통해 조선 후기에 미인의 기준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당시 유행하던 패션 경향 도 읽어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여인의 옷차림을 일컫는 표현 중에 ‘하후상박(下厚上薄)’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후상박은 글자 그대로는 ‘아래는 두텁고, 위는 꽉 조인다’는 의미로 치마는 풍성하고 저고리는 꽉 조이게 입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저고리는 가슴이 드러날 정도로 길이가 짧았으며 몸에 완전히 밀착되어 거동이 힘들 정도였다. 또 여러 층 겹쳐 입은 치마는 매우 풍성하였는데, 이러한 옷차림은 당대에 그려진 풍속화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의 패션과 유행을 이끄는 선두 주자들은 기생들이었는데, 그녀들이 입고, 꾸미고, 바르는 것은 일반 여인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일반 여염집의 여인들도 기생들의 옷차림을 따라 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사대부가의 여성들조차 기녀들을 따라하여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의 「사소절(士小節)」에 이러한 풍조를 개탄하는 글을 남겼다.

옷깃을 좁게 깎은 적삼이나 폭을 팽팽하게 붙인 치마는 의복이 요사스럽다. (···)

새로 생긴 옷을 시험 삼아 입어 보았더니, 소매에 팔을 꿰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졌으며, 심한 경우에는 간신히 입고 나서 조금 있으면 팔에 혈기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부풀어 벗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소매를 째고 벗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요망스러운 옷일까!

대저 복장에 있어서 유행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창기(娼妓)들의 아양 떠는 자태에서 생긴 것인데 세속 남자들은 그 자태에 매혹되어 그 요사스러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처첩에 권하여 그것을 본받게 함으로써 서로 전하여 익히게 한다. 아, 시례(詩禮)가 닦이지 않아 규중 부인이 기생의 복장을 하도다! 모든 부인들은 그것을 빨리 고쳐야 한다.

- 이덕무, 「사소절」, 『청장관전서』,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신윤복은 고령 신씨로 호는 혜원이다.

아버지 신한평(申漢枰, 1726~?)은 도화서 화원으로, 특히 초상화와 속화에 빼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백남주 큐레이터.
백남주 큐레이터.

신윤복 또한 화원이 된 것으로 보이나, 생애나 행적을 당시의 문헌 기록에서 찾기는 어렵다. 또한 제작 연대가 밝혀진 작품이 드물어, 그의 정확한 활동 시기를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주로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그림(오주석, 월간미술, 2009)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강명관, 푸른역사, 2001)

조선의 미를 사랑한 신윤복(조정육, 아이세움, 2014)

청장관전서(이덕무,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 편(국립민속박물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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